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1 초월자의 농장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다웅이의 ‘웅자후’의 효과는, 실로 굉장했다.
‘큰 소리’, ‘부지런함’은 이 녀석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니까.
싸울 때를 제외하면, 다웅이는 지금껏 한 번도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없다.
힘찬 대답이라고 해봤자 말 사이에 텀을 두지 않고 끝에 살짝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다웅!’하는 게 고작이다.
큰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열량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궁극의 게으름뱅이라고나 할까.
그런 녀석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니, 자리에 있는 모두가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 왜 그래.”
혹시 또 뭔가 일이 터졌나 싶어 다웅이를 바라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이 베어 나왔다.
“에휴…….”
“수하 씨, 왜 그러십니까?”
이강혁 씨는 적잖이 당황한 듯 다가와 이유를 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다웅이의 검은 솜방망이를 가리켰다.
“초코바?”
지금 녀석의 손에는, 살짝 베어먹은 자국이 있는 초코바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러니까, 고미에게 받은 숙성 초코바가 너무 맛있어서 비명을 지른 거라는 거지.
‘정말 본능에 충실한 녀석이네.’
노는 것과 먹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고, 평상시에는 늘 게으름을 피운다.
그나마 이 녀석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건 공포의 군주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다웅이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았다.
“고미, 다웅이한테 뭘 시키려면…….”
[ 그래, 먹을 것을 주어야겠구나. ]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싶지만, 무보수 무노동의 원칙을 철저히 하는 아기 판다라고 생각하자.
‘음……. 그런데, 아웅이랑 다웅이 아르바이트비는 잘 챙겨주고 있는 건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문득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 이건 꽤 중요한 문제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와 봉식이가 가게 일을 도와줄 때마다 사람 공짜로 쓰는 거 아니라면서 꼬박꼬박 돈을 챙겨주시곤 하셨다.
친자식에게도 공짜 노동은 시키지 않는 분들이니, 아웅이 다웅이에게도 분명 돈을 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본체인 고미조차 사칙 연산이 서투르고 금전 감각이 꽝인 마당에……. 돈을 받는다 한들 관리는 제대로 할까 싶은 걱정이 드는 게 당연하지.
‘으음, 돈 관리 문제도 생각을 해봐야겠네.’
경제관념은 어릴 때부터 잡아주는 게 중요하다.
세상 물정 모르고 힘만 센 이 순수한 아기곰 삼 형제가 앞으로 바깥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기도 하고.
‘통장을 만들어 줘야 하나, 신용카드는 안되고, 체크카드를 만들어 주는 게 좋겠지?’
그렇게 곰돌이 삼 형제의 임금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다웅이가 다시 한번 포권을 하며 고미에게 예를 갖추었다.
“다, 다웅!”
존경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보아, 초코바의 맛에 어지간히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본 초콜릿색 솜뭉치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다웅이, 이제부터 위대한 이 몸의 명을 수행할 때마다 너에게 숙성 초코바를 내리겠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가게를 잘 지킨다면, 하루에 하나씩 숙성 초코바를 하사하겠노라. 어떠냐? 이 몸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겠느냐? ]
애초에 자기 분신인데, 먹을 걸 주고 컨트롤 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어처구니가 없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나. 저게 다웅이인데.
그래도 내가 위험한 것 같으면 번개처럼 달려오고, 느리지만 엄마 아빠 일도 잘 도와주고 있으니, 이만하면 훌륭하지.
그나저나, 곰돌이 삼 형제 모두에게 부족하지 않게 초코바를 제공하려면…….
‘한 달에 최소한 100개 이상은 필요하겠네.’
거기에 젤리니, 사탕이니, 초콜릿이니, 기타 간식비까지 고려하면, 꽤 부지런히 벌어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어깨가 무겁군. 이게 가장의 무게라는 건가.
‘돌아가면 조정 위원이랑 특별 교관 급여 문제도 이야기해 봐야겠네.’
생각해보니 임금 협상도 없이 취업을 해버린 상태다.
뭐, 이강혁 씨나 한유진 씨가 돈을 가지고 쩨쩨하게 굴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이런 문제는 확실히 해두는 게 좋지.
“다, 다웅!”
