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76화 (176/300)

EP.176 웅왕

“허허허, 수하님이 도와주신다면, 저도 한시름 놓고 제자를 키워볼 수 있을 것 같군요. 정말로 이 늙은 산신령을 도와주시겠습니까? ”

낚였구나, 낚였어…….

여기 진짜 사람을 낚는 어부가 있었구나.

어쩐지, 산신령님치고는 조금 억지를 쓴다 싶었다.

이강혁 씨의 지적대로,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다르님이 아니었는데…….

‘으으, 분하다. 분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설마 수다르님이 나를 속일 줄이야!

“오오, 수하! 어서 그러겠다고 하거라!”

신이 난 고미는 도톰한 젤리를 팡팡 두드리며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숲속 친구들 역시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 논리적 허점에 더 주목했을 거다. 하지만 산신령님의 인품 때문에 그 논리적 허점마저 그저 과도한 책임감 탓이라고 생각한 게 패인(?)이라면 패인이었다.

“허허, 어찌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수하님, 제가 왜 그런 긴 이야기를 했는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산신령님은 인자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산을 지키는 신령입니다. 하지만 제 산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완벽히 알지는 못하지요. 비단 저뿐 아니라, 관리자라는 존재 역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한 마디에, 나는 산신령님이 단순히 나를 속이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일의 결과는 누구도 알지 못하고, 누구도 책임질 수 없지요. 허나 수하님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한 책임감과 걱정으로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외면하려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수다르님이 늘어놓은 말들은, 내가 연맹주를 맡을 수 없다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늘어놓은 변명과 결이 같았다.

“게다가 수하님의 주위에는 수하님을 도와줄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을 믿고, 수하님은 그저 수하님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설마 고미님과 저, 토생원, 유진님과 강혁님, 그리고 용족의 전사들로도 부족하단 말씀이십니까?”

…….

제대로 말렸다.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왜 산신령님이 상담에서 쓰는 기법을 이렇게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거냐…….’

산신령님이 나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사용한 방식은, 상담에서 흔히 쓰는 기법 중 하나인 ‘직면하기’와 유사했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내담자가 스스로 직면하고, 그 모순이나 문제점을 깨닫게 하는 방식.

뭐, 직면을 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테크닉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이렇게 훌륭하게 상담기법을 활용하다니…….

설마 정신의학도 공부하시는 건가?

“흠흠, 역시 산신령님은 같은 말을 해도 저하고는 차원이 다르네요. 설득력이 있어, 설득력이.”

그때, 다시 숟가락을 든 봉식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짐승 같은 놈이, 아까 다섯 공기나 먹지 않았나. 아직도 뭐가 들어갈 배가 남은 거냐.

“이놈이요, 부모님 쓰러졌을 때도 제 돈을 안 받으려고 했다니까요. 너 솔직히 말해봐, 지금도 나한테 얼마 갚아야 할지 달아놨지? 그게 책임감인지 염치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난 별로 맘에 안 든다.”

이어서 봉식이는 여행을 갔을 때조차 마음 놓고 놀지 못하고 혼자서 머리를 싸맨 채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하던 내 태도를 지적했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원인은 비슷하지.

과도한 책임감, 사서 걱정하기.

“하, 할게요……. 해보겠습니다.”

하겠다는 말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대신, 맹주니 뭐니 하는 호칭은 너무 부담스럽고, 그냥 조정위원 정도로…….”

“또…….”

내 대답을 들은 봉식이는 도끼 눈을 뜨며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조정위원이라는 호칭을 선택한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산신령님이 이렇게까지 깨달음을 줬는데, 더이상 책임질 수 있네 없네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야, 생각해 봐. 너 같으면 각성한지 몇 달 밖에 안 된 사람이 갑자기 3대 길드 연맹의 연맹주라고 하면, 신용이 가겠냐?”

나 같은 애송이가 맹주니 뭐니 하고 떠들고 다니면,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다.

맹주에 대한 불신이나 불만은 연맹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고. 본래 리더가 아니꼬우면 그 조직 자체가 싫어지는 법이니까.

