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5 함정카드 발동
“수다르! 위대한 이 몸은 앞으로 친구들의 부하들을 가르치기로 했느니라! 너도 함께하지 않겠느냐? 너와 토생원이 제자들을 거두어 가르친다면 더욱 많은 인간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니라!”
······.
고미, 네가 그렇게 치고 나가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내가 뭐가 되냐······.
하지만 수다르님은 인자하게 웃음을 지을 뿐, 평소처럼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답하지 않았다.
‘역시, 뭔가 이유가 있으신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토생원과의 대결 때 깨달았다. 수다르님은 옳은 일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고미와 관련된 일이라면, 언제든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분이라는 걸.
그런데도 고미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것은, 이 일이 그만큼 큰 결심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의미겠지.
“우웅? 수다르? 어째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냐?”
평소와는 사뭇 다른 반응에, 천진난만한 아기곰은 조금 놀란 듯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산신령님을 바라봤다.
“기다려 봐, 고미. 수다르 님이 도와주실 수 없다고 하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나의 대답에 고미는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틀림없이 수다르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겠지. 고미 역시 순수하게 수다르님도 이 일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는 철학을 가진 녀석이니까.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수다르 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제 의술이 세상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죠’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 데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렇다! 수다르, 너처럼 올바르고 뛰어난 의원이 어찌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스승님은 저처럼 비뚤어진 녀석도 올바른 길로 돌려놓으신 분입니다. 스승님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세상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고미와 토생원의 말에, 숲속 친구들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모두는 수다르님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고, 이 작지만 위대한 산신령의 –물론 본 모습은 꽤 크지만- 인품과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허허허, 여러분이 저를 믿어주시는 것은 감사하나, 정말로 제 의술이 옳게만 쓰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생각도 못 한 질문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웃! 수다르! 그럴 리가 없다! 네가 의술로 사람을 해칠 리가 없지 않느냐!”
······.
고미, 그런 뜻은 아닐 거야.
“허허, 고미님. 제가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수다르님은 입가심용으로 내온 차를 한잔 들이켜며 느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주 오래전, 효심이 지극한 한 아들이 병든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한 달이 넘도록 밤낮없이 산을 헤매고 다니기에, 병을 낫게 해줄 약과 산삼을 내려준 적이 있습니다. 아들의 헌신적인 간호와 저의 영약, 그리고 산삼의 힘으로 어머니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상에서 일어나셨지요.”
이 대목에서 산신령님은 슬픔이 가득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일이 알려지며 그 고을의 수령과 부자들이 그 아들을 닦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그 약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말이지요. 그중에는 금덩어리를 내민 자도 있었고, 불쌍한 모자를 협박한 자도 있었고, 밤늦게 그 집에 숨어들어 산삼을 훔치려는 자도 있었습니다.”
산신령님의 이야기는, 아마도 백 년도 더 전의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인간들이 그때보다 더 선량하고, 더 나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무릇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원하는 법입니다. 때로는 생을 향한 그 집착이 악행을 낳기도 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이를 살리거나, 하루라도 더 자신의 수명을 늘리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법이지요. 제 의술의 뒷면에는, 그런 위험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신령님, 그렇다고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때, 가만히 산신령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저스티스’의 길드장, 이강혁 씨가 입을 열었다.
“그들을 도와줄 수는 있으나, 그들에게 의술을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좋은 뜻으로 가르친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법은 아니니 말입니다.”
이어서 수다르 님은 토생원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저의 선조, 수다르 4세 님께서는 토생원 님 외에도 몇몇 제자들을 거두셨지요. 그들 중에는 훌륭한 의원이 된 이들도 있고, 그릇된 길을 걷게 된 자들도 있습니다. 토생원님은 늦게나마 바른길을 찾아 돌아왔으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제야 수다르 님이 초월자가 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해를 입지는 않을까, 또 자신의 지식이 잘못된 곳에 쓰이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기우라면 기우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일축하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귀족’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무력이 없는만큼 많은 위협에 시달리는게 바로 힐러들이고, 반대로 치유 능력을 무기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는 힐러들도 적지 않으니까.
