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8 애들 앞에서는 물도 함부로 마시면 안된다.
“다, 다웅아!”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가는 다웅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봉식이의 몸에서 눈부신 금빛과 함께 흐릿한 환영 같은 것이 솟아났다.
‘응? 뭐지?’
그러나 그 환영은 빠르게 사라졌고, 분노한 봉식이는 곧장 주먹을 움켜쥔 채 문경준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 봉식이, 기다리거라. ]
그때, 고미가 차분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녀석을 멈춰 세웠다.
“하지만 다웅이가!”
[ 괜찮다. 다웅이는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느니라. ]
고개를 돌려보자, 이를 악문 채 모욕감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문경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표정만 봐서는 다웅이가 아니라, 자기가 맞아서 날아간 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
‘이상하네, 또 그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타이밍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웅이에게 시선을 옮기는 순간, 문경준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자, 자고 있어!’
그렇다, 다웅이는 문경준의 발차기에 얻어맞고 쓰러진 게 아니라······.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 채 코까지 골아가며 꿀잠을 자고 있었다.
“이, 이 곰돌이 새끼가!”
피할 필요도, 막을 필요도 없다. 너무 시시해서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
지금 다웅이는, 문자 그대로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문경준 역시 다웅이의 바디 랭귀지를 이해했기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난 거겠지.
‘괴, 굉장하다. 저런 방식으로 사람을 열 받게 할 수도 있구나.’
우드드득······.
그 순간, 문경준의 몸이 칙칙한 회색으로 물들며 그의 발아래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 우, 우웃! 수하! 저 녀석이 변신을 하고 있다! ]
그 모습을 본 고미는 흥분으로 눈을 빛내며 나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음······. 너도 곰기청정기로 변신할 수 있잖아.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니면 그냥 변신이라는 단어가 좋은 건가.
어찌 됐든, 저 변신이 단순히 색깔만 변하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지금 문경준의 몸에서는 흑암, 토생원, 케르베로스, 히드라 같은 강적들을 만났을 때처럼, 무언가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한편, 다웅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는 듯 여전히 대(大)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다, 다웅아. 설마 그냥 기절한 건 아니지?’
다웅이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자세였다.
“점박이!”
분노한 문경준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다웅이의 꼬리가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티비를 켜놓은 채 잠들었다가 잠깐 깬 아저씨처럼 살짝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더니,
“하······. 웅.”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손가락도 아닌 ‘발가락’을 까딱거렸다.
······.
다웅아, 너 정말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도발 능력만 놓고 치자면, 이 녀석이 원조 아기곰보다도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곰 새끼가!”
아니나 다를까, 그 모습을 본 문경준은 눈이 뒤집혀 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고,
- 쾅!
통나무 같은 다리가 바닥을 내리찍으며 포탄이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다웅······.”
하지만 다웅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옆으로 뒹굴뒹굴 굴러 그 공격을 피해버렸다.
- 쾅! 쾅!
계속되는 도발에 분노한 문경준은 길길이 날뛰며 다웅이를 쫓아다녔지만, 그의 공격은 단 한 번도 바닥을 굴러다니는 솜뭉치를 맞추지 못했다.
그렇게 바닥과 하나가 된 아기 판다가 문경준을 농락하고 있을 때, 고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봉식이, 저 싸움을 보고 느끼는 바가 없느냐? ]
“으음······.”
1타 강사의 질문을 받은 봉식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 저 멧돼지는 너와 비슷하다. 당연히 저 녀석의 약점을 간파할 수 있다면, 너의 약점을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허수아비, 수하, 너희도 저 녀석의 약점을 찾아보거라. ]
하지만 봉식이는 여전히 문경준의 약점을 찾아내지 못했고, 이강혁 씨와 나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대체 저 괴물의 약점이 뭐라는 거야. 부딪히기만 해도 날아 가겠고만.’
고미나 다웅이 눈에는 어떨지 몰라도, 내가 보기에 ‘저건’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 본 가장 강력한 몬스터인 삼돌이와 비교해 보아도, 문경준이 압도적으로 강했으니까.
