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0 천사의 역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건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한국을 사분하고 있던 사대 길드 중 세 개가 모여 만든 초거대 연맹 ‘웅왕’이 머지않아 당면할, 가장 현실적이고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아직 꿀 주먹 선물 세트의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덩치 큰 아저씨는, 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스스로 날아든 가련한 천사였고.
천사치고는 비주얼이 좀 흉악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내 눈에는 그렇다는 거다.
“앞으로는 저한테 직접 연락하시면 돼요. 아, 이강혁 씨나 한유진 씨에게 연락하셔도 되고요. 대신, 당일에 연락하고 그러지는 마시고, 그래도 하루 이틀 전에는 연락 주세요. 저희도 스케줄이라는 게 있으니까.”
솔직히, 이런 무서운 아저씨에게 나의 소중한 전화번호를 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쪽이 내가 대장(?)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마당에, 매번 다른 사람을 거쳐 연락하라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괜히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니까.
인간 김수하, 그래도 예의범절만큼은 확실히 주입받고 큰 남자라고.
“그, 그 제안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불쑥 핸드폰을 내밀자, 문경준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계약서라도 써드릴까요?”
“아, 아니……. 정말 조건이 그게 다야? 우리 던전을 뺏을 생각은 없다고?”
“네, 우린 몇 포인트를 쌓든, 패왕의 던전을 건드리지 않을게요.”
룰은 간단했다.
매주 선수 명단을 제출하고, 스파링을 한다.
1승마다 1포인트. 1패마다 1포인트 차감.
단, 적립한 포인트로 던전을 구매할 수 있는 것은 패왕뿐.
우리는 그 포인트로 패왕의 던전을 구매할 수 없다.
등급에 따른 던전의 구체적인 가격은, 실무자들 간의 협의로 정하기로 했다.
“그럼 너희 쪽은 뭘 요구할 거지?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대여권이요.”
“대여권?”
“네, 저희가 원할 때, 원하는 던전을 대여할 수 있게 해주세요. 당연히 거기서 나온 수확물은 저희 소유로. 단, 던전 이용에 대한 비용은 지불할게요. 이것도 협의 하에.”
사실 이 거래는, 상당히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애초에 이 계획 자체가 갑자기 품 안에 날아든 천사 덕분에 성립될 수 있었던 거니까.
다만, 패왕은 국내 던전의 3할 가까이를 소유하고 있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한 번씩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권한은 얻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한쪽은 던전의 소유권, 한쪽은 입장권. 이 정도면 충분히 남는 거래 아니에요?”
그래,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심지어 이용료까지 지불하겠다는데.
“하지만 너희가 저 아기 판다를 계속 내놓으면, 결국 던전 입장권만 계속 내주는 것 아닌가?”
음, 이건 뭐 거의 항복 선언이네. 지금 자기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웅이를 못 이긴다는 말이잖아.
어쨌든, 꽤 합리적인 반박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니, 상대가 이런 말을 할 것 정도는 예상했지.
“그럼 이렇게 하죠. 스파링은 일주일에 두 번, 한 번은 패왕에서 선수와 상대를 정하고, 한 번은 우리 쪽에서, 그리고 그쪽은 한 번씩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거로. 이 정도면 최소한 승률이 반반은 넘을 것 같은데요. 아저씨는 한국 최강이라면서요.”
나의 도발에 문경준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 다웅이가 나서면,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겠지.
물론, 굳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우리 쪽에서는 다웅이를 내보내는 일을 최대한 자제할 거다.
“그렇지……. 저 이상한 판다만 아니면…….”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는 문경준의 어깨가, 문득 아주 좁아보였다.
아저씨, 너무 슬퍼하지 마요.
곧 무신도 다른 곰한테 두들겨 맞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다웅이한테만 거부권을 행사하시면 되겠네요.”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주는 듯한 말에, 어느새 바닥에 드러누운 다웅이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문경준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고미랑 똑같네.’
물론, 실제로 내려다봤다는 건 아니고,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느낌이.