“산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옵니다. 허약한 아이를 위해 산삼을 찾는 어미와 아비, 병든 부모를 위해 약초를 캐러 온 자식, 생계를 위해 약초를 캐는 약초꾼, 평생을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살아와 놓고 뻔뻔하게 한 달이라도 더 살아보겠다는 부자에게 팔아먹을 약초를 구하는 자들······.
그리고 산신령은 그 모두를 살펴보고 마땅히 보상받아야 할 자에게 작은 기적을 내려주는 존재입니다. 선한 자인지, 악한 자인지, 현명한 자인지, 어리석은 자인지, 그 모든 것을 꼼꼼히 따져보고, 정말로 기적이 필요한 자에게 기적을 내려주는 것이지요.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함부로 생명과 관련된 지식과 기적을 내려주는 것은, 저의 본분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아······.’
그 순간, 나는 왜 산신령님이 그토록 사회생활 능력이 뛰어난지를 깨달았다.
거대한 산속 깊은 곳에서, 수백 년을 홀로 앉아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그들에게 상과 벌을 내리는 존재. 그게 산신령의 본질이니까.
그런 분이 사람 보는 눈이 없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생각해보니, 수다르 님이 숲속 친구들을 도와준 것도 약간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지······.’
그 시간 동안 친구들의 됨됨이를 살펴보신 건가.
“자자, 먹을 게 나왔습니다. 무슨 얘기인지는 몰라도, 먹고 얘기하세요.”
바로 그때, 아버지가 황복 코스 요리의 두 번째 메뉴인 황복 속껍데기 샤브와 껍데기 요리를 내오셨다.
“허허, 이는 그리 가벼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이니, 천천히 생각을 해보시지요. 모든 일에는 알맞은 때가 있는 법, 장인이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가 저희의 대화로 인해 맛이 떨어진다면, 그 또한 아쉬운 일 아니겠습니까?”
“으, 으음······. 아, 알겠느니라”
고미는 초조한 듯 커다란 눈망울을 데록데록 굴려대며 수다르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이 수다르 님의 눈치를 보다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흠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다르님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고, 친구들은 애써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의와 논리를 앞세워 산신령님에게 강제로 무언가를 시킬 수 있는 자격이, 적어도 우리에게는 없으니까.
“허허, 복 껍질은 다른 어떤 음식에서도 맛볼 수 없는 독특한 식감이 있지요.”
“오오, 전에 말하던 삼대 식감이라는 것 말이냐?”
식감 이야기가 나오자, 고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음, 아무리 그래도 태세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먹는 얘기가 나오니까 바로 그렇게······. 이 식탐 대장 같으니.
“허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먹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직접 고미님에게 그 삼대 식감이라는 것을 맛보여 드려야 하겠군요.”
복 껍질 요리는 총 두 가지였다.
잘 손질된 복 껍질을 데쳐 그대로 내온 것과 복 껍질 무침.
“허허, 그럼 먼저 껍질의 식감을 오롯이 즐겨 보시지요.”
수다르님은 곧장 복 껍질 데침을 미나리와 함께 소스에 찍어 고미에게 건네주었다.
“으음······. 아니다, 수다르. 먼저 네 시식평을 듣고 싶구나. 너의 시식평을 듣고 나면 음식의 맛이 한층 살아나니 말이다.”
“하하, 우리 고미가 뭘 아네. 산신령님의 시식평은 아주 정확하니까 말이야. 시식평을 듣고 나서 음식을 먹고 나면 생각 없이 먹었을 때와는 다르게 요리의 숨은 맛을 구석구석 느낄 수 있으니까 말이야.”
고미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요리사에게 있어 자신의 요리를 이렇게 정확하게 분석하고 즐겨주는 식객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커다란 기쁨이겠지.
“허허허, 그럼 이 수다르, 결례를 무릅쓰고 먼저 맛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수다르 님은 망설임 없이 싱싱한 미나리와 탱글탱글한 복 껍질을 집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호오······.”
