EP.184 슈퍼 아기곰, 데뷔하다.
‘됐어. 이제 능력치랑 스킬을 분배해 볼까?’
이어서 나는 그간 쓰지 않고 쭉 적립해 두었던 능력치와 스킬 포인트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파업한답시고 시스템 창은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그다음부터는 개업식에 놀이공원에 연맹 문제까지, 어떤 스킬과 능력치를 올려야 할지 고민할 틈도 없이 바빴으니까.
‘많이도 쌓여있네.’
현재 남아있는 스킬 포인트는 열 개, 능력치 포인트는 무려 오십 개.
S급 기준으로 주 능력치가 [email protected] 정도니까.
이걸 다 쓰면 능력치는 A급 최상위 수준에 근접하겠네.
아이템까지 차면 S급 수준일 테고.
헌터들의 능력치는 낮은 구간일수록 격차가 작고, 위로 올라갈수록 격차가 크다.
F급의 경우에는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고 해봐야 2, 3 정도 나는 게 고작.
반대로 S급부터는 같은 등급이어도 능력치가 적게는 10, 많게는 20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하고.
게다가 1과 2 사이의 격차와 99와 100의 격차는 같은 1이라도 의미가 다르니, 위로 올라갈수록 능력치 1의 중요성이 비할 바 없이 높아진다.
이 밖에도 보조 능력치는 주 능력치의 70%, 나머지 능력치가 주 능력치의 절반 정도에서 10% 정도.
물론, 이건 일반론이다.
정상적인 헌터라면, 주로 사용하는 능력치가 자동으로 오를 뿐, 포인트로 능력치를 올리지는 않으니까.
즉, 난 해당 사항 없다는 말이지.
< 힘이 상승합니다. >
< 민첩이 상승합니다. >
< 체력이 상승합니다. >
< 능력치 포인트를 모두 사용했습니다. 잔여 : 0 >
< 현재 능력치 >
힘 : 65+(3), 민첩 50+(3), 체력 40+(2), 마력 : 20(+1)
‘오······. 이렇게 눈으로 보니 뿌듯하네.’
무엇보다 뿌듯한 건, 드디어 나에게도 S급 스킬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무려 두 개나.
능력치 +5%라는 ‘산신령의 진짜 가호’의 애매한 보정치도 점점 더 의미가 생기고 있다.
60을 넘는 순간부터는 능력치 1 올리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게 현실이니까.
실제로 눈에 보이는 수치 이상의 가치가 있단 말씀.
< 검의 달인 (S) >
< 고미류 기공술 – 웅신입기혈 (S) >
본래 B였던 검의 달인은 S급으로, A였던 웅신입기혈도 S급으로.
조금 억울한 것은, A급을 S급으로 올리려면, 스킬 포인트가 두 개나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S급부터는 이야기가 다른 건가.’
< 현재 잔여 스킬 포인트 : 5 >
‘나머지는 역시 새로 익힌 스킬에 투자하는 게 나으려나······.’
아니지, 얼마나 효율이 높을지 실험을 해보고 결정하는 게 나을 거야. 의외로 쓸모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고민에 빠져있을 때,
- 끼익······.
“아, 아우웅······.”
눈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북극곰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웅.”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각 잡힌 자세로 통통한 배를 만지작거린 뒤, 솜방망이를 움직여 밥을 먹는 시늉을 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거짓말처럼 새하얀 색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아웅이도 그렇고, 다웅이도 그렇고, 신기할 정도로 하얗단 말이지.
“응, 알겠어. 갈게.”
이에 나는 시스템 창을 닫고 거실로 향했다.
스킬이야 언제 찍어도 찍을 수 있으니까, 가족의 평화로운 아침 식사를 방해할 수는 없지.
사실 이전에는 이렇게까지 가족 행사나 식사에 집착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쓰러지고 난 뒤로, 생각이 달라졌다.
건강하실 때,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보내야지.
“오오, 수하! 오늘 아침은 이 몸이 좋아하는 계란말이가 있느니라! 보거라!”
식탁에 다가가자, 이미 식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아기곰이 씨익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메뉴는 평범하게 김치찌개에 계란말이.
뭐든지 잘 먹는 아기곰이지만, 평범한 집 반찬 중에는 유독 계란말이를 선호하는 편이다.
“아, 엄마, 그런데 아웅이랑 다웅이 아르바이트비는?”