[ 쯧, 다웅이. 그만하면 됐다. 이제 이 녀석들에게 가르침을 주거라. 이 임무를 잘 해내면, 너에게도 숙성 초코바를 하사하겠노라. ]
결국 우리 셋 중 누구도 문경준의 약점을 찾아내지 못하자, 고미는 가볍게 혀를 차며 다웅이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웅!?”
초코바라는 한마디에, 바닥을 뒹굴던 아기 판다의 눈이 광기로 물들었다.
‘음, 고미도 점점 다웅이를 다루는 게 익숙해지는구나.’
초코바와 꿀로 대동단결이라니, 과연 곰돌이 삼 형제다운 방식이군.
‘그런데······. 가르침을 주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건가?’
잠시 그런 의문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이 녀석이 고미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해주는 장면이 펼쳐졌다.
“다웅.”
초코바에 매수당한 다웅이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손으로 뒷짐을 진 채 반대쪽 손을 앞으로 내밀어 솜방망이를 까딱이며 문경준을 도발했다.
“응?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 동작에, 봉식이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 우, 우웃! 다웅이 저 녀석이 언제 저런 멋스러운 동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냐!? ]
원조 아기곰은 부러움과 놀라움, 약간의 분함이 섞인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음, 내 눈에는 상당히 허세가 가득한 동작으로 보이는데, 고미와 다웅이의 눈에는 저 동작이 아주 멋있는 거라고 느껴지나 보다.
‘그런데,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렇게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 동작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이연걸이네요.”
이강혁 씨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렇네, 이연걸이다.”
[ 우웅? 이연걸? 그것이 무엇이냐? ]
“유명한 영화배우야. 한때는 액션하면 이연걸이 자동으로 떠오를만큼 대단한 스타였지.”
[ 호오······. 그 이연걸이라는 자도 제법 멋을 아는 모양이구나. ]
봉식이가 고미에게 이연걸에 대해 설명해주는 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중화 TV를 틀어놓고 무협 영화를 감상하시던 김태평 사장님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
설마 가게에서 아버지랑 같이 본 영화에 나온 걸 보고 따라 하고 있는 거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연스럽게 그의 대표작 몇 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도 어릴 때는 아버지 따라 이연걸 영화를 즐겨봤으니까.
‘잠깐, 설마······.’
청심환과 젤리 원자로, 고미 빔.
고미는 자신의 롤모델(?)인 슈퍼 히어로, ‘스틸 맨’을 보고 신기술을 창조해냈다.
그럼 다웅이도, 이연걸을 보고 뭔가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낸 건 아닐까?
“너, 이 곰돌이 새끼!”
해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흥분한 문경준이 주먹을 내지르자, 다웅이는 부드럽게 팔을 휘둘러 자신의 머리보다 큰 상대의 주먹을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다웅!”
그리고는, 짤막한 솜방망이를 교차시켜 원을 그리며 문경준의 가슴을 강타했고,
“컥!”
다웅이의 일격에 가슴을 얻어맞은 문경준의 몸이 저만치 뒤로 밀려났다.
[ 우, 우웃! 저, 저 녀석이 언제부터 저런 멋진 동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냐! ]
그 모습을 본 아기곰은 더욱 흥분해서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태극권이네요.”
“태극권이네.”
한편, 그 동작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알아차린 두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 그런데, 굳이 저런 동작을 할 필요가 있는 걸까?
고미가 봉식이에게 했던 거랑 원리는 비슷한 것 같은데, 괜히 멋을 부린다고 동작만 커진 것 같은······.
“아!”
봉식이를 각성시킬 때 고미가 보여줬던 유권(柔拳)을 떠올리는 순간, 녀석이 말했던 ‘봉식이’와 ‘문경준’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이 왔다.
[ 호오, 수하, 너는 내가 말한 봉식이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
“응, 알 것 같아!”
[ 역시 나의 제자답구나. 훌륭하다. ]
문경준과 봉식이는, 상당히 비슷한 구석이 많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고 분노 조절을 하게 만드는 덩치나 외모는 차치하고, 체격도 비슷하고, 성미가 급하다는 면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파이팅 스타일도 상당히 비슷하고.