수다르님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새어 나오자, 숲속 친구들은 숨을 죽이고 산신령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 않고, 좋은 재료를 정확하게 손질하여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시간을 데친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기본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드물지요.”
“오오, 그렇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이지, 기본이 부실한데 기교를 부려봐야 잔재주에 불과하니라.”
수다르님의 시식 평을 들은 고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아마 저건, 무공에 관한 이야기겠지.
살짝 핀트가 어긋난 것 같지만, 뭐 그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무를 갈아 사용했다면 자칫 심심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배의 자연스럽고 옅은 단맛이 어우러져 복 껍질의 식감과 맛을 심심하지 않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 소스는 회 뿐 아니라 껍질 데침이라는 두 번째 메뉴를 위한 안배이기도 했던 것이군요.”
시식 평이 끝나기 무섭게, 숲속 친구들도 앞다투어 복 껍질 데침을 맛보기 시작했다.
“오오, 그렇구나. 이 쫄깃하고 탱글한 식감은······. 으음······. 이럴 수가, 어째서 식감이 여섯 번째 맛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느니라!”
복 껍질을 처음 맛본 고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식감이기는 하지.
조금 느낌이 다르기는 하지만, 샥스핀과 더불어 맛이 아니라 식감으로 먹는 대표적인 음식 중 하나니까.
“으음, 껍질 무침은 복어 속껍데기 샤브와 함께 즐기는 것이 좋겠군요.”
껍질 데침 시식을 마친 수다르 님은 이내 회보다 조금 탁하고 질겨 보이는 생선 살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복어 샤브에 사용되는 일명 속껍질은, 복어의 껍질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살이지요. 회로 먹기에는 너무 단단하고 질기지만, 육수에 데쳐 샤브로 먹으면 다른 생선으로 만든 살과는 또 다른 풍미를 즐길 수 있습니다.”
도톰한 복어 속껍질이 맑은 탕 속에 투하되는 순간, 숲속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른 침을 집어삼켰다.
황복 지리(맑은 매운탕)는 생선 살이 들어간 탕 종류, 특히 지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감탄사를 내뱉는 음식이다.
그리고 그 맑고 시원한 국물은 다른 어떤 탕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개운하고 시원한 맛을 자랑한다. 문자 그대로 ‘가슴이 뻥 뚫린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요리랄까.
“수다르 님, 정말 죄송하지만, 제자를 거두는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때, 음식에 집중한 다른 이들과 달리 줄곧 초조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이강혁 씨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수다르님의 제자가 된 자들이 후에 그 의술을 이용해 잘못된 일을 할지도 모른다고는 하나, 이는 수다르 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에게 해를 입히려는 자가 있다면 저희가 모든 역량을 동원해 반드시 지켜낼 테니, 한 번만 재고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강혁 씨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수다르 님은 대답조차 없이 그저 생선 살이 익기만을 기다렸다.
“그, 그렇다. 수다르! 나도 이렇게 부탁하마!”
심지어 황복에 홀려있던 고미까지 다시 나섰음에도 산신령님은 말없이 생선 살을 건져 앞접시에 올려둘 뿐이었다.
확실히, 뒷일을 생각해 의무병 육성 자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지나친 우려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수다르 님의 생각이 그렇다면 강요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린 문제니까.
“산신령님,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지 할게요. 선발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고, 그 능력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도 규칙을 잘 만들고 관리해 나간다면······.”
“수하님, 수백에 달하는 이능력자들이 모인 조직입니다. 강혁 님과 유진 님은 각자의 조직을 관리하기도 버거울 것입니다. 게다가 토생원과 저는 모두 속세에 익숙지 않으니, 그 조직 속에서 인재를 선발하고 가르치는 일을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차피 이 일은 제가 제안한······.”
다급해진 내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보았다. 수다르 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이지만, 분명히, 낚싯바늘처럼 휘어 올라가는 것을.
‘자, 잠깐,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