한편, 초코바를 주겠다는 말을 들은 아기 판다는 곧장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취해 충성을 맹세했다.
갈색 아기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아기 판다라니, 이 그림은 대체 뭐냐고…….
[ 후후, 좋다, 훌륭하구나. 어서 돌아가자꾸나. 엄마 아빠가 위대한 이 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느니라. ]
결국 한동안 신경전을 벌이던 원조 아기곰과 블랙 앤 화이트 버전 아기곰은 초코바를 매개로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고, 덕분에 가게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 * *
“아웅!”
가게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눈처럼 새하얀 아기곰이 호다닥 달려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다, 다웅!”
아웅이와 마주친 다웅이는 황급히 손짓 발짓을 해가며 무언가를 설명했다.
“다웅, 다웅!”
다웅이의 시선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고미의 얼굴 위였다.
그리고는, 약간 못마땅한 표정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번역하자면, ‘저 녀석, 별 거 아니야’ 혹은 ‘저 녀석, 마음에 안 들어’ 정도 되려나?
[ 다, 다웅이! 그 눈빛의 의미는 무엇이냐! ]
아니나 다를까,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어낸 고미는 또다시 노발대발하며 성을 냈고,
“아웅!”
아웅이는 단호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고미님의 분신이야! 고미님을 의심하지 마!’ 혹은 ‘고미님에게 무례하게 굴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 같군.
“다, 다웅…….”
그러자, 다웅이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초코바로 시선을 옮겼다.
이어지는 다웅이의 몸동작과 표정, 아웅이의 반응으로 미루어 본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라…….
- 그럼 뭔데!
- 역시 원조는 다르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뜻이야!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굉장한 초코바를 만들 수 있지?
- 그것 봐! 이제 고미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지!?
-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리고, 이제부터 고미님이 우리에게 매일 초코바를 주기로 했어! 고미님은 정말 위대한 곰이었어!
- 저, 정말!? 그, 그것 봐! 내가 말했잖아! 고미님은 신의를 아는 진정한 곰이라고!
- 그래, 이제 우리도 이걸 매일 먹을 수 있어! 게다가 자기가 시킨 심부름을 잘하면, 초코바를 하나 더 준대!
음……. 나로 말하자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고미와 붙어다니며 이 녀석의 행동과 심리, 그리고 바디랭귀지를 연구한 세계 최고의 아기곰 학자다.
즉, 약간의 오역이 포함되어 있을지언정, 대충 큰 흐름에 있어서는 거의 틀린 내용이 없을 거라는 거지.
‘훗, 말을 하지 못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그런데, 부모님과 산신령 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요?”
그때, 이강혁 씨가 가게 안을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 갔지?
지금쯤이면 과일이라도 깎아 먹으면서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웅!”
이강혁 씨의 말을 들은 아웅이는 곧장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녀석의 하얀 솜방망이가 가리킨 곳은, 가게의 뒷마당이었다.
우리 가게의 뒤쪽에는 작은 마당이 있다.
풀이 자라고 그런 마당은 아니고, 그냥 물건들을 쌓아 놓을만한 공간이 있다는 거지.
마당의 크기는 대충 트럭 한 대 들어갈 정도.
본래는 주차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딱히 주차공간으로 활용하지는 않고 있다.
수족관이 앞쪽에 있어서, 활어차를 이쪽에 댈 수가 없거든.
어쨌든, 아웅이를 따라 주방을 지나 뒷마당으로 가는 순간,
“응?”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아들, 왔어?”
지금 뒷마당에는 새하얀 게이트 하나가 열려 있었고, 그 앞에는 어머니와 수다르님, 한유진 씨가 서있었다.
이 자리에 없는 멤버는 아버지와 토생원, 그리고 이유찬 씨…….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대충 무슨 그림인지 알 것 같군.
토생원이 우리집 뒷마당에도 굴을 팠고, 과일을 가지러 화원에 들어갔겠지.
호기심 많은 아버지는 항상 던전에 들어가 보고 싶어하셨으니, 옳다구나 하고 이공간 체험을 하러 들어가셨을 테고.
“오오오!”
아니나 다를까, 감탄 섞인 목소리와 함께 새하얀 게이트가 요동치며 채소 장수가 된 토생원과 두 요리사가 걸어 나왔다.