물론, 우리 봉식이는 저 아저씨처럼 막돼먹지는 않았지만, 욱하는 기질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뭔데? 뭔데?”
내가 문경준의 약점에 대해 뭔가를 눈치챈 듯하자, 봉식이는 곧장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1타 강사, 아기곰 선생의 말에 따르면 문경준의 약점은 곧 자신의 약점이었으니까.
“너무 세. 그게 문제야.”
나의 대답에, 봉식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리야. 센 게 뭐가 문제야?”
확실히 이 녀석은 파이터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다.
신이 내린 피지컬, 뛰어난 운동신경, 두둑한 배짱과 투지까지······. 헌터가 아니라 격투기 선수를 했어도 대성할 놈이지.
덕분에 학교 다닐 때부터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고, 운동깨나 했다는 놈들도 체급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이 녀석에게 한 방만 맞아도 곧바로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곤 했었다.
반대로 상대방 입장에서는 혼신의 일격이라고 해도, 타고난 거구로 인해 거의 타격을 입지 않는 게 ‘살육 전차’ 민봉식이었다.
아마 문경준도 비슷한 삶을 살았겠지. 그러니 파이팅 스타일도 비슷한 게 당연하다.
“너, 피하거나 막는 거 거의 연습 안 하잖아.”
내가 알기로, 이런 습관은 헌터가 된 이후로 생긴 거다.
맞으면 능력치가 상승하고, 잠깐만 휴식을 취해도 빠른 속도로 체력을 회복하는 스킬이 붙어버렸으니까.
어쨌든, 타고난 강골에 스킬이 보태지면서 이 녀석은 줄곧 기술보다 압도적인 힘. 방어를 도외시한 치고 받기로 상대방을 굴복시켜왔다.
“당연하지, 왜 피해. 맞으면 강해지는데.”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웅왕의 특별 교관, 아기곰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 저 녀석처럼 너보다 더 튼튼한 녀석을 만나면 질 수밖에 없다. 봉식이, 네가 추구하는 강함은 너보다 약한 녀석들을 상대로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이더냐? ]
“당연히 아니지.”
[ 그렇다면 지금 같은 방식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게다가 지금 너는 네가 가진 힘도 제대로 쓰고 있지 못하다. ]
설명을 마친 아기곰 교관님은 천천히 손을 들어 액션 스타가 빙의한 쿵푸 판다를 가리켰다.
문경준은 온 힘을 다해 연타를 퍼부어댔지만, 다웅이는 미꾸라지처럼 그 공격을 흘리고 피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가 균형을 잃는 순간,
-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톰한 젤리가 문경준의 가슴을 가볍게 내리쳤다.
“쿨럭!”
문경준의 입에서는 어느새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 전력으로 공격을 날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순간, 전신의 힘을 폭발시켜 상대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는 것이지. ]
봉식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고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 알아들었으면 되었다. 내일부터는 오늘 배운 것을 되새기며 수련을 해보거라. 너의 재능이라면 금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말을 마친 고미는 흡족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초코바 하나를 꺼내 그것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만 싸움을 끝내라는 신호.
“다웅.”
고미의 솜방망이에 붙잡힌 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초코바를 본 다웅이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토실토실한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몸놀림으로 비틀거리는 문경준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 우두두두두두두!
어디선가 본듯한 모션으로 폭풍 같은 연타를 퍼부었다.
- 털썩······.
쿵푸 판다의 연타를 모조리 얻어맞은 문경준은 그대로 동공이 풀려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저건 나도 뭔지 안다. 남자들은 대부분 알 거다.
“견자단이네요.”
“엽문이네.”
역시나, 봉식이와 이강혁 씨는 곧바로 그 권법(?)의 출처를 알아차렸다.
‘하······. 애들 앞에서는 물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더니······.’
앞으로 곰돌이 삼 형제한테 뭘 보여줄 때는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겠다.
잘못해서 이상한 걸 보고 멋지다고 느껴버리면 무슨 대재앙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렇게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 흥, 이제 됐다. 돌아가자꾸나. ]
고미가 싱겁다는 듯 솜방망이를 휘저으며 몸을 돌렸다.
“잠깐, 고미.”
하지만, 나는 이대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 아저씨한테 물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