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1 수하만 몰랐던 이야기
[ 수하……. 내가 그 멧돼지를 처리해주면, 봉식이는 행복해지는 것이냐? ]
언제나 싱글벙글 즐거운 아기곰이었지만, 오늘 녀석의 표정은 딴 사람, 아니 곰처럼 진지했다.
[ 이 몸은 맛있는 것을 먹고, 즐거운 일들을 잔뜩잔뜩 찾아 놀고,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너희들은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었지.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행복했느니라. ]
이어지는 고미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턱 막혔다.
[ 그러니, 나 역시 너희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고 싶다. 수하 네가 원하는 대로 여유로운 삶을 살게 해주고 싶고, 허수아비가 원하는 대로 악당들을 물리치고, 삼룡 어멈을 위해 맛있는 것을 먹고 재미있는 곳에 함께 가주고 싶다. ]
으, 으음……. 이런 말을 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지만, 이 녀석의 머릿속에서는 삼룡이 패밀리가 자기와 놀아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삼룡이 패밀리와 놀아주는 것으로 되어있는 모양이군.
게다가 맛있는 걸 좋아하는 건 너잖아…….
어찌 됐든, 고미의 말을 들은 숲속 친구들은 모두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의 머릿속에는, 놀이공원에서 봉식이가 했던 말이 재생되고 있었다.
「 몰라, 어쨌든 난 안 받아. 난 스스로 강해지고 싶어. 꼭 고미 때문이 아니라, 그냥 이건 내 인생의 목표 같은 거라고. 」
이강혁 씨, 나, 한유진 씨에게, 강해지는 건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봉식이는 다르다. 녀석은 순수하게 강해지는 것, 그 자체가 목표였다.
타고난 재능 때문인지, 체질 때문인지, 나도 모르는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냥 어릴 때부터 그랬다.
언제나 비슷한 등급의 헌터 중에서 주목을 받았던 것도, 단순히 뛰어난 스킬과 피지컬 때문이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강함에 집착하며 단련해온 결과였다.
지금도 숲속 친구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트레이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녀석이고.
‘그렇구나……. 고미는 봉식이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었던 거야.’
다치지 않고, 싸우지 않으면 제일 좋고, 그냥저냥 워라벨 맞춰가며 평온하게 사는 건 ‘내 꿈’이다.
봉식이의 꿈이 아니라.
그리고 녀석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그저 내 욕심일 뿐, 봉식이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
[ 이 몸도 가족이 다치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봉식이는 진정한 전사가 되길 원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면, 봉식이는 결코 강해질 수 없을 것이다. ]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어른스러워졌지.’
착하고 정의로운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봉식이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 선택은 내담자의 몫이야. 치료자가 할 일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거지, 자신의 가치관으로 그 사람의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는 게 아니란다. 」
언젠가 교수님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뻔히 알고 있고, 나름대로 잘 적용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가족 문제에는 그렇게 냉정할 수 없었던 걸까.
‘음……. 애를 키우다 보면 배우는 게 있다던데, 이번만큼은 고미한테 내가 배우는 것 같네.’
때마침 어머니가 매운탕과 밥을 내오자, 봉식이가 김을 찢어 그 위에 새하얀 쌀밥을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네가 그런 말 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다. 초월자니 뭐니, 훨씬 위험한 일에도 덥석덥석 나서면서, 왜 내가 조금 다친 거 가지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냐?”
“그게 조금이냐? 가뜩이나 큰 머리가 두 배가 됐던데, 게다가 나는 나름대로 계산을 해보고 움직인다고. 넌 그냥 달려든 거고.”
“내가 달려들었나, 그 무식한 아저씨가 먼저 달려들었지.”
“리벤치 매치한다며.”
“아니, 뭐 내일 당장 한다고 했냐. 조금 더 강해지고 다시 해야지.”
나의 대답에 봉식이는 코웃음을 치며 세 숟가락 만에 밥 한 공기를 비웠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강혁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뗐다.
“수하 씨, 제가 보기에는 수하 씨도 충분히 많은 위험을 감수해 왔습니다. 게다가 수하 씨는 봉식이보다 약할 때도 더 위험한 짓을 서슴없이 했던 것 같은데요.”
으음,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전 안전제일 주의에요. 충분히 계획을 세우고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어야 움직이는 거라고요.
