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8 봉식이는 짐승이야
“미, 미안하다······.”
갈색 솜뭉치가 고개를 떨군 채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건네자, New인국 씨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아니, 뭐 미안할 것까지야 있나. 자네들 아니었으면 언제 죽었어도 죽었겠지. 그리고 흑암과 계약을 한 건 내 선택인데. 내 선택으로 생긴 문제에 대해 스스로 책임도 못 지면서, 도와준 사람에게 원한을 안 갚아줬다고 화를 내는 것도 웃기지.”
“그럼 동맹 건은 문제없이 진행되는 건가?”
그때,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강혁 씨가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서 말을 꺼내기는 어렵지만,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였다.
“그런 걸 뭘 묻나, 이 친구야! 이 고미라는 친구 밑에 안 들어가면 블랙 메이지고 컬러 메이지고 다 작살이 나게 생겼는데. 오히려 우리가 부탁을 해야지.”
“아, 아니다! 위대한 이 몸은 결코 약자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니, 내, 내키지 않는다면······.”
순진무구한 정의의 사도가 또다시 허둥대기 시작하자, New인국 씨의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정의의 편이라, 좋지! 좋아. 나도 어릴 때는 그런 걸 동경했거든! 이 나이 먹어서 정의의 용사가 될 줄은 몰랐는걸!”
New인국 씨의 시원한 반응에, 고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아기곰으로 돌아왔다.
“오오! 그렇다! 이 몸은 언제나 정의의 편이니라! 이제 문어 할아범도 정의의 편이다!”
음, 고미······.
아무리 그래도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니니.
“그런데 말이야, 그 대균열이라는 걸 지키면 월급은 얼마나 나오나?”
······.
정말이지 New인국 씨는, 여러 가지 의미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군.
“어······.”
······.
그러고 보니 관리자한테 월급을 안 물어봤네.
어쩌자고 제일 중요한 걸 까먹었지.
설마 무보수 노동은 아니겠지?
“와하하하! 농담일세, 농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New인국 씨의 기묘한 하이텐션에, 열정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고미와 이유찬 씨마저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이런 사람이 어떻게 흑암하고 계약을 했을까.
초월자와 계약자는 보통 성향이나 가치관이 맞아야 하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아저씨, 아무리 봐도 흑암하고는 성격이 안 맞아 보이는데, 어떻게 계약한 거예요?”
오, 봉식이 나이스 타이밍.
“아, 거기에는 또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있지.”
물어봐도 되나 싶어서 말도 못 꺼내고 있었는데, 정작 노인국 씨는 ‘내가 왕년에는······.’으로 시작하는 래퍼토리로 기나긴 자신의 인생 여정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무려 자신의 20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장정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려우니, 간단하게 줄여서 설명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본래 아저씨들의 옛날이야기라는 건, 세줄 요약이 가능한 걸 대하소설로 푸는 경향이 있으니까.
본래 노인국 씨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따박따박 월급이 나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소박하고 성실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 공은 김 부장 그 새끼가 다 가로채고, 마지막에는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났지.”
IMF에도 정리해고가 되지 않고 버텨냈는데, 결국 사내 파벌싸움에서 밀려 회사에서 잘렸다고.
“이게 흔하다면 흔한 일인데, 또 막상 당해보면 그렇지가 않아요.”
설상가상으로 아내분이 병으로 쓰러졌고, 그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고, 노인국 씨는 설명했다.
“애는 크지, 돈은 없지, 그나마 모아둔 돈은 병원비로 다 날리고, 그래도 잘 해줬다고 생각했던 부하 직원 놈들은 연락도 안 되지, 가족들도 죄다 모르쇠로 일관하지······.”
