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3 예상 밖의 퀘스트
[ 오, 오오……. 알겠다! 이 몸이 책임지고 수다르를 데리고 오겠느니라! 아빠는 최선을 다해 요리를 준비하거라! ]
자신감 넘치는 아버지의 모습에 고미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꼬리를 흔들어댔다.
음, 수다르 님을 대접하는 것보다 단순히 네가 새 메뉴를 맛보고 싶은 것 같은데…….
어찌 됐든, 지금까지 아버지의 요리는 한 번도 고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전에 없이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니, 맛있는 걸 먹는 게 인생의 목표인 아기곰으로서는 기대가 될 수밖에.
“알았어. 걱정하지 마. 곧 모시고 올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인 뒤 연맹의 실무자들에게 포션 제작자나 의무병 양성 과정에 대해서는 나에게 일임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얼마든 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에 박 실장님은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정말 놀랍군요. 초월자에게 직접 그런 일을 부탁할 수 있다니……. 그런데, 산신령님은 누구시죠?”
이희정 씨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음, 백색 화원의 주인의 스승이요. 단약 제조랑 의술로는 초월자를 능가하는 분이죠. 노인국 씨는 한 번 본 적이 있으실 거예요.”
놀이공원에서 본 적이 있다는 말에, 노인국 씨는 곧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설마 그때 놀이공원에서 뵈었던 그분이 산신령님이었나? 옆에 있던 토끼가 백색 화원의 주인이었고?”
“네.”
슈퍼 먼치킨 곰돌이로도 모자라 산신령에 초월자까지 입에 오르내리자, 저스티스와 블랙 메이지의 두 실무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알겠네. 그럼 그건 자네에게 맡기고, 우린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지. 아버지께서 산신령님을 모시겠다고 준비를 단단히 하신 모양인데, 우리가 계속 끼어 있기도 뭐하니 말이야.”
말을 마친 노인국 씨는 부모님에게 다가가 개업 축하 인사와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넨 뒤 나머지 분들과 함께 유유히 가게를 떠났다.
“자, 그럼 우리는 상이나 치우자. 밥값 해야지.”
이후 봉식이와 나는 테이블 정리를 도왔고, 한유진 씨와 제르보나, 이강혁 씨는 오늘의 스페셜 게스트, 산신령님을 모시러 가기 위해 출발했다.
“그럼 저희는 수다르 님이랑 토생원 님을 모시고 올게요. 이유찬, 너는 수하 씨 부모님 잘 도와드리고 있어.”
한유진 씨의 말에 오늘의 특별 주방보조, 흑룡 셰프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야채를 다듬으며 답했다.
“걱정 마, 이제 이 주방에도 제법 익숙해졌으니까.”
말을 하는 와중에도 흑룡 셰프의 손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잘하시는구나.’
그런데……. 정말 고맙기는 한데, S급 헌터이자, 대한민국에 둘밖에 없는 드래곤이, 횟집에서 주방 보조 일을 해도 되는 걸까?
어째 굉장히 심각한 인력, 아니, 용력 낭비라는 생각이…….
나와 봉식이가 테이블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아웅이와 다웅이는 착실하게 제 할 일을 해나갔다.
“아웅. 우, 우웅!”
아웅이가 무언가 지시를 내리듯 말을 하며 술병과 음료수를 꺼내 다웅이에게 내밀면, 다웅이는 물수건으로 그것을 깨끗하게 닦아 일렬로 냉장고에 줄을 세웠다.
‘생각보다 부지런하네.’
처음에는 다웅이가 일을 도와준다고 해서 조금 걱정했는데, 이제 보니 괜한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일 처리는 제법 꼼꼼하고 깔끔했으니까.
무엇보다 게으름의 화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녀석이 가게 일을 도와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특하다.
[ 우우웅……. ]
한편, 능숙하게 식당 일을 돕는 아웅이와 다웅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원조 아기곰은 깊은 고뇌에 빠진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침음을 흘렸다.
‘왜 저러지?’
자못 진지하고 심각해 보이는 그 표정에 조금 걱정이 되어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아웅아~ 심부름 좀 다녀올래요?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서 미나리랑 배가 떨어졌네?”
어머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아웅이를 불렀다.
“아웅!”
그러자 냉장고 정리를 마친 아웅이는 잽싸게 어머니에게 달려가 메모지 한 장을 받아들었다.
“아웅이가 심부름도 해?”
말도 못 하는 애, 아니, 북극곰이 심부름을 한다는 게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아 던진 질문이었다.