[ 후훗, 그렇지. 수하는 의외로 용감하고, 신의를 아는 좋은 녀석이다. 게다가 뛰어난 모리배지. 스스로는 그걸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
음, 그런데, 모리배 말고 다른 단어를 써줄 수는 없을까……. 책략가라던가, 뛰어난 책사라던가…….
왜 꼭 모리배라는 단어를 쓰는 거냐고.
그리고, 의외로 용감하다니! 내가 겁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꼭 집어서 그렇게 말하면 상처 받는다!
“그럼요. 보기 드물게 괜찮은 사람이죠. 대부분의 헌터는 고미님 같은 분을 만나면 이용할 생각부터 했을걸요. 뭐, 그런 사람이라 믿고 연맹의 수장 자리를 맡기는 거지만요.”
한유진 씨의 말을 들은 봉식이와 이강혁 씨, 제르보나 씨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정말로…….”
자, 잠깐, 근데 방금 뭐라고?
“수장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의 질문에 벌써 밥 두 공기를 해치우고 세 공기째로 넘어가고 있던 봉식이가 이강혁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봐, 내가 몰래 진행하는 게 좋다고 했잖아. 미리 말했으면 분명 안 한다고 난리 쳤을걸.”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넌 알고 있었어?”
“삼대 길드의 연맹주로 수하 씨를 추대하기로 했습니다.”
이강혁 씨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이 사람들이, 봉식이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대화 주제가 이런 곳으로 튀는 거야!
지금 봉식이가 또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두들겨 맞게 둘 것인가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게다가 연맹주라니,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데!
[ 오오! 멋지구나! 연맹주라니! 그렇지, 위대한 이 몸의 제자라면 그런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느니라! 게다가 연맹주가 되면 또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지 않겠느냐! ]
연맹주라는 말에 고미는 신이 나서 솜방망이를 두드렸고,
“만수왕과 황금의 군주가 언제 침략해올지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게다가 무신과 문경준까지 저희를 노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연합을 공고히 해 다가올 싸움에 대비할 필요가 있죠.”
이강혁 씨는 뭔가 핀트가 벗어난 답을 내놓았다.
“아, 아니,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연합을 공고히 하는 건 좋은데, 왜 그 연맹주가 저냐고요. 게다가 왜 봉식이 얘기를 하다 말고 얘기가 거기로 튀어요.”
상황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한유진 씨는 사도고, 이강혁 씨는 회귀자고, 경험으로 따지자면 인생 경험으로 보나 헌터 경력으로 보나 노인국 씨가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
“저보다 훨씬 나은 분들이 줄줄이 있는데 왜 저예요,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저 같은 초짜한테…….”
내가 숟가락까지 내려놓고 손사래를 치자, 한유진 씨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를 사도로 만들어 준 것도, 토생원을 끌어내서 같은 편으로 만든 것도 수하 씨잖아요. 흑암을 우리 편으로 만들고 블랙 메이지 사람들을 정상으로 돌려놓은 것도 수하 씨예요. 이건 이강혁 씨도, 저도, 노인국 씨도 하지 못한 일이죠. 능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니, 그건 고미가 한 거죠.”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토생원은 수다르 님과 고미가 해결했고, 흑암도 고미가 해결했잖아요.
달달한 꿀주먹으로!
하지만 정작 고미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 아니다, 힘을 쓴 것은 나지만, 토생원을 유인한 것도, 흑암을 유인한 것도 네가 아니더냐. 나는 과거 만수왕과의 전쟁에서 흑암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게다가 허수아비와 삼룡 어멈을 친구로 만들어 준 것도 네가 아니더냐? 이제는 문어 할아범도 친구가 되었지! ]
이어서 이강혁 씨가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수하 씨, 이건 노인국 씨도 이미 동의한 일입니다. 실무자들끼리 회의를 거쳐서 큰 틀은 이미 완성이 된 상태고요.”
이, 이 사람들이 나 몰래 언제 그런 얘기를 한 거야.
연맹주 해달라며! 그런데 정작 나한테는 말도 안하고!
시작부터 신용이 바닥이야!
“너무 부담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수하 씨는 지금까지처럼 고미님과 함께 큰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연맹에 갈등이 생기면 그걸 조율해 주시면 됩니다.”
뭘 조율해요……. 다들 사이좋아서 싸운 적도 없으면서.
