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9 아저씨가 왜 여기서 나와요
“하하하하하!”
“피해!”
쾅!
커다란 웃음소리에 이어 묵직한 굉음이 울려 퍼지고, 멧돼지처럼 육중한 체구의 그림자 두 개가 거세게 맞부딪혔다.
봉식이에게 달려든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경준?”
여기서? 왜? 왜 갑자기 문경준이 나타나는 거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이트와 가장 가까운 길드는 저스티스였고, 패왕과는 꽤 거리가 있다.
그런데 어째서 문경준이 이곳까지 달려온 거지?
문경준의 성격상,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 먼 거리를 달려왔을 리는 없었다.
‘오히려 저스티스 놈들 고생하게 생겼다며 집에서 낄낄거리고 있었겠지.’
적어도, 내가 아는 문경준은 그런 사람이니까.
「네, 곧 당신들한테 싸움을 걸 것 같은데요.」
그 순간, 관리자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이 새x가 진짜······.’
그래, 곧이라는 말이 사실 굉장히 모호하긴 하지.
정확한 시간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니까······.
아무리 그래도, ‘한 시간 내로 싸움을 걸 것 같은데요.’라는 말을, ‘곧’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잖아!
게다가 어째서 ‘지금’, ‘이곳에서’, ‘봉식이에게’ 싸움을 거는지, 단 하나도 이해가 가는 구석이 없었다.
“고미, 가자!”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평상시라고 해도 이렇게 대낮에 싸움을 벌이는 건 충분히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행동이다.
심지어 A급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 와중에 그걸 막으러 온 사람을 공격하다니,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지.
흥분한 내가 무기를 움켜쥐고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 아니다, 수하. 잠시 기다리거라. ]
부드러운 기운이 나의 몸을 멈춰세웠다.
“왜? 지금 저 자식이······.”
[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
평소라면 ‘감히 이 몸의 가족에게 손을 대다니!’ 어쩌고 하면서 나보다 더 난리를 쳤을 텐데······. 갑자기 왜 이러지?
“이것 봐라? 너 춘식이 조질 때 그놈이지? 이것들이 처음부터 짜고 날 가지고 논 거고만?”
문경준의 말을 듣는 순간, 패왕의 빌딩 앞에서 벌어졌던 참교육 영상이 머릿속에 재생됐다.
그 날 문경준은 김춘식인지 뭔지 하는 헌터인지 깡패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양아치에게 참교육을 시전했고, 그 과정에서 초월자의 가짜 빙의체가 강림했다.
그걸 처리한 건 나와 이강혁 씨, 그리고 봉식이였고.
‘그렇다고 여기서 나타난다고?’
아니,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봉식이가 그때의 복면 남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듯한 문경준의 반응이었다.
즉, 이 사람은 우리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로 이곳에 왔다는 소리였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갑자기 왜 이강혁 그 건방진 새끼랑 노인국이랑 한유진이랑 셋이 붙어먹나 했더니, 그때부터 한통속이었냐?”
물론, 처음부터 한 편이라는 건 오해였다.
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새에 갑자기 사대 길드 중 나머지 셋이 손을 잡았고, 한유진 씨가 그날 빌딩에서 봤던 복면 남과 함께 있으니 그때부터 우리가 한편이었다고 멋대로 착각한 게 분명했다.
“이것들이 아주 사람을 가지고 노네?”
“아저씨, 지금 이게 무슨 짓······.”
봉식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를 쏘아붙이는 찰나,
“속이려면 사람을 잘 골랐어야지, 꼬맹아!”
다시 한번 문경준의 주먹이 일직선으로 녀석의 턱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아저씨가 진짜!”
이어서 거대한 돌덩이 두 개가 부딪힌 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봉식이의 몸이 뒤쪽으로 밀려났다.
“문경준!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한유진 씨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하게 구겨졌고,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눈부신 전광이 응집되어 있었다.
“큭큭큭, 이것들이, 그날은 서로 모르는 척하더니, 이제는 대놓고 같은 편인 걸 티를 내네? 처음부터 노인국까지 끌어들이고 나서 내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냐? 엉? 둘로는 불안해서 셋이 손을 잡은 거냐고!”
문경준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봉식이를 공격하고 있는 사이, A급 게이트가 점점 더 안정되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고미. 우선 게이트부터 파괴하자.”
