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7 혹시...천사세요?
‘특제 꿀’이라는 마법의 단어에,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바닥에 깐 채 누워있던 아기 판다의 두 눈에 불꽃이 일었다.
그런데······. 어째서 판다가 꿀을 좋아하는 거냐. 판다는 대나무 밖에 안 먹는 거 아니었어? 무기는 대나무를 쓰면서, 어째서 식성은 고미랑 똑같은 건데.
“다웅!”
눈빛 날카로운 거 보소. 너 아주 호랑이도 씹어먹겠다 야.
성실하고 믿음직한 성품의 아웅이를 놔두고, 굳이 다웅이에게 맡길 일이라면, 대충 뭔지 짐작은 간다.
문제는, 상대가 누구냐는 거지.
[ 고미, 뭔데 그래? ]
[ 그 멧돼지 녀석이 깨어났다. 초코바가 부러질까 봐 너무 살살친 모양이구나. ]
······.
쓰러진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일어나기는 진작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설마 다른 사람들이 와서 깨워도 못 일어날 정도로 세게 때린 거냐.
[ 설마, 우리가 있는 곳을 문경준이 알고 있다는 거야? ]
[ 그런 것 같다. 그 멧돼지 녀석의 기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구나. ]
이 아저씨가······. 위치 추적 장치가 달린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잘 찾아오는 거야.
뭐, 찾아온다고 고미에 다웅이까지 있는 판에 뭘 어쩌겠냐만······.
‘그래도 가게 근처에서는 싸우면 안 되는데.’
[ 걱정하지 말거라. 그 멧돼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곳의 문턱조차 밟을 수 없느니라. ]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눈치챈 고미가 진지한 눈빛으로 다웅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 다웅이, 네가 이 가게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이 몸에게 증명해 보거라. 어떤 상황에서도 엄마와 아빠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다오. ]
엄마 아빠를 지키라는 말에, 다웅이의 검은 솜방망이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다웅.”
모처럼 의욕이 넘치는 모습.
흑암 때도 그렇고, 겉보기와는 다르게 은근히 파이터 스타일이란 말이지.
음, 그나저나, 본인들은 상당히 진지한데, 이 둘이 이러니까 왠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것이······.
‘뭐, 괜찮겠지.’
솔직히 말해서, 걱정도 안 된다.
사도가 된 문경준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상대가 다웅이라면 그저 명복을 빌 뿐이다.
[ 그냥 이겨서는 안 된다. 그 멧돼지 놈에게 위대한 곰과자신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어라. 엄마 아빠의 가게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도록 말이다. 할 수 있겠느냐? ]
고미의 질문에, 다웅이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더니, 막상 가게나 엄마 아빠에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잘 뭉치는구나.
‘그래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사이가 좋은 모양이네.’
하긴, 정말 다웅이가 싫었다면 위대한 자신의 걸작에 넣어주지도 않았겠지.
“아, 아웅!”
그때, 아웅이가 고미에게 받은 특제 숙성 초코바를 왼손에 쥔 채 오른손 엄지를 추켜세웠다.
번역하자면 ‘이거 진짜 맛있어. 너도 먹어 봐.’ 정도 될까?
맛있는 거 먹으려면 열심히 하라는 응원이겠지.
‘그래도 한 입 정도는 줄 법도 한데, 나눠주지는 않는구나.’
정말이지, 아웅이도, 다웅이도, 고미의 분신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 장면이다.
가족, 먹을 거, 노는 거.
성격과 외모는 달라도, 이 세 개를 좋아한다는 건 셋이 똑같으니까.
어쨌든, 그럼 슬슬 악당(?)이나 퇴치하러 나가볼까.
나가는 김에 대체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는 건지, 정확한 목적이 뭔지도 확인해 보고.
[ 이강혁 씨. ]
생각을 마친 나는 웅톡방을 활용해 친구들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알리고, 멧돼지 퇴치 조와 공포의 군주의 시선을 끌 미끼 조를 정했다.
공포의 군주 앞에서 ‘아, 아까 낮에 봉식이를 두들겨 팬 아저씨가 있는데, 고미가 그 아저씨를 기절시켰거든. 근데 지금 정신이 돌아와서 여기로 오고 있데. 나가서 때려주고 올게.’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흠흠, 수하 씨, 길드에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연맹과 관련된 일이니 함께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봉식이 너도 같이 가야할 것 같은데.”