“아니, 저스티스랑 용왕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잖아요. 저 없어도 잘 굴러갔는데…….”
부담스럽다. 심히 부담스럽다. 난 이런 중책을 짊어질 만큼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용감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다고…….
그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노인국 씨가 다가와 나의 어깨에 지긋이 손을 올리며 말했다.
“허허, 원래 아무 일이 없기가 제일 힘든 거지. 그렇게 큰 조직 두 개가 손을 잡았는데. 게다가 자네는 초월자를 물리치고 우리를 해방해줬으면서, 그 대가로 아무런 이득도 취하지 않았지.”
아니, 엄밀히 따지면, 이득을 보긴 했죠.
고미를 지키기 위해 한 일이니까, 지금 나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하고요.
“던전 하나, 아이템 하나 가지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바닥에서, 모두를 하나로 묶어줄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는 게 내 생각이네. 고미 선생 같은 엄청난 존재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악용하지 않고, 이득을 노리고 남을 돕거나, 무언가를 뺏기 위해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우리도 의심 없이 똘똘 뭉쳐 다가올 싸움에 대비할 수 있지 않겠나?”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자, 노인국 씨는 가볍게 손짓을 해 이희정 씨를 불렀다.
“여기 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제법 두꺼운 서류철이 들려있었다.
“대략적인 계획을 담은 보고서입니다. 놀이공원에 다녀온 이후로 각 길드의 실무자들이 모여 조정한 사항이니, 한 번 확인해 보시죠.”
으으, 우리가 밭 일구고 흑암을 설득하는 사이에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거냐. 뭐가 이렇게 일 처리가 빨라…….
어쨌든, 합의안의 윗부분에는 상당히 평이하면서도 이상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세 길드가 모든 던전을 공동 소유한다.
던전 클리어나 게이트 파괴를 통해 얻은 이익은길드와 해당 활동에 참여한 헌터가 표준적인 수익률에 따라 분배한다…….
‘이렇게 하면 던전에 대한 통제권을 엄청나게 높일 수 있기는 하지…….’
그리고 던전에 대한 통제력이 올라간다면, 관리자에게 뒤통수를 맞더라도 언제든지 파업이 가능해진다.
그것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총파업이 되겠지.
관리자가 고미를 좋아한다는 건 사실인 것 같지만, 완전히 의심을 거두기에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니까.
‘고미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항이야.’
이어지는 조항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각 길드의 전투 요원들을 알맞게 배분하여 반드시 한 팀에 세 길드의 헌터가 모두 배정한다라…….’
사실 한국의 사대 길드는 상당히 밸런스가 좋지 않은 편이다.
흑마법과 독, 저주 계통의 능력자는 대체로 블랙 메이지.
원소 마법 계열이나 테이밍 계열은 용왕.
백병전이나 기공술 계통은 패왕과 저스티스가 양분하고 있는 상태다.
길드장부터 시작해 길드 상위 랭커들이 죄다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자연스레 그 아래에도 그런 사람들이 모이게 된 거지. 필요한 아이템을 구하기도 쉽고, 전투 노하우를 배우거나 능력을 개발하는 데도 도움을 받기 좋으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을 취하면, 전문영역이 확실해지는 대신, 다른 분야(?)의 헌터와 교류가 부족해진다.
뭐, 석박사들이 대체로 자기 분야 벗어나면 세상 물정에 어둡듯이, 이 바닥도 그런 원리가 적용되고 있는 거지.
‘사대 길드가 서로 경쟁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고.’
덕분에 모처럼 연합 작전을 펼쳐도 손발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고, 평시에는 능력이 한쪽에 치중된 파티가 많은 게 이 바닥 실정이었다.
‘이강혁 씨의 말에 따르면, 한국이 번번이 초월자들에게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고 했지……. 뒤늦게 손을 잡아봐야 손발이 안 맞아서 자기들이 가진 힘을 제대로 써먹지를 못했으니까.’
확실히 곰 세 마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지켜주고, 초월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우리가 사는 세계를 지키려면 꼭 필요한 일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세히도 준비해 왔네.’
아마도 이강혁 씨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결과겠지.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맹주 자리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걸 위해서는, 역시 의견을 내놓는 편이 좋겠지.
“으음, 그런데, 제 생각에는 아주 중요한 게 빠진 것 같은데…….”
“그게 뭐죠? 이 정도면 제법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이희정 씨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