[ 알겠다, 하지만 섣불리 저놈에게 달려들지는 말거라. 살곰살곰으로 다가가서 게이트부터 처리해야 한다. ]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고미는 문경준에게 덤벼들지 말 것을 강조했고, 나는 일단 녀석의 명령대로 살곰살곰을 활성화한 채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콰앙-!
바로 그때, 벽력과도 같은 굉음이 울려 퍼지며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차차, 게이트를 놔두고 너희와 싸움을 벌이면 또 나만 죽일 놈이 되겠지. 이강혁이 그 얍삽한 새끼는 또 좋다고 언론 플레이를 할 테고.”
봉식이를 공격하던 문경준이 돌연 목표를 바꾸어 게이트를 향해 전력으로 주먹을 내지른 것이다.
그야말로 영문을 알 수 없는 문경준의 행동에 나는 물론이고 그와 대치 중이던 봉식이와 한유진 씨, 제르보나 씨마저 잠시 넋이 나가고 말았고,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한유진 씨의 표정은 전에 없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A급이라 한방에는 안 부서지는군.”
하지만 문경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는 듯 가볍게 주먹을 내질러 게이트를 파괴했다.
“자, 그럼 하던 일 마저 할까? 거기 덩어리, 덤벼.”
······.
이 미친 자식이, 대체 뭐야?
“아, 그리고 뒤에 숨어있는 놈. 어설픈 은신 스킬로 기습할 생각 말아라.”
봉식이를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이던 문경준이 정확히 내가 서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살곰살곰을 간파했어?’
이전에 만났을 때는 탐지 스킬이 없어서, 굳이 살곰살곰의 스킬 레벨을 높이지 않은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문경준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어렸다.
“이것 봐라? 너 그때 부메랑 던진 새끼지?”
한 방에 알아보시네. 눈썰미도 좋으셔라.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이강혁이 그 건방진 애새끼냐?”
“일단 그렇기는 한데요. 그때부터 동맹이었던 건 아니고······. 어, 지금 숨어있던 것도 그쪽을 공격하려던 건 아니거든요.”
나는 실없이 웃으며 약점 간파와 감각 강화를 최대치로 활성화해 문경준의 약점을 찾으려 했다.
‘없어······.’
하지만, 약점이 보이질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사도가 됐다고는 들었지만, 한 번에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이 사람과 나의 격차가 너무 커서?
“야, 김수하. 나서지 마라. 이 무식한 덩어리가 나하고 한판하고 싶은가 보다. 너랑 한유진 씨는 몬스터나 정리해.”
봉식이가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녀석의 몸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눈부신 금광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할 수 있겠냐?”
“이 무식한 아저씨가 힘만 믿고 까부는 것 같은데, 내가 힘으로 지는 거 봤냐?”
봉식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그건 그렇지.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놈이 힘으로 지는 걸 본 적이 없으니까.
“푸하하하!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가오를 잡아?”
자신감 넘치는 봉식이의 태도에 문경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 수하, 저 멧돼지 놈은 봉식이에게 맡기고 너는 삼룡 어멈과 함께 괴수들을 처리하거라. 문제가 생기면 즉시 내가 나서겠다. ]
[ 알겠어. 그럼 우리가 몬스터 처리하고 올 동안 봉식이 좀 부탁할게. ]
고미의 말에 나는 봉식이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몬스터들을 향해 돌진했고,
[ 알겠습니다. ]
한유진 씨와 제르보나 씨 역시 곧바로 하늘로 날아올라 주위의 몬스터들을 향해 번개와 브레스를 내뿜기 시작했다.
고미와 차분하게 수행을 해오고, 퀘스트 보상으로 돌아온 능력치도 적절하게 분배해두었다.
게다가 흑염대웅신검에 영지버섯이라는 사기 아이템까지 두르고 있으니, 이제 A급 몬스터 정도는 적당히 한눈을 팔면서도 처리할 수 있었다.
쿵, 쿵쿵쿵!
지축을 울리며 나에게 다가오는 코뿔소의 움직임이, 거의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흠, 언제 이렇게 실력이 늘었지?’
삼돌이에 비하면 거의 기어 오는 수준의 움직임, 힘은 제법 세 보이지만······.
