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냉혹한 현실 앞에서 나까지 적당히 넘어가는 순간, 고미의 작품은 혹평을 받고, 순수한 예술곰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생기고 말 거다.
‘정신 차리자. 어떻게든 매력 보정 효과를 얻어내야 해.’
그때, 재료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웅티스트 선생님께서 무언가 떠오른 듯 한유진 씨를 바라보며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삼룡 어멈! 혹시 집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네, 배고프세요?”
“아니다. 아직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진정한 걸작을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할 것 같구나.”
부, 불안하다. 대체 뭘 만들려고 이렇게까지 준비를 하는 거지…….
“제가 요리를 좀 할까요?”
고미가 먹을 것을 찾자, 흑룡 셰프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으음, 고맙다, 검은콩. 놀이공원에 갔을 때 싸갔던 도시락이라는 것으로 부탁해도 되겠느냐?”
고미의 요구에 흑룡 셰프는 이유조차 묻지 않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재료가 떨어져서 만들 수 있는 것은 주먹밥과 김밥뿐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다. 어차피 작품을 만드는 동안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니, 간단하게 요기를 할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
도시락을 요구하는 고미의 말투와 눈빛에서는, 일종의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흑암을 상대할 때도, 토생원을 만나러 갔을 때도, 그 어떤 몬스터를 앞에 두고도 볼 수 없었던, 사뭇 결연하고 비장한 표정.
고미의 꿈이 예술가라는 무서운 말이, 도저히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흑룡 셰프가 요리를 하러 달려간 사이, 고미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바닥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눈앞에 있는 것이 정말 내가 아는 그 슈퍼먼치킨 아기곰이 맞나 의심마저 드는 광경.
그렇다, 지금 고미는 무려…….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고 있었다.
‘이, 이 녀석이 계획을 세우다니.’
무기를 만들든, 던전을 돌든, 고미는 도통 계획이라는 걸 세울 줄 모르는 녀석이다.
일단 꽂히면 곧장 몸부터 움직이는, 이 시대의 진정한 행동파 곰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그’ 고미가 계획이라니…….
그래 봐야 곰손으로 그린 그림이라, 졸라맨은커녕 동그라미가 주르륵 늘어선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자신이 만들 조각상의 도안이었다.
하지만, 그 도안을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거야?”
얼핏 보기에도 열을 넘는 숫자.
설마 가족뿐만 아니라 숲속 친구들까지 모두 만들려는 걸까?
‘아, 안돼.’
이러면 계획이…….
우리 가족뿐이라면 크기와 위치 정도로 어떻게든 구분이 가능하지만, 이강혁 씨에 삼룡이 패밀리, 수다르 님에 토생원까지 합쳐지면, 그것은 그야말로 풀 수 없는 퍼즐이 되어버린다.
‘어,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일을 어렵게 만들 수 있는 거냐!’
최소한 다섯 명이 작품을 알아봐야 한다면, 어떻게든 가능하다.
일단 나. 대웅전의 벽화와 조각상까지 알아본,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한 사람이니까.
거기에 눈치라면 나 이상인 수다르 님이 있으니 둘은 확보.
제르보나 씨 역시 꽤 냉철한 분석력을 가지고 있으니, 믿을만한 전우다.
한유진 씨야 눈치도 빠르고 고미에게 푹 빠져있으니 당연히 알아볼 거고.
‘봉식이랑 이강혁 씨, 이유찬 씨는 안돼.’
저 셋은 믿을 수가 없다.
감히 고미에게 요리에 조예가 있냐고 물었던 눈치 없는 블랙 드래곤은 가장 먼저 제외.
‘이유찬 씨가 고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지.’
녀석의 작품은 눈이 아니라 눈치, 가슴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로 퍼즐을 풀 듯 이해해야 하는 물건이니까.
봉식이도 논외다. 저놈은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할 게 뻔하다.
이강혁 씨는 반반이지만, 그걸로는 위험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틀림없이 고미의 작품을 알아봐 줄 거다.
하지만 고미가 숲속 친구들을 모두 조각으로 만든다면, 지구상에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을 터.
어떻게든 작품의 스케일을 줄여야 한다.
“고, 고미. 설마 숲속 친구들까지 모두 만들 생각인 거야? 그, 그냥 우리 가족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아니다. 위대한 이 몸과 함께 하는 자라면 누구나 이 몸의 작품 속에 녹아들어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으아, 미치겠다……. 마음은 알겠는데, 마음은 정말 잘 알겠는데…….
“고미님, 시간이 촉박합니다. 저희는 나중에 만들어 주셔도 괜찮으니, 우선은 가족분들만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때, 무언가를 눈치챈 제르보나 씨가 예의 바른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에 남을 대작이 될 것이다. 진정한 곰은 신념을 굽히지 않는 법.”
그 답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웅티스트 선생님은 적당히 타협하는 타입의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의 예술관을 끝까지 밀고 가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그럼 시간이 없으니 일단 가족분들부터 만드시고, 저희는 나중에 만들어 주셔서 따로 추가하는 게 어떨까요? 시간순으로도 그게 맞을 것 같은데. 사람들도 스토리가 있는 작품을 더 좋아할 거예요.”
이어서 5인의 결사대 중 한 명으로 낙점된 한유진 씨가 훌륭한 어시스트를 해주었다.
모르기는 몰라도, 일단 내가 뭔가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려는 모양이었다.
‘나이스, 한유진 씨!’
역시, 당신은 고미의 작품을 이해할 눈, 아니, 눈치를 가지고 있어!
“흐으음…….”
그렇게 모두 힘을 합쳐 고미를 설득하고 있을 때,
- 띵동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제가 받아오겠습니다.”
이에 제르보나 씨는 곧바로 문밖으로 나가 반짝반짝 광택이 나는 마력 철을 한 아름 안고 마당으로 돌아왔다.
“훌륭하다. 이 정도 재료라면 틀림없이 굉장한 걸작이 나올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회색의 재료들을 본 웅티스트 선생님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그것을 훑어보더니, ‘허곰섭물’을 사용해 그것을 가뿐히 들어 올렸다.
“고미? 어디서 만들게?”
나의 질문에 고미는 터벅터벅 흑룡 셰프에게로 걸어가 도시락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이 몸은 폐관 수련에 들어갈 것이다.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나오지 않을 테니, 누구도 이 몸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폐, 폐관 수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여태 한 번도 그런 거 한 적 없잖아.
초월자를 잡을 때도 안 한 폐관수련을,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하겠다고?
“고, 고미?”
“기다리거라. 이 몸이 만족할만한 진정한 걸작이 나올 때까지는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을 테니.”
말을 마친 신념의 예술가, 웅티스트 선생님은 곧바로 화원으로 통하는 게이트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고, 우리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그대로 사라졌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웅티스트 선생님이 한유진 씨의 마지막 조언을 받아들이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