심지어 얘는 아예 드러누워 있는데도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다웅이! 잘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너에게 숙성 초코바를 하사하겠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미가 흐뭇하게 웃으며 초코바를 흔들자,
“다, 다웅!?”
다웅이는 그대로 바닥을 굴러 고미에게 다가갔다.
[ 네, 네 이놈! 아무리 그래도 바닥에 누워 선물을 받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느냐! 어, 어찌 이 몸의 분신이 이토록 예의를 모른단 말이냐! ]
“다웅아, 일어나서 받아야지.”
나의 말에 다웅이는 바닥에 누워있는 편안함과 숙성 초코바의 가치를 비교해 보는 듯,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다웅.”
[ 다음부터 선물을 받을 때는 반드시 예의를 지키거라! 위대한 곰에 걸맞은 예의와 위엄을 갖추어야 할 것 아니냐! ]
흠, 확실히 원조 아기곰은 예의가 바르긴 하지.
위엄은……. 아마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기준이 다른가 보다.
‘음, 그럴 수 있지.’
고미의 보물 중 하나인 숙성 초코바를 건네받은 다웅이는 곧바로 두 손을 모으더니 오른 주먹에 왼손을 가져다 댔다.
‘포권!?’
아버지, 대체 뭘 얼마나 보여줬길래 애가 며칠 사이에 이렇게 됐습니까…….
[ 우, 우웃! 그, 그것은……. ]
너도 그런 거에 일일이 반응해 주지 마. 멋지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게다가 곰기니 뭐니 무협지에 나오는 기술들을 잔뜩 쓸 수 있으면서, 왜 포권을 모르는 건데.
한편, 두 아기곰이 초코바를 주고받는 모습을 바라보던 문경준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나라도 나한테 걸린 현상금(?)이 고작 초코바 하나라는 걸 깨달으면 조금 비참할 것 같기는 하다.
물론 산신령님의 항아리에 들어갔다 나온 특제 초코바이기는 하지만…….
‘그걸 말해준다고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
다웅이를 바라보는 문경준의 얼굴은, 사우나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럼……. 나는 이제 가봐도 되나?”
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다시 덤벼볼 엄두는 나지 않았는지, 함부로 달려들거나 성깔을 부리지는 못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 * *
문경준이 자리를 떠나고, 가게로 돌아가는 길, 봉식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무슨 생각으로 그랬어? 완전 손해보는 장사잖아.”
반면, 이강혁 씨는 나의 결정에 대해 딱히 이렇다 할 불만도, 의문도 표하지 않았다.
“왜 손해야. 어차피 리벤지 매치할 거 아니었어? 네가 이기면 해결될 문제야. 강해지고 싶다며, 복수도 하고 싶고. 난 지금 내 소중한 친구의 꿈을 응원해 주는 중이라고.”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연맹주, 아니, 조정위원 맡고 처음 한다는 짓이 이런 거면…….”
“설마 또 질까 봐 쫄았냐?”
“이 자식이! 야, 내가 그날 굶고 가서 그래. 싸움 끝나고 밥 먹는 거 못 봤냐?”
그래, 며칠 굶은 놈처럼 먹기는 하더라. 아니지, 며칠 굶은 거지도 그렇게는 안 먹을 거다. 혹시 각성하면서 위장도 짐승 수준이 된 걸까?
뭐, 진실이 뭐가 됐든, 그것 때문에 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걱정하지 마, 아무도 불만 없을 거야. 어쨌든 던전이 넘어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때, 봉식이와 내가 평소처럼 티격태격하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강혁 씨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선수 명단에 저도 넣어 주시죠. 그렇지 않아도 문경준과는 한 번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으니까요.”
“아니, 형, 지금 이 자식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러시겠지. 내 예상이 맞다면, 그 생각은 꽤 정확하고.”
역시, 이강혁 씨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구나.
조직이 거대해지고, 경쟁자가 전혀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부터는 내분이 시작될 테니까.
‘에휴, 하여간 대학원에서 못된 것만 배워 나온 것 같다니까.’
대학원을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전문직.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막상 그 내부에 들어가 보면, 지옥이 따로 없다.