“으응, 엄마가 뭐 적어주면 잘 사와. 동네 마트랑 상인들한테는 벌써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싹싹하지, 귀엽지, 성실하지.”
[ 뭐, 뭣이!? ]
아웅이를 향한 엄마의 칭찬에, 고미의 얼굴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아아, 언제나 가장 무서운 적은 방심이라고 했던가.
진정한 적은 호시탐탐 엄마의 품을 노리는 판다가 아니라, 충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웅이였던 것이다.
[ 이, 이 몸도 할 수 있다! 아웅이보다 백 배는 더 잘 할 수 있다! ]
다급해진 고미는 곧장 목소리를 높여 원조 곰돌이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 애썼다.
음, 왜 그렇게 심각한가 했더니, 아웅이와 다웅이가 일을 너무 잘하니까, 내심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녀석들이 자기보다 더 예쁨을 받을까 겁났던 모양이군.
“으응? 그래? 그럼 오늘은 고미가 다녀올래요?”
어머니 역시 고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장난스레 웃으며 녀석에게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근데 엄마, 배달시키면 되지 않아?”
동네 장사라는 게 다 그렇지만, 보통 주위에 작은 마트가 있고, 부족한 재료나 그때그때 필요한 재료는 그런 곳에서 배달을 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굳이 아웅이에게 심부름을 시킨다는 게 조금 의아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으음, 고미도 그렇고, 아웅이랑 다웅이도 그렇고, 너무 가족끼리만 지내니까……. 이런 거라도 시키면서 사람들하고 안면도 트고, 금전 감각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옥분 여사의 현명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확실히 고미도 바깥 생활에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사실 내가 고미에게 연맹의 ‘특별 강사’ 일을 맡기려는 것도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고.
[ 뭐, 뭣이, 서, 설마 다웅이도 심부름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냐? ]
“음, 벌써 두세 번 정도 갔다 온 것 같은데?”
다웅이도 심부름을 다녀온 적이 있다는 말에, 갈색 솜뭉치가 회색으로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고미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황급히 어머니에게 메모지를 건네받은 고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것을 읽어내려갔고,
[ 으음, 알겠다. 이 몸은 이미 수하와 마트에 다녀온 적이 있다. 반드시 훌륭히 임무를 완수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메모지를 손에 쥔 채 G-3에 올랐다.
“수하야, 혹시 모르니까 고미 좀 따라갔다 와.”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에 고미는 곧장 고개를 저으며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 아, 아니다! 아웅이와 다웅이도 혼자 가지 않느냐! 위대한 이 몸에게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 ]
“고미.”
단 두 글자로 상황이 정리되고 말았다.
[ 우, 우웅……. 알겠느니라. ]
음, 언제봐도 정말 굉장하군.
어쩌면 차원 최강은 고미가 아니라 엄마가 아닐까?
* * *
마트로 가는 내내 고미의 어깨는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어찌나 실의에 빠졌는지, 페달을 돌리는 게 너무 느려서 고미가 아니라 다웅이가 카트에 타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
“고미, 괜찮아?”
[ 걱정하지 말거라……. 이 몸은 수천 년간 대균열을 홀로 지켜온 위대한 수호자니라. 이 정도 시련쯤은……. ]
실의에 빠진 고미의 눈동자는 마치 다른 곰의 그것처럼 흐리멍덩하게 변해 있었다.
‘으음, 그렇게 기운이 없는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한 가지 의문은, 고미가 위기(?)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관리자가 퀘스트를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웬일이지? 이 정도 사태면 충분히 퀘스트를 보낼 만도 한데.’
물론, 그런 게 없더라도 나는 고미가 기운을 차릴 수 있게 도와줄 생각이니 크게 상관은 없지만, 어쩐지 조금 마음에 걸린달까.
‘설마, 진짜로 잘린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그래도 명색이 관리자인데…….
나는 관리자에 대한 생각을 잠시 미루고 고미의 뒤를 따라가며 핸드폰을 꺼내 검색창에 ‘미나리 고르는 법’과 ‘배 고르는 법’을 검색해 녀석에게 보여주었다.
“고미, 이것 봐. 좋은 미나리랑 배 고르는 법이야.”