나는 시험 삼아 봉식이가 각성할 때 고미가 보여주었던 움직임을 따라 해 보았다.
‘여기서 발을 이런 식으로 움직였던가?’
가볍게 후퇴하며 뒷다리로 반원을 그리자, 자연스럽게 온몸이 돌아가며 커다란 검은 코뿔소가 내가 서 있던 곳을 지나쳤다.
‘받아넘길 엄두는 안 나는데······.’
하지만 고미가 했던 것처럼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방향을 바꿀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흘리는 건 되려나?’
공격에 실패한 코뿔소가 육중한 몸을 뒤틀며 방향을 바꾸어 다시 나에게 다가오는 순간, 나는 시험 삼아 방패를 가져다 댔다가 녀석이 돌진하는 타이밍에 맞추어 팔을 움직였다.
쾅!
“어억!”
결과는 실패.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어렵군요, 곰 선생님.
그래도 정면으로 부딪쳤다면 그대로 날아갔을 텐데, 바닥을 두세 번 구르는 것 정도로 끝났으니 이만하면 잘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투우를 하듯 코뿔소의 공격을 피하고, 흑염룡의 불꽃으로 몇 번 지져주자, 거대한 코뿔소가 바닥에 풀썩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자, 그럼 또 가볼까?’
나는 뻐근해진 팔을 가볍게 풀어주며 늑대 형 몬스터가 있는 곳을 향해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쾅, 쾅!
그 와중에도 등 뒤에서는 끊임없이 바위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거 아니냐고?
민봉식이다, 민봉식. 다른 놈도 아니고, 그 인간 병기라고.
거기다가 각성까지 했으니, 상대가 사도가 된 문경준이라도 그렇게 쉽게 당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게다가 녀석의 등 뒤에는 초월자를 상대로 더욱 멋진 승리를 연출하기 위해 필살기를 쓸 타이밍을 재는 아기곰이 있다고.
‘내가 저 둘을 걱정하는 건 쥐가 호랑이, 아니, 호랑이는 안 되지. 곰을 걱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지금 내가 생각할 건,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복습하고, 더 강해질 방법을 찾는 거다.
한동안 민봉식보다 강해졌다고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또 숲속 친구들 중 최약체가 되어버린 것 같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영지버섯을 앞세워 무리 지어 서 있는 늑대들을 향해 돌진했다.
‘먼저 허곰답보.’
바늘처럼 삐죽한 비늘을 가진 늑대 한 마리가 목덜미를 향해 이빨을 들이미는 순간, 가볍게 발을 놀려 피하자, 놈의 뒷목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역시,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편이 허점을 만들기 좋구나.’
- 켕!
한 놈을 베고,
캉!
두 번째로 달려든 놈을 방패로 밀어낸다.
바닥을 나뒹구는 놈을 확실히 마무리하고, 다시 허곰답보.
세 번째 놈의 공격을 방패로 막아내고, 불꽃으로 지져버린다.
네 마리, 다섯, 여섯······.
그렇게 차분히 공방을 반복하며 몬스터를 베어나가자, 마침내 코뿔소를 상대할 때부터 충전해 놓았던 영지버섯에 초콜릿색 젤리 문양이 떠올랐다.
애초에 코뿔소의 공격을 전부 피하지 않았던 것에는 방패를 빨리 충전시키려는 목적도 있었고.
‘좋아, 간다!’
나의 주위에는 어느새 열 마리도 넘는 A급 몬스터가 몰려들어 있었다.
딱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구도로, 몬스터가 모여들었다.
쾅!
영지버섯에 쌓인 데미지를 방출하자, 초콜릿색 젤리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가 반원으로 나를 둘러싼 몬스터들을 휩쓸었다.
“휴······.”
[ 오오, 수하! 훌륭하구나! 이제 전투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구나! ]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무섭게, 기쁨에 찬 고미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번 싸움에서 내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은 적당히 몬스터들을 유인하며 원하는 구도를 만들고, 아이템을 활용해 일거에 전멸시키는 것이었다.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한 마리 한 마리를 처리하느라 바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는 큰 그림을 그리며 싸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흐뭇한 마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고, 고미! ]
뜻 모를 표정으로 초코바를 할짝거리고 있는 아기곰 앞에, 눈이 풀린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민봉식이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