우선, 바닥이 좁아도 너무 좁다.
덕분에 한두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고, 그러다 보니 공부 열심히 하고 제 할 일 열심히 하는 것 이상으로 인맥 관리하고 정치질하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며, 파벌 싸움은 영원하다는 사실이었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그때부터는 조직 내에서 줄서기와 경쟁이 시작된다.
게다가 이 내분이라는 건, 대체로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 훨씬 저열하고, 치열하고,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럴 바에는 외부에 적을 남겨두는 편이 좋아.’
숲속 친구들은 믿는다.
하지만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두 분란 없이 하하 호호 마냥 사이좋게 지낼 거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애초에 조직에서 살아남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마음 자체가 무조건 잘못된 거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 같고.
‘문경준 정도면 실력은 두말할 것 없고, 여차하면 목숨을 건 무력시위까지 가능한 수준의 상남자(?)니까, 조직에 긴장감을 주기에는 충분한 적이지.’
뭐, 그 외에도 이 천사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할 것 같고.
“아니, 그러니까, 그 생각이라는 게 뭐냐고. 이렇게 손해를 보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는 일이야?”
하지만 내 속을 모르는 봉식이는 끊임없이 볼멘소리를 해댔다.
물론, 나쁜 마음에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손해를 보는 게 싫은 것도 아닐 거고.
그저 이번 일로 내가 욕을 먹을까 봐 걱정하는 거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머리가 나빠서라기보다 늘 혼자 다녀서 이런 정치질에 관여한 경험이 적어서고.
“응, 있어.”
“설명이라도 해줘.”
하지만 굳이 이 문제를 이해시킬 생각은 없었다.
“싫어. 비밀이다.”
왜 그러냐고?
그냥, 놀리면 재밌잖아.
원래 x알 친구라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약 올릴 기회, 놀릴 기회가 생겼는데 그걸 놓치면 어디 그게 x알 친구인가.
[ 수, 수하! 이 몸도 궁금하다! 대체 왜 그렇게 한 것이냐? ]
음……. 고미도 호기심이 많다는 걸 간과했군.
사실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고미와 관련된 이유도 있으니까, 그것 정도는 살짝 알려줘도 되겠지.
“너도 이제 특별 교관으로 일해야 하잖아. 이렇게 하면 네 위엄도 살리고, 앞으로 너한테 배울 사람들도 선별하기 좋을 거야.”
[ 오오, 그렇구나! 웅왕의 비실이들에게 위대한 웅왕의 실력을 보여주라는 것이냐? ]
“기회가 되면?”
그래, 이 귀여운 솜뭉치가 특별 교관이 될 자격이 차고도 넘치는 슈퍼 먼치킨이라는 걸 납득 시키려면, 꽤 강렬한 임팩트가 필요할 테니까.
“야! 김수하! 이러면 어머니한테 이른다? 네가 막 이상한 아저씨랑 사람들이랑 싸움 붙이고 다닌다고!?”
고미에게는 흔쾌히 답을 알려주면서 자신에게는 대답을 해주지 않자, 봉식이는 참으로 비겁하지만, 실로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봉식아, 좀 치사하다.”
[ 우, 우웃! 그, 그렇다! 봉식이, 네가 이렇게 비겁한 녀석일 줄은 몰랐구나! 어, 어, 엄마한테 고자질을 하려 들다니! ]
“다웅!”
심지어 다웅이마저 비난할 정도로, 치졸하기 짝이 없는 전략.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날 이길 수 없지.
“그럼 알려달라고!”
“싫어, 그리고 네가 그 얘기 하면 난 오늘 낮에 있었던 일 다 얘기할 거다.”
“이, 야!”
그렇게 투닥거리며 가게로 걸어가는 사이,
“다, 다웅!!!”
돌연 다웅이의 입에서 여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엄청난 ‘포효’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보자, 어느새 봉식이의 품에서 뛰어내린 다웅이의 눈에서 광기 어린 빛이 흘러나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 다, 다웅이! ]
“다웅아,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