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57화 (157/300)

EP.157 새롭기만 한게 아니다

드넓은 초원 한구석에 자라나 있는 익숙한 모양의 풀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

정말 이렇게 생겼구나.

지금 내 눈앞에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할 수밖에 없는 식물의 줄기가 보이고 있었다.

아니, 줄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는 사람도 있으려나.

하지만 뿌리를 보면 곧장 나 같은 반응을 보일 거다.

마늘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으니까.

“오오, 정말로 마늘과 비슷한 향이 나는구나.”

고미는 꼭 자연체험 현장학습을 나온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코를 킁킁거렸다.

“후훗, 그놈은 호랑이니, 마늘을 먹지 못하겠지?”

음, 단군 설화에 따르면 그렇기는 하지…….

아니,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은 건가.

애초에 육식 동물인 호랑이에게 그런 걸 먹으라고 내미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무엇보다, 마늘을 먹는 건 만수왕이 아니라 우리잖아.

호랑이가 마늘을 못 먹는 거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자, 그럼 뽑아볼까요?”

말을 마친 이강혁 씨는 곧바로 마늘(?) 줄기 주위를 가볍게 칼로 파낸 뒤 조심스레 뿌리를 들어 올렸다.

“응? 뿌리는 또 달래처럼 생겼네. 희한하구먼.”

흙에 덮여있던 뿌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노인국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왜 줄기는 마늘인데, 뿌리는 달래처럼 생겼을까요. 냄새는 또 달래가 아니라 마늘에 가깝고……. 흥미로운 재료입니다. 이걸로 요리를 만들면 무슨 맛이 날지 궁금하군요.”

새로운 이계의 식재료를 발견한 요리 연구용(龍) 이유찬 씨는 흥미롭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고는, 몇 뿌리를 더 캐낸 뒤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이걸로 돌아가서 요리를 한번 해봐야겠습니다.”

음, 열정적이야. 언제봐도 열정적이야.

고미를 만난 이후로 요리에 대한 열정이 더 강해진 것 같아.

항상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런 걸까?

어쨌든, 정체불명의 이계 마늘을 캐낸 다음 우리가 찾아낸 것은, 쑥 냄새가 나는 약초였다.

“쑥에 마늘이라, 굉장히 익숙한 조합이네요.”

한유진 씨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호랑이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이 이계의 쑥과 마늘이라니…….

고미가 호랑이를 싫어한다던가, 지구력을 올려주는 스킬의 이름이 ‘호랑이와는 다르다.’였던 것 이상으로 황당한 설정이군.

“어찌 됐든, 필요한 아이템은 모두 손에 넣었으니 슬슬 돌아가 볼까요?”

그렇게 이계의 마늘과 쑥을 한가득 챙겨 넣은 뒤 던전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노인국 씨가 나와 숲속 친구들을 빤히 바라보며 한 가지 부탁을 해왔다.

“미안한데 말이야. 몬스터 몇 마리만 잡고 갈 수 없겠나?”

응? 갑자기 왜 이러시지?

이제 와서 갑자기 마정석이나 필요한 게 생긴 건 아닐 테고.

“네, 뭐 그렇게 하시죠.”

하지만 굳이 안된다고 할 이유도 없었으니, 나는 흔쾌히 노인국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 고맙네. 내가 확인할 게 있어서 말이야.”

말을 마치기 무섭게, 노인국 씨의 발 앞에 검은색의 해골 두 구가 솟아났다.

스태프를 든 채 로브를 두르고 있는 해골 하나, 방패와 도끼를 들고 있는 커다란 해골 하나.

그런데……. 이전과는 뭔가가 다른 것 같다.

“어째 해골도 분위기가 달라졌네요.”

한유진 씨의 말에 나는 내가 잘못 느낀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전에 노인국 씨의 해골에서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 불러낸 해골은 뭐랄까……. 외모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 듬직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 자네들도 그렇게 느끼지? 이게 참 이상하다니까.”