물론 실제로 해낸 일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등급도 제법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이름을 날릴만한 활약이 없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초월자도 찾아냈고 산신령도 구했고 어쩌고 하면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것도 웃기고.

그런 짓을 한다면 진위 여부를 떠나 연맹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는 어렵겠지.

“그, 그건 그렇네.”

나의 날카로운 반격기에 걸려든 봉식이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훗, 이걸로 1승 적립이다. 수다르님은 몰라도, 너는 나한테 안돼, 인마. 수련을 더 쌓고 오라고.

“그럼 연맹의 이름은 뭐로 할까요?”

내가 조정 위원직을 수락하자, 한유진 씨가 빙긋 웃으며 연맹의 이름을 물었다.

“숲속 친구들?”

봉식이의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이밍 센스라고는 엿 바꿔 먹으려 해도 없는 놈 같으니.

“삼대 길드 연맹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이어서 제르보나 씨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가장 직관적이고 재미없는 이름을 제안했다.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성의가 없어, 성의가.”

그러자 모처럼 공격할 기회를 잡은 이유찬 씨가 입술을 비죽이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 번뜩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웅왕, 어때요?”

사람들과 고미를 연결해준 건 나지만, 결국 이 모든 인연과 사건의 출발점은 고미였다.

숲속 친구들의 대장도, 초월자를 물리친 것도,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할 것도 고미니까, 역시 연맹의 이름은 웅왕이 좋겠지.

“오오오! 수하, 역시 너는 뭔가를 아는구나! 참으로 강력하고 웅대하고, 신의가 넘치는 이름이다! 이름부터 웅혼한 기상이 느껴지지 않느냐! 정의로운 이능력자라면 이름만 들어도 웅왕에 들어오고 싶어할 것이 분명하다!”

음, 이름만 듣고 들어오고 싶을 것 같지는 않은데…….

“웅왕, 굿.”

그때, 잠시 뜸을 들이던 봉식이가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며 회심의 드립을 날렸다.

하아……. 이 자식이.

“아들, 그건 아닌 것 같아.”

심지어 아들 바보인 어머니마저 한숨을 내쉴 망한 드립.

이 자식이 각성을 하면서 드립력을 잃어버렸나.

요즘 왜 이렇게 타율이 낮아.

아니면 문경준한테 얻어터진 데미지가 아직도 남아있는 건가?

여하튼, 정식으로 연맹의 이름까지 정해지자,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아, 그런데 초월자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별로 필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호기심을 참기가 어려워서 던진 질문이었다.

“스승님은 이미 초월자와 다름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초월자가 되실 수 있지요. 그와 동시에, 본인의 권능을 이어받아 그를 섬기는 존재가 있으면 누구나 초월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지요. ”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준 것은, 본래 초월자 출신(?)이던 토생원이었다.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초월자라는 것은 ‘섭리를 벗어난’ 그러니까, 각자의 차원에서 적용되는 규칙을 벗어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초월자의 정의나 개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뭘 할 수 있느냐, 나, 혹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가 훨씬 중요하지.

하지만 개념과 정의를 명확히 하는 건……. 그냥 중요하다. 그냥 중요하다고. 이걸 명확히 안 하고 지나가면 왠지 찝찝하다고.

‘어우, 속 시원해. 이제야 정의가 명확해지는구나.’

어쨌든, 그런 기준이라면 수다르 님은 이미 초월자라고 봐도 손색이 없지.

“음……. 자기를 섬겨주는 사람이 있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신하고 비슷하네요.”

한유진 씨의 말에 토생원은 머쓱한 표정으로 턱을 긁적였다.

“뭐, 인간들의 기준에서 보면 그렇지요. 다신교의 신들하고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신……. 토생원은 신 같은 거였구나. 미안한 말이지만, 정말 안 어울린다.

“그럼 초월자들은 정확히 왜 계약자를 모으는 거죠?”