이강혁 씨가 자연스럽게 운을 떼고,
“아, 네. 그렇게 하죠. 엄마, 나 잠깐 저스티스 건물 좀 갔다올게.”
내가 그것을 이어받았다.
저스티스 건물은 가게에서 꽤 가까워 긴급 상황이면 3분, 느긋하게 가도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에 있었으니까, 잠깐 갔다 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음, 그래? 그럼 과일 깎아놓을게, 다녀와.”
다행히, 공포의 군주는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나와 봉식이, 이강혁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연스럽게 고미가 나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여기까지도 무사 통과.
고미와 나는 세트 메뉴 같은 거니까.
하지만 봉식이가 다웅이를 안아드는 순간······.
“아들, 진짜 회사 가는 거 맞아?”
공포의 군주의 예리한 촉이 발동했다.
행동 반경이 지극히 좁은 다웅이를 굳이 데리고 나가려 하니, 본능적으로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아우, 어머니, 내가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다웅이 업고 다녀오면서 소화 좀 시키려고.”
봉식이가 다웅이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고 두어번 흔들며 그렇게 말하자,
“음······.”
공포의 군주는 무언가 미심쩍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머니가 각성을 한 건 아닐까 하는 가설은 폐기. 확실히 독심술이 가능한 것 같지는 않군.
“알겠어, 다녀와.”
“어머님, 그럼 그 사이에 저희는 가게 뒤쪽에 이것을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수하님과 고미님이 돌아오시면 함께 과일을 먹지요.”
마무리로 미끼 조의 멤버인 토생원이 손에 들린 보석을 흔들며 어머니의 시선을 끌었고, 우리는 무사히 공포의 군주의 결계를 벗어날 수 있었다.
* * *
[ 봉식이, 허수아비, 너희들은 다웅이의 싸움을 보고 깨달음을 얻거라. 너희 같은 비실이들에게는 저 녀석의 움직임이 더 참고가 될 터이니 말이다. ]
GomPS로 변한 아기곰은 문경준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렸다.
고미와 우리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수준의 벽이 있다. 너무나 격차가 큰 나머지, 이강혁 씨마저 간신히 그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
즉, 자신의 싸움은 봐도 이해를 못하니,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다웅이를 참고하는 편이 낫다는 게 고미의 말이었다.
‘수준별 교육이라니······. 확실히 가르치는데 재주가 있단 말이야.’
[ 흠, 저기 오는구나. ]
그때, 고미가 손가락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이 새끼들, 이제 아예 대놓고 같이 다니는구나?”
이강혁 씨와 나, 봉식이가 같이 있는 것을 본 문경준은 또다시 눈을 부라리며 성을 냈다.
“이 아저씨, 말 참 이상하게 하네. 누가 들으면 우리가 불륜 커플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봉식이의 한마디에 문경준의 입가에는 곧장 조롱 섞인 미소가 걸렸다.
“하, 약해 빠진 놈이, 아까 덜 맞았나 보구나? 아니면, 이강혁이 저 얍삽한 칼잡이 새끼가 복수라도 해줄 것 같냐? 저 새끼는 나한테 안돼.”
“아저씨, 사도 좀 됐다고 어지간히 뻐기는 것 같은데, 기다려. 조만간 내가 직접 두들겨 패줄 테니까. 아저씨랑 다르게 내 힘으로 강해져서 말이야.”
음, 이 둘은 정말 궁합이 안 좋구나.
“됐고. 날 기절시킨 새끼가 누구냐?”
더이상 봉식이와 입씨름을 하기는 싫었는지, 문경준은 곧바로 주먹을 움켜쥐며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아무리 봐도 머리에 곰돌이 얹고 다니는 이 비리비리한 애새끼는 아닌 것 같고, 칼잡이 새끼도 아니고. 누구야?”
잠깐······. 고미를 몰라?
무신이 고미를 찾으라고 보낸 게 아니었나?
[ 이, 이 건방진 놈이! ]
문경준의 언사에 발끈한 고미는 곧바로 솜방망이를 움켜쥐며 직접 응징에 나서려 했으나, 그래서야 굳이 여기까지 나온 의미가 없지.
[ 진정해, 고미. ]
고미를 진정시킨 나는 문경준을 바라보며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건 곧 아시게 될 거예요. 그런데, 왜 자꾸 저희를 찾아오시는 거죠?”
“하, 니들이 손잡고 우리 식구들 다 말려 죽이려고 하는데, 그럼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랴?”