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거, 당신 스킬이잖아요.

“사실 자네들이 흑암을 잡아준 뒤에 내 스킬이 대부분 없어지거나 약해질 줄 알았거든. 어쨌든 내 능력은 거의 다 흑암에게 받거나 계약의 대가로 강화된 거라서 말이야.”

설마……. 흑암의 마음이 변하면서 노인국 씨와 블랙 메이지 길드원들의 스킬에도 변화가 생긴 건가?

“그런데 처음에는 마력이고 뭐고 조금씩 약해지나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강해지는 것 같더라고. 상태창에서는 변화가 없지만 말이야. 게다가 다른 길드원들도 다 자기들 능력치가 오르거나 스킬이 강해진 것 같다고 하더군. 아예 능력치나 스킬 등급이 올라버린 녀석들도 있고.”

“정확히 언제부터죠?”

“그러니까……. 자네들이 흑암을 잡았다고 말한 다음 며칠 지나고 나서였나? 그리고 자네들이 우리 길드 찾아오기 직전에, 뭔가 느낌이 확 왔거든.”

말을 마친 노인국 씨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이자, 두 구의 해골이 저 멀리 보이는 멧돼지 형태의 커다란 몬스터에게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공을 취한 것은, 스켈레톤 메이지였다.

로브를 두른 해골이 지팡이를 흔들자, 시커먼 구체가 번개처럼 날아가 몬스터에게 적중했고,

- 꾸, 꾸에에에!

집채만 한 몸집을 가진 붉은 멧돼지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고꾸라져 움직이지 못했다.

“이거 봐, 이게 원래 이 정도로 센 녀석이 아니에요.”

이어서 쓰러진 녀석 주위에 있던 멧돼지들이 하나둘 검붉은 엄니를 앞세워 노인국 씨의 해골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노인국 씨의 몸에서 흐릿하게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더니, 지면에서 연기로 된 손이 나타나 멧돼지들의 발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 꾸에에엑!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제한당한 멧돼지들은 듣기 싫은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몸부림을 쳐댔다.

하지만 검은 손에 의해 발이 묶인 탓에 속도는 눈에 띄게 떨어져 있었고, 결국 스켈레톤 워리어와 메이지의 협공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하나하나 쓰러져 나갔다.

“이것도, 이게 이렇게 빠른 게 아니거든. 게다가 원래 A급 몬스터 정도 되면 속도를 느리게 만들 수는 있어도 이 정도로 발을 묶을 수는 없었는데 말이야.”

순식간에 십여 마리의 A급 몬스터를 해치운 노인국 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조금 전에 쓰려졌던 멧돼지들이 순식간에 그의 수하,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걸……. 그래, 부하가 됐다.

“네크로맨시 스킬도 마찬가지야. 원래 이렇게 빠르게 되는 게 아니거든, 이게. 나름대로 절차라는 게 필요해요. 그런데 갑자기 절차를 무시하고 막 되니까……. 아무래도 이상해서 말이지.”

이, 이럴 수가……. 달라진 건 성격뿐이 아니었구나.

실력까지 강해졌어.

진정한 New인국이야.

잠시 후, 대충 실험을 마친 노인국 씨가 우리를 바라보며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혹시……. 흑암이 살아있나?”

갑작스런 질문에, 자리에 있던 누구도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존재를 우리가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있을 전쟁이라든가, 동맹이라든가 하는 복잡한 문제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미안하다는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지.

“저, 그…….”

내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자, New인국 씨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생겨났다.

“그렇구먼.”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한마디에, 자리에는 다시 정적이 맴돌았다.

“대충 살아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네.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우리 스킬이 강해질 리가 없으니까. 사실 흑암이 죽어서 우리 길드가 다 붕괴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고.”

음, 제법 현실적인 이유네…….