[ 우웅……? ]
“네 후각이라면 틀림없이 최고의 미나리랑 배를 고를 수 있을 거야. 싱싱한 거로 잘 골라서 돌아가면, 네가 훨씬 더 심부름을 잘한다는 걸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제안에 슬픔에 잠겨있던 아기곰의 눈동자가 의욕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그, 그렇구나! ]
기운을 차린 아기곰은 마트에 들어서기 무섭게 사냥감을 찾는 맹수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빠르게 미나리와 배를 찾아낸 뒤 더없이 신중한 표정으로 그 중 가장 좋은 것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 으, 으음……. 이것이 향이 가장 좋구나. 게다가 이파리도 넓고 싱싱하고, 밑동에 구멍이 없다. 배는……. ]
그렇게 배와 미나리를 골라 계산대에 올려 놓았을 때, 시스템 창이 왜 퀘스트를 보내지 않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어머, 네가 고미니?”
계산대에 서 있던 직원은 이미 고미를 알고 있다는 듯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 우, 우웅? 수하, 이 인간이 나를 아는 것 같구나! 여, 역시 이 몸의 위대함을 알아보는 것이겠지? ]
“네, 어떻게 아셨어요?”
고미 대신 내가 대답을 하자, 직원분은 미나리와 배를 바코드로 찍으며 생긋 웃음을 지었다.
“사모님하고 사장님이 얼마나 자랑을 하신다고요. 곰돌이 삼형제 중에 첫째가 고미인데, 얼마나 착하고 예쁜지 모른다면서.”
[ 우, 우웃! 수, 수하! 엄마 아빠는 이 몸을 잊은 것이 아니었구나! ]
직원분의 말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녀석의 꼬리와 귀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입가에는 행복한 웃음이 걸렸다.
‘위기가 아니라서 퀘스트를 안 보낸 거구나.’
아마도 부모님은 어딜 가나 늦둥이 아기곰에 대해 자랑을 했을 테고, 이 위기는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풀릴 거였으니 굳이 퀘스트를 주지 않은 거겠지.
“어머, 미나리랑 배도 좋은 거로 잘 골랐네. 아웅이랑 다웅이는 좋은 거 나쁜 거 잘 구분을 못 해서 맨날 저희가 대신 골라주거든요.”
이어지는 칭찬에 자신감을 되찾은 원조 아기곰은 짤막한 꼬리를 바짝 세운 채 직원분을 내려다(?)보았다.
“아이고, 예뻐라. 칭찬해 주는 걸 알아듣나 봐요? 정말 똑똑하네.”
계산을 마친 직원분은 곧바로 카운터 주위에 있던 초코바 몇 개를 집어 고미에게 건네주며 친절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거, 서비스로 드릴게요. 사장님하고 사모님이 고미가 초코바를 좋아한다고 그러시던데.”
* * *
마트에서 나온 고미는 조심스레 미나리와 배를 자신의 사이드 카에 싣고는 신이 나서 페달을 굴려댔다.
[ 후후후, 수하, 역시, 엄마 아빠는 이 몸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몸이 없는 자리에서도 이 몸의 위대함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다닌 걸 보면 말이다. ]
부모님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자랑을 하고 다녔다는 것이 못내 기뻤는지, 녀석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음……. 처음 만났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이 녀석 음치구나.’
음정이나 박자는 여전히 엉망이지만, 귀여우니까 넘어가자.
그렇게 소소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가게로 돌아가자, 어머니는 곧장 고미를 번쩍 안아들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고미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큰 상이었다.
“아이고, 첫 번째 심부름인데, 싱싱하고 좋은 거로 잘 골라왔네? 우리 고미 똑똑하기도 하지.”
[ 후후후, 그것 보거라! 위대한 이 몸에게 불가능은 없나니! 다음 번에는 수하 없이 이 몸 혼자서 임무를 완수하겠다! ]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곰이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을 때, 마침내 오늘의 스페셜 게스트, 수다르님이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셨다.
“허허허, 어머님, 아버님, 개업식이라 하여 찾아왔는데, 되려 저 때문에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군요.”
“아이고, 산신령님. 저희가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산신령 님을 가장 먼저 대접해야죠.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며 미리 세팅을 해둔 테이블로 수다르님을 안내했고, 이내 산신령님을 위해 준비된 특별 메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니 이것은…….”
회를 시작으로 껍질 요리, 샤브와 지리까지.
황복 풀코스.
가격도 가격이지만, 좋은 횟감을 구하는 것도 어렵고, 무엇보다 손이 많이 가기로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정성이 필요한 요리였다.
아버지가 자랑하는 비장의 요리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자, 수다르 님의 눈썹이 감격으로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허허허허……. 이렇게 귀한 것을……. 이 수다르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오늘은 잠잠하나 했던 꿀태창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퀘스트를 보내왔다.
그런데……. 퀘스트의 대상이…….
‘수다르 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