“그래서 찾아오신 거라고요?”
“그래.”
말을 하는 내내 나는 감각 강화를 활성화해 문경준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폈다.
놀랍게도, 지금 문경준이 정말로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평화 협정을 제안하거나 거래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몰래 힘을 모아 기습을 감행하는 것도 아니고, 음모를 꾸미는 것도 아니고······.
혼자 나타나서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이거 완전······.
‘천사잖아?’
지금까지 만난 적들은 대체로 흑암처럼 몸을 숨기거나, 만수왕처럼 군대를 준비하거나, 그 ‘세 번째’처럼 무언가 음모를 꾸미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혼자서’, ‘정면으로’,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러 온다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도 사이다 전개라는 걸 해볼 수 있는 거냐?
그래, 지금까지 너무 피곤한 놈들이 많았잖아.
한 번쯤은 이런 적도 나타나 줘야지.
“빨리 불어, 아까 나 기습한 새끼가 너냐?”
문경준의 질문에, 내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욕을 먹는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좋냐.
역시 적은 단순한 사람이 최고다.
난 스릴러나 수사물보다는 액션이 좋다고.
어차피 문경준의 실력으로 고미나 다웅이에게 덤벼봐야 꿀주먹 체험단이 한 명 추가되는 결말이 나올 게 뻔하니까, 걱정도 없고.
“아뇨.”
“그럼 누군데!”
“그보다, 아저씨 어떻게 사도가 된 거예요?”
“이 새끼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아저씨가 이기면 알려 드릴게요. 대신 아저씨가 지면 아저씨도 제 질문에 답해 주세요.”
나의 요구에 문경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아뇨, 저는 아니고요.”
“이 애새끼가, 나랑 장난하나! 그럼 누구? 이강혁이?”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자, 봉식이에게 안겨있던 판다가 느릿느릿 녀석의 몸을 타고 내려와 문경준의 앞을 막아섰다.
“뭐야, 이 판다는?”
“다웅!”
다웅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문경준은 눈이 동그래져 나와 다웅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뭔웅?”
“다웅!”
“하아······. 뭐야, 너 테이머냐? 지금 이 곰돌이가 쪼끔 귀엽게 생겼다고 내가 못 때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귀엽다고 생각은 하시는구나······. 하긴, 다웅이가 귀엽긴 하지.
게다가 곧바로 발길질을 해대지는 않는 걸 보니 의외로 사이코패스는 아닌가 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웅’하고 우는 곰돌이의 모습에 그것이 진짜 판다가 아니라 펫이라고 생각한 문경준은 귀찮다는 듯 발로 다웅이를 밀어내려 했다.
“장난하지 말고······. 응?”
“다웅.”
문경준과 다웅이의 체격은 유치원생과 고릴라만큼이나 차이가 났지만, 다웅이의 몸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 이것 봐라? 생긴 것 하고는 다르게 힘이 좀 있구나.”
문경준은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내뱉으며 다리에 힘을 줘보았지만,
“하······. 웅.”
그의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작은 아기 판다는 나른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려 하품을 해댔다.
‘괴, 굉장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발이 수준급이다.
작은 키와 토실토실 귀여운 외모와, 어딘지 모르게 얄미운 표정이 한데 어우러져서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설마 첫 등장 때부터 조금 얄미운 구석이 있던 캐릭터가 이런 방식으로 쓰일 줄이야······.
[ 오오! 다웅이! 훌륭하다! ]
이미 다웅이에게 몇 번 도발(?)을 당한 적이 있는 원조 아기곰은 지금 문경준의 기분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는 듯 신이 나서 솜방망이를 휘둘렀다.
“하······. 웅······.”
응원에 힘입어(?) 솜방망이로 문경준의 통나무 같은 다리를 막고 있던 다웅이는 아예 눈을 감은 채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표정으로 한 번 더 앙코르 하품을 날려주었다.
“이, 이 곰새끼가!”
다웅이의 범상치 않은 힘을 느낀 문경준의 눈에는 곧바로 살기가 돌았고,
콰드득!
왼발 아래에 깔린 지면에 균열이 생겨나며 그의 오른발이 다웅이의 안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다음 순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숲속 친구들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응!?”
[ 우웅!? ]
“다, 다웅아!”
문경준의 발차기에 얻어맞은 아기 판다는······.
바람에 날린 낙엽처럼 그대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