식탁에 앉은 나는 숟가락을 들며 무심결에 아기곰 삼 형제의 임금 문제에 관해 물었다.
“아, 마침 잘됐다. 수하 네가 가서, 아웅이랑 다웅이랑 고미 통장 좀 만들어줘. 애기들한테 일당을 현금으로 주고 쌓아놓으라고 할 수도 없잖아. 엄마가 헌터 일은 잘 몰라서, 혹시 헌터면 우리 애기들 이름으로 된 통장도 만들 수 있니?”
띠링.
업무가 1 추가되었습니다.
무보수 무노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물어본 건데, 갑자기 새로운 임무가 추가돼버렸다.
‘음, 나 혹시 일을 만드는 타입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워라밸에 목숨을 건 인간 김수하가, 스스로 일을 만들어내는 타입의 인간일 리가 없지.
절대 아니야. 그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일단 알아는 봐야지.
“우웅? 통장? 그것이 무엇이냐?”
통장을 만들어 주라는 어머니의 말에, 아기곰 노조의 위원장··· 이라기에는 너무 경제 개념이 없긴 하군. 이 녀석이 위원장으로 있어도 되는 거냐.
“으음, 거기에 고미랑 아웅이, 다웅이가 번 돈이 모이는 거예요. 그걸로 맛있는 것도 사먹고, 장난감도 사고.”
“호오······.”
하지만 어머니의 설명을 들은 고미는 이내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아웅이와 다웅이는 엄마 아빠를 지키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맛있는 간식만 있다면······.”
역시, 예상은 했다만, 노조 위원장 자격이 없는 아기곰이군.
“고미! 안 돼요! 일을 하면 돈을 받는 거예요!”
사실 어머니는 아웅이와 다웅이가 가게에서 일을 도와주는 것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애들은 애들답게 놀아야 한다는 주의시거든.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두 아기곰만 놔두고 종일 집을 비우기도 뭐하고, 곰돌이 삼 형제가 죽어도 엄마 아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니, 마지못해 일을 시키는 입장이랄까.
“하, 하지만······.”
“안 돼요, 일을 하면 돈을 받는 거고, 이제 고미랑 아웅이 다웅이도 돈 쓰고 모으는 거 배워야 해요.”
음, 훌륭하다. 내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정말로 아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걸 가르쳐 주고 있어. 경제 관념이 없으면 안 되지.
“우, 우웅······. 알았느니라.”
노조 위원장은 돈을 안 받겠다고 하고, 사측에서 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물론, 후자만 아름답다.
노조 위원장이 임금 문제에 이렇게 물렁하게 접근해서야, 직무유기지.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웅이와 다웅이는 아르바이트비를 받는 게 아니라, 정식으로 월급을 받고 일하는 직원이라고 했다.
“어휴, 그런데 얼마를 줘야 할지를 모르겠네. 일단 손님 오는 거 보고 정해야지. 그래도 최저임금보다는 더 챙겨줘야 하는데······.”
음, 우리 고옥분 여사께서도 고충이 많으시군.
하긴, 이제 막 장사를 시작했고, 처음에는 직원을 둘 마음도 없이 두 분이 가게를 꾸려나가려 했으니까.
‘뭔가 묘하네.’
돈 생각없이 일을 하는 직원과, 어떻게든 월급은 챙겨주려고 걱정하는 사장이라니.
“후훗! 걱정하지 말거라! 이 몸의 위대한 작품이 가게 앞에 걸려있으니, 반드시 손님들이 몰려들 것이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고미는 언제나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 * *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봉식이, 고미와 함께 집을 나섰다.
‘후우, 좀 긴장되네.’
언제나 그렇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건 적잖이 기대되고, 또 긴장되는 일이다.
[ 후훗, 수하! 걱정하지 말거라! 위대한 이 몸이 함께 있는 한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니! ]
어깨가 굳은 것을 느꼈는지, 언제나처럼 머리 위에 올라타 있던 아기곰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나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고,
“그래, 뭘 긴장하냐. 가자.”
봉식이 역시 별것 아니라는 듯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가자.”
오늘은 고미에게도 꽤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숲속 친구들 외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기도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슈퍼 아기곰의 데뷔 무대라고 할 수 있으니까.
“고미, 길드 사람들 앞에서는 말해도 돼.”