“나야 뭐 벌 만큼 벌어놔서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지만, 우리 애들은 아니거든. 그래도 내가 길드장인데, 흑암에게 원한이 있다고 우리 애들 밥줄 끊기는 걸 좋아할 수는 없지.”

“미, 미안하다, 문어 할아범……. 하지만 너도 사정을 듣고 나면…….”

고미가 머뭇거리며 사과의 말을 건네자, 노인국 씨는 잠시 무언가 고민을 하다가 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그 녀석의 마음을 돌린 건가?”

“네?”

“아니, 아직 감정이 다 풀린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냥 궁금해서.”

“어떤… 게요?”

“우리 길드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했는지는 알고 있나?”

“아니요…….”

사실 줄곧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어 말을 꺼내지 못했던 문제였다.

“주로 잠을 못 자. 잠을 자면 온갖 악몽을 꾸거든. 아니, 악몽이라기보다, 아주 끔찍한 환상을 보게 되지. 어찌나 생생한지, 내가 잠을 자고 있다는 걸 잊어버릴 정도라네. 뭐, 다른 길드원들은 매일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매일이었지.”

…….

잠을 못 자게 하는 건,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방법은 아니지만, 고문 방법으로 쓰일 정도로 인간을 괴롭게 하는 문제다.

장기간 수면을 박탈당하면 몸이 망가지는 건 물론이고,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신적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노인국 씨가 그렇게 피폐했던 거구나.’

“게다가 자기가 원하는 게 있으면 깨어있는데도 환상을 보게 한다네. 뭐, 매번 그러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노인국 씨의 말을 듣는 내내, 내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고미를 지키고 싶다는 건 우리의 마음이고, 노인국 씨는 그걸로 인해 줄곧 자신을 괴롭힌 흑암에게 원한을 갚을 기회를 잃어버린 거니까.

“그런데 말이야…….”

우리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고 있자, 노인국 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은 반대야. 아주 좋은 꿈을 꿔. 잠을 잘 때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의 기억이 자꾸만 환상으로 나타나거든. 심지어 슬펐던 기억들까지 아주 좋은 기억으로 바꿔서 보여주더군. 그래서 어떤 날은 미웠던 사람들과도 좋았던 기억들이 있다는 게 떠오르고,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하루하루가 얼마나 행복한지, 매일 매일 실감하면서 살고 있다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노인국 씨의 입가에는 어느새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우리 딸애가 태어나던 날,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날, 아빠가 최고라면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모습, 나는 기억도 못 하고 있었던 행복한 날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지. 그 기분 아나? 딸이 커가는 걸 하루 하루 다시 보는 아빠의 기분이 어떤지 상상이 가나? 덕분에 요즘은 두근거려서 잠이 안 올 지경이야. 오늘은 또 어떤 행복한 순간들이 나를 찾아올지, 내가 기억도 못 하고 있던 소중한 기억들이 떠오를지, 너무나 기대가 되거든.”

노인국 씨의 마지막 말에, 얼어붙은 듯 멈춰있던 고미의 꼬리가 다시 살랑살랑 흔들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옛날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불쑥불쑥 화가 나지만, 대체 어떻게 했길래 흑암이 보여주던 환상이 이렇게 바뀌었나 싶어서 말이야.”

노인국 씨의 질문에, 나는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는 흑암이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사실도 몰랐고, 자기 나름대로 어설프나마 사과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사실은…….”

이후 나는 어렵게 어렵게 흑암의 사연과, 만수왕과의 전쟁에 대해 털어놓았다.

고미가 대균열의 수호자라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순진무구한 솜뭉치는 스스로 노인국 씨에게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이 고미라는 친구를 위해서 흑암을 살려주었고, 지금 그 녀석은 반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닥칠 큰 전쟁을 위해서는 블랙 메이지와 흑암의 힘이 필요하다. 뭐 이런 이야기구먼?”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노인국 씨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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