“이야, 우리 토 사장님이 손재주가 좋네.”
“하하하, 제가 이래뵈도 초월자입니다.”
그래요……. 토생원, 아니, 야채 가게 토 사장님, 초월자가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시냐고요.
“혹여 무슨 일이 생기시면, 이 돌을 들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럼 자동으로 게이트가 닫히면서 누구도 사장님 내외를 쫓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게이트에서 나온 토생원은 과일을 내려놓으며 아버지의 손에 들린 보석을 가리켰다.
대화의 흐름으로 보아, 게이트는 항상 열려 있고, 저 보석이 게이트를 닫을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인 것 같았다.
즉, 이 게이트는 평상시에는 식재료 창고로, 비상시에는 쉘터로 쓸 수 있다는 거지.
“참 신기하네. 나는 각성자가 아닌데도 게이트를 닫을 수 있다는 겁니까?”
토생원의 설명을 들은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몇 번이나 그 보석을 훑어보았다.
「하하,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멋진 것이지요. 그리고 이 안에는 수다르 님과 제가 준비한 개업식 선물과 고미님을 위한 간식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순간 황복 코스요리 시식회에서 토생원이 그 보석을 가리키며 했던 설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니까, 인벤토리도, 소환석도 아니고, 그냥 자기 화원으로 가는 게이트와 마력 없이도 그걸 닫을 수 있는 물건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는 소리냐…….
요약하면, 우리 집 뒷마당에 초월자의 식재료 창고(?)를 고스란히 옮겨 왔다는 소리.
정말 굉장하군.
“하하하, 수하님, 이제 한유진 씨의 집에서 제 화원을 거치면 곧바로 부모님이 계신 가게로 이동할 수 있으십니다!”
거기다 다른 곳하고 모두 연결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하긴, 토끼 굴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긴 하지.
“어? 아들, 벌써 저 예쁜 아가씨 집까지 오고 가는 사이야!?”
토생원의 설명은, 또다시 아버지의 로맨스 병에 불을 지폈다.
대체 왜 저렇게 엮는 걸 좋아하시는 걸까.
저 나이 또래의 어른이란 다 그런 걸까. 아니면 아버지가 특별히 주책맞은 걸까.
“아이, 사장님도 참, 그런 거 아니에요.”
한유진 씨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자, 아버지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우리 아들이 대학원 간 이후로 연애도 못하고 친구도 못 만나서, 요즘은 친구들도 생기고 예쁜 아가씨도 같이 다니니까, 아버지된 입장에서 기분이 좋아서……. 혹시나 했지. 하하하! 아이고, 미안해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열애설(?)을 부인하는 한유진 씨의 모습에, 아버지는 민망한 듯 웃음을 터뜨리며 사과의 말을 건넸고,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한유진 씨는 생긋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무례한 말을 한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이다.
음……. 그래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는 주책이었구나.
하긴, 대학원 간 이후로 인간관계가 거의 다 끊어진 건 사실이니까.
부모님 입장에서는 한창인 나이에 그러고 다니는 게 마음이 아프셨나 보다.
“수하……. 대체 그 대학원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기에……”
아버지의 말을 들은 고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으음,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굳이 불행한 과거를 곱씹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지금이 중요한 거지, 지금이.
“됐어, 그런 우울한 얘기하지 말고. 가서 과일이나 먹자.”
“그래, 엄마가 과일 깎아줄게, 얼른 가자.”
이후 우리는 초월자의 화원에서 자란 수박과 딸기, 참외를 들고 테이블로 돌아갔다.
“후후후……. 사모님. 일단 제가 직접 재배한 과일을 한번 드시고 나면, 다시는 평범한 과일은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칼을 빼들고 수박을 자르려 하자, 과일 장수가 된 토생원이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쩌적-
어머니의 칼이 잘 익은 수박을 가르는 순간, 자리에 있던 모두는 놀란 듯 두 눈을 치켜떴다가 뭔가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토생원을 바라봤다.
“뭐야, 이거 수박 맞아?”
“뭐, 뭔가 이상하군요.”
“어머?”
“우웅?”
토, 토 사장님……. 대체 수박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