확실히, 회사원이던 노인국 씨의 성격이 지금처럼 밝았다면, 아랫사람들에게 못되게 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흑암과 막 계약을 했던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불행하고 괴로울 때였고, 당시 자신은 세상 모든 것을 원망하고 저주했다는 게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그래도 헌터 되면서 돈은 많이 벌었지······. 덕분에 아내도 살았고. 웃기는 건, 돈을 많이 버니까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마누라 아플 때 전화 한 통 없던 놈들한테 연락이 오더라고. 에이, 더러운 놈들.”
그의 마지막 말에는, 흑암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진하게 묻어났다.
자신을 지옥에서 꺼내준 은인인 동시에, 또 다른 지옥으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행복한 삶을 살게 해준 장본인에 대한 마음은, 아마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
“어쨌든, 우리 길드원들도 대체로 나랑 비슷하거든. 다들 안 좋은 시기에 흑암과 계약을 한 거니까 말이야. 흑암이랑은 언제 쐬주라도 한잔 딱, 하면서 풀어보고 싶군 그래.”
노인국 씨의 이야기는, 그렇게 지극히 아저씨다운 멘트로 마무리되었다.
* * *
던전에서 나온 후, 우리는 다시 한유진 씨의 집에 있는 토끼굴(?)로 향했다.
흑암을 만나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노인국 씨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친구도 마음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텐데, 조금 더 생각이 정리되면 한번 보지. 가능하면 첫사랑 꿈도 좀 꾸게 해달라고 전해주고, 아, 삼겹살에 소주 좋아하는지도 좀 물어봐 주게.’라는, 털털하면서도, 참으로 어른스러운 대답과 함께.
“오오, 돌아오셨습니까?”
마늘인지 달래인지 알 수 없는 이계의 식물과 민들레인지 쑥인지 알 수 없는 물건을 들고 화원으로 돌아가자, 수다르님과 토생원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화원의 한편에서는······.
구구구구구궁!
엄청난 효과음과 함께 굴착 작업이 한창이었다.
“엄청나군요.”
“두더지답네요.”
“의외로 성실한 구석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 모습을 본 숲속 친구들은 감탄이 섞인 표정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고,
“오오! 이 몸도 흑암과 함께 밭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겠다!”
언제나 적극적인 우리의 솜뭉치도 곧장 팔을 걷어붙이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흑암! 이 몸이 도와주마!”
“시끄럽다! 밭이라는 게 무조건 땅만 판다고 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위대한 이 몸에게 불가능은 없나니!”
그렇게 두더지와 곰돌이가 티격태격하며 흙놀이(?)를 즐기는 사이, 수다르님과 토생원은 곧장 이계의 마늘과 쑥을 받아 요리조리 뜯어보며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스승님, 어떻습니까? 이 두 가지에 오엽신초를 섞고, 염농목의 가지를 우려서······.”
“그렇게 하면 부작용이 더욱 강해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두 가지를 기초로 하는 이상 부작용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야 하지만······. 자칫하면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약효가 지속될 터인데······.”
“전투 도중에 약효가 끊기면 싸워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을 자들이 부지기수인데, 이번만큼은 조금 약효를 세게 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자, 잠깐······. 부작용이 있는 포션이었어?
“저······. 수다르님······.”
물론 산신령님이 있는 이상 부작용이 있다고 해봐야 심각한 수준은 아닐 거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천하제일 단약사, 수다르님조차 부작용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허허, 걱정 마십시오 수하님. 이 수다르가 있는 이상, 결코 정신이 망가지거나 몸이 망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다르님의 인자한 표정을 보는 순간, 불안한 마음이 적잖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보고 먹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 그럼 우선 시험 삼아 두세 가지 단약을 만들어 보도록 하지요.”
내가 불안해 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아니면 의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수다르 님은 웃으며 실험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쾅!
바로 그때, 공사가 진행 중이던 곳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며 화원 전체가 격렬하게 뒤흔들리고,
“에이이잇! 그렇게 부수는 것이 아니다! 조심스럽게 파내야지!”
“우웃! 알겠다!”
땅굴 깊은 곳에서 성난 흑암의 목소리와 고미의 목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
고미, 진짜로 밭을 ‘만들고’ 있는 거 맞지?