“뭐, 사실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기 위해 일을 해줄 사람을 모은다고나 할까요. 권력이나 힘을 원하는 초월자는 더 큰 힘이나 권력을 얻으려고, 저 같은 자는 더 많은 지식을 얻으려고 사람을 모으는 것에 불과합니다.”

음, 이건 뭔가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물어본 건데, 그냥 알고 있던 거랑 별로 다르지 않구나.

‘아쉽네, 신앙이 모이면 파워업! 이라든가, 그런 게 가능하다면 참 좋을 텐데. 웹소설에서는 많이들 그러던데 말이야.’

토생원이 초월자라는 말에, 요리를 마치고 테이블로 돌아온 아버지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눈앞에 앉아 있는 새하얀 토끼를 바라봤다.

“이 토끼, 아니, 토끼님이 초월자라고? 진짜로?”

“하하, 네, 그렇습니다.”

토생원의 답을 들은 아버지는 완전히 넋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반면, 적응력만은 초월자급인 어머니께서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토생원에게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지셨다.

“어머, 신기해라. 우리 고미도 그렇고, 요즘 우리 아들들이 신기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네. 그럼 토생원 님은 농사의 신 같은 건가요?”

어, 어머니……. 초월자가 횟집에 식재료를 대준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은 겁니까?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 받다 보니, 어느새 준비된 요리가 모두 바닥나고 말았다.

“그럼 후식이라도 드실래요? 과일이 좀 있는데.”

먹을 것이 떨어진 것을 발견한 어머니가 세상 모든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단골 대사인 ‘더 먹어’를 시전하자, 토생원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어머님, 제가 직접 농사지은 과일을 맛보시지 않겠습니까? 수박과 딸기가 아주 잘 익었습니다.”

…….

이 양반이, 대체 뭘 키우고 있는 거야.

아주 화원 전체를 식량 창고로 바꾸고 있고만.

진짜로 농사의 신으로 전직이라도 하시려고?

“어, 그런데 아까 가져오신 보따리에는 과일이 없던데…….”

상대가 초월자라는 것을 알게 돼서 그런지, 아버지의 표정과 말투는 다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 초월자라는 이름만 들어서는 확실히 굉장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

사실 어머니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초월자’이자 ‘말하는 토끼’인 토생원을 평범한 아들 친구 대하듯 대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하, 사실 제가 어떻게 하면 신선한 야채를 제 시간에 배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개발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을 마친 토생원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주먹만한 보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또 뭘 개발한 거야, 설마 배달 어플이라도 만든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것보다, 초월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농사를 짓는 것도 모자라서, 야채 장수까지 하려는 거야?

“어, 설마 인벤토리라든가, 소환석이라던가…….”

보석을 본 아버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하하,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멋진 것이지요. 그리고 이 안에는 수다르 님과 제가 준비한 개업식 선물과 고미님을 위한 간식이 잔뜩 들어있습니다.”

음? 뭐지? 인벤토리도 소환석도 아닌데, 안에 선물과 간식이 들어있다고?

“오오! 토생원! 설마 이 몸을 위한 꿀이 완성된 것이냐!?”

“그렇습니다, 아마 이 특제 꿀을 맛보시면, 다시는 어떤 꿀도 맛보지 못하게 되실 것 입니다!”

‘제발, 제발 초월자와 대균열의 수호자에 걸맞은 대화를 해줘…….’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솔직히 나도 궁금하네. 대체 뭘 만들어 온 거지?

“자, 그럼…….”

그렇게 방문 판매원이 된 초월자, 토생원이 자신의 발명품(?)을 자랑하려는 찰나, 돌연 고미의 짤막한 꼬리가 빳빳하게 곤두서고, 동글동글한 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뭐지? 이건……. 몬스터나 게이트가 나타났을 때 반응인데?’

[ 고미, 설마 또 게이트가 열린 거야? ]

[ 아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

나의 질문에 고미는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다웅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 다웅이, 너에게 임무를 주겠다. 이 임무를 잘 완수하면 너에게도 이 몸의 특제 꿀을 맛볼 기회를 주마. ]

“다, 다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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