[ 우, 우웃! 정말이냐! ]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에, 아기곰의 솜털이 흥분으로 바짝 곤두섰다.
그간 고미에게 말을 하지 못하게 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말하는 아기곰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시선을 받는 존재라, 번거로운 일이 생기기 쉽다는 게 첫 번째.
두 번째로는, 고미의 능력을 알아차린 헌터들이 이 순수한 솜뭉치를 이용하기 위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협박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대인전 능력은 거의 자타공인 최강으로 인정받는 문경준이 다웅이한테 박살이 난 마당에, 부모님의 안전을 걱정할 이유가 없지.
애초에 이미 초거대 세력이 된 ‘웅왕’의 가족에게 손을 댈 정신 나간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을 거고.
[ 우, 우우웃!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 가자! 달려라, 수하! ]
“넵, 갑니다, 웅왕님! 나, 먼저 간다!”
잔뜩 신이 난 고미에게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나는 곧바로 허곰답보를 활성화해 봉식이를 뒤로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 오오오! 수하, 제법 빨라졌구나! 또다시 그 상태창으로 능력치를 올린 것이냐! ]
“응, 오늘 아침에. 아 참, 스킬 포인트 좀 남았는데, 뭘 올리는 게 좋을지 이따 같이 연구해보자.”
[ 후훗, 좋다. 위대한 이 몸의 도움을 받으면 더욱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
* * *
저스티스의 빌딩 앞에 도착하자, 평소처럼 이강혁 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뒤로 수십에 달하는 헌터들이 서 있다는 점 정도?
“수하 씨, 오셨군요. 또 강해지신 것 같네요.”
거의 나는 듯이 먼 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도착하는 나의 모습에, 이강혁 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 모두 주목.”
그리고는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나와 고미를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연맹의 조정위원인 김수하 씨다. 그리고 어깨 위에 앉아 계신 분이 앞으로 너희들의 교육을 책임질 특별 교관, 고미 선생님이시다.”
“안녕하세요. 김수하입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받자, 저도 모르게 입술이 바싹 마르고 말았다.
‘으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긴장되네.’
본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닌데, 낙하산이라 그런지 더 긴장된다.
하지만, 긴장감을 느낄 새도 없이, ‘특별 교관’ 곰 선생님의 연설이 시작됐다.
“오오! 모두 위대한 이 몸을 맞이하기 위해 친히 이곳까지 내려온 것이냐!”
간단한 인사(?)를 마친 자뻑 아기곰은 곧바로 내 어깨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오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후후, 소개하마. 이 몸이 바로, 고미니라.”
말하는 아기곰의 등장에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저스티스의 길드원들은 당황한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작은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곰이라고?”
“고미 아니야?”
“곰이라고 한 거 아니야?”
음, 역시. 나만 그렇게 들은 게 아니군.
나도 처음 만났을 때는 ‘고미니라’가 아니라 ‘곰이니라’로 들었지.
발음이 너무 헷갈린다고.
“후훗.”
하지만 숲속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한층 성장한 아기곰의 반응은 더 이상 처음과 같지 않았으니,
“곰, 이 아니라, 고미니라. 한글로는 기역, 오, 미음, 이, 영어로는 G.O.M.I.”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주 느긋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모두의 머리에 각인 시켜 주었다.
“헥, 헥······. 야, 너 왜 이렇게 빨라졌냐?”
그때, 뒤늦게 도착한 봉식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뭐야, 저거 봉식이 아니야? 봉식이가 못 따라올 정도로 빠른 건가?”
“몇 달 전에 각성했다고 하지 않았어?”
“헌터 시스템에서는 F급으로 분류되어 있던데?”
“저 아기곰이 정말 길드장님 스승 맞아?”
우리의 시선이 봉식이에게로 향하자, 아니나 다를까, 나와 고미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직접 나쁜 말을 내뱉거나, 말투에서 적개심이 느껴지지는 않으니, 역시 저스티스의 평판이 헛것은 아니구나 싶다.
“음······. 아마 저와 고미가 갑자기 조정위원이니 특별교관이니 하는 직책을 맡은 것에 대해서,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나는 잠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준비했던 말을 꺼냈고, 자리에 있던 헌터들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미와 내 실력이 듣던 것처럼 정말 대단한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이 자리에서 증명하라느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의 말에, 자리에 있던 헌터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