‘부수고’ 있는 건 아니지?
‘왜 이렇게 걱정이 되냐······.’
불안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생원은 토끼의 날렵함을 십분 발휘해 화원 이곳저곳을 오가며 재료를 모아왔고, 순식간에 첫 번째 단약이 완성됐다.
“자, 그럼 첫 번째 단약의 효과를 시험해 보도록 하지요. 부작용을 최대한으로 줄인 대신, 약효가 조금 떨어지는 단약입니다.”
하지만 단약이 완성되기 무섭게, 우리는 곧바로 한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그런데, 이거 누가 먹어요?”
한유진 씨의 질문에 자리에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독성이 조금 있는 약초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천독불침에 이른 수하님께서 이 약을 먹으면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저는 독 저항 스킬에 공포 저항 스킬까지 있어서 저를 기준으로 하면 문제가 생길 것 같군요.”
이어서 이강혁 씨가 손을 들고 자신도 어려울 것 같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연히 약을 먹기 싫어서는 아닐 테고, 조금 더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
기준은 공포 면역이나 독 저항 스킬이 없는 사람들로 해야 하니까.
“제가 먹어볼까요?”
이유찬 씨가 스스로 실험 대상이 되겠노라 지원했지만,
“음, 유찬님은 종(種)이 다르시니, 인간에게 먹일 약의 약효를 시험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역시, 종이 다른 이상 의미가 없지.
그럼 남는 건 한유진 씨와 봉식이뿐인데······.
“내가 먹지 뭐. 난 독 저항도 없고 공포 면역도 없고.”
뭐, 저 녀석은 원래 겁대가리를 상실한 녀석이기는 하지만······. 이건 좀 다른 문제니까.
말을 마친 봉식이는 한유진 씨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완성된 단약 한 알을 덥석 집어삼켰다.
“으음······.”
그리고는, 맛에 대한 감평 한마디 없이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그런데, 위압이나 공포 스킬 써야 하지 않아요?”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네······. 공포 면역 포션을 만들어 놓고, 정작 공포 스킬을 안 썼구나.
“고미! 도와줘! 약효를 확인해 봐야 해!”
“우웅, 알겠느니라! 역시 위대한 이 몸이 없으면 일이 되지를 않는구나!”
숲속 친구들이 도움을 요청하자, 신나게 굴 파기 놀이를 즐기던 솜뭉치가 번개처럼 땅 위로 돌아왔다.
“봉식이에게 웅기충천(熊氣衝天)을 사용하면 되는 것이냐?”
평소 고미는 웅기충천을 사용할 때, 우리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몬스터들하고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가 될 테니까.
“응, 너무 세게 하지는 말고. 적당히.”
“으음······. 알겠느니라. 그럼 너희들이 말하는 A급 몬스터가 달아날 정도로만 하면 되겠느냐?”
“네, 곰 선생님.”
이강혁 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미는 곧바로 봉식이를 바라보며 가볍게 발을 굴렀고,
“윽······.”
고미의 기를 뒤집어쓴 봉식이의 몸은 곧장 딱딱하게 굳어갔다.
“보, 봉식이, 괜찮느냐?”
이에 고미는 황급히 자신의 기를 거두어들이며 봉식이의 안색을 살폈다.
“으, 응······.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너 지금 처음 고미 봤을 때 겁먹은 거랑 거의 비슷한 상태인데······.
결국 첫 번째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두 번째 단약 역시 제대로 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역시, 부작용을 걱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스승님.”
토생원이 진지한 목소리로 조언을 하자, 수다르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겠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단약이 완성됐고, 봉식이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세 번째 웅기충천이 봉식이의 몸을 휩쓰는 순간,
“크르르르······.”
갑자기 봉식이의 입에서 맹수의 그것 같은 기이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자, 잠깐······. 수다르 님, 부작용이 이런 거라면 미리 말을 해주셨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