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6 호랑이 기운을 물리쳐라
물만두의 대가로 돌아온 ‘선물’은, 만수왕의 전쟁에 대비해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노인국을 만나 대전에 있는 던전에 다녀와라. 그곳에 만수왕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 있으니까.”
음, 이래서 영화에서 형사들이 범인을 취조할 때 국밥이라도 먹이면서 얘기를 하는 건가
“오오, 흑암!”
흑암이 우리를 돕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고미의 꼬리콥터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참 신기한 녀석이란 말이지. 간악한 녀석 어쩌고 하면서 열심히 쫓아다닐 때는 또 금세 풀어져서는.’
좋게 말하면 뒤끝이 없는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무르다.
물론 흑암의 사연을 듣고 나니 녀석을 죽여야 하느니 어쩌니 하는 생각이 좀 사라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니, 그렇게 보면 나나 고미나 큰 차이는 없구나.
‘하긴, 이런 성격 덕분에 친구들이 잔뜩 생긴 거니까, 이제 와서 마음이 약하다고 하는 것도 웃기지.’
소심한 사람의 이면에는 섬세함과 배려가 숨어있고, 대범하고 시원시원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약간의 덤벙거림이 숨겨져 있다.
순수해서 속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순수함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는 법이고.
원래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일장일단이 있는 법인데, 그 성격에서 비롯된 나쁜 결과는 버리고 좋은 결과만 취하겠다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
‘뭐, 정말 나쁜 녀석인지 아닌지는 숲속 친구들이랑 내가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알겠지.’
게다가 흑암이 우리 편이 되어주면 대균열을 지켜줄 동료도 늘어날 테고.
그렇게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의심 많은 두더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건 약초니까, 캐고 나서 토생원이나 수다르에게 약을 만들라고 하면 그 물건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음, 별로 의심하지는 않았는데.
역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는구나.
“후훗, 위대한 이 몸은 너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너를 의심하지 않으니 안심하거라!”
해맑은 고미의 반응에 흑암은 입술을 비죽 내밀며 걱정과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문제라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 나를 잡을 때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해놓고, 이리도 쉽게 나를 믿는 것이냐······.”
잠시 툴툴거리던 츤데레 두더지는 재료가 될 식물의 생김새와 냄새 등을 일러주었고, 수다르님과 토생원은 그 간단한 설명만 듣고도 흑암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확언했다.
“제 연구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구하지 않았던 물건이었는데, 참으로 잘 됐군요. 그것만 있다면 일시적이지만 공포 면역 효과를 낼 수 있는 포션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후, 가만히 토생원의 말을 듣고 있던 흑암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하며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흠흠, 그래서, 이번에는 어느 곳에 밭을 만들면 되겠느냐. 조금이라도 더 많은 포션을 만들려면 밭이 필요할 것 아니냐.”
흑암과의 대화를 마친 후, 우리는 노인국 씨를 만나기 위해 화원을 나섰다.
공포 면역 포션을 만들기 위한 재료도 구해야 했고, 용왕과 저스티스, 블랙 메이지의 연합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았으니까.
기왕 만나는 김에 그 문제에 대해서도 마무리를 짓는 편이 좋겠지.
“보다 보니 흑암도 나름대로 귀여운 맛이 있네요. 살짝 츤츤거리는게 매력이에요.”
한유진 씨가 피식 웃으며 입을 떼자, 제르보나 씨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봐도 이해가 안 가는 취향이군.”
“뭐, 그래도 툴툴대면서도 도와줄 건 다 도와주니 다행이네요. 이건 정말 귀중한 정보였습니다.”
전생의 원수에 대해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그렇게 말하는 이강혁 씨의 모습에, 이 사람도 참 대단하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뭐, 약간만 상황이 바뀌어도 딴 사람처럼 바뀐 사람을 한둘 본 게 아니니까요.」
고작 그 한마디로, 전생의 원한을 퉁칠 수 있다는 게, 그릇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면 저렇게는 못 했을 것 같은데.
“만수왕의 군대에게 한국의 헌터들이 그렇게 쉽게 무너졌던 이유도 사실 공포 스킬 때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공포 면역 능력을 줄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응 그걸 알고 있으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겁니까
“뭐야, 형, 그거 알면서 흑암이 말할 때까지 기다린 거야”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봉식이가 먼저 이의를 제기했다.
“그냥, 사실대로 말 하나 지켜본 거야. 내가 거기서 먼저 나서서 말을 해버리면, 그 녀석이 정말 마음이 바뀌었는지 아니었는지 확인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거기도 하고.”
음, 흑암을 용서하는 것과 믿는 건 별개라는 건가······.
이런 면에서는 또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구나.
사실 나도 흑암의 대답을 듣고 나서 이강혁 씨에게 크로스체크를 해볼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 순간에 저런 판단을 내리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선택한 이강혁 씨의 판단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수하 씨가 나에게 먼저 묻지 않은 것도 그런 의도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게다가 내 생각까지 정확히 읽고 있었군.
“내가 먼저 말을 꺼냈으면, 그런 약초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흑암이 마음을 돌린 건, 수하 씨의 답을 듣고 난 다음인 것 같으니까 말이야.”
이강혁 씨는 조금 감상에 젖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운명이란 참 묘한 것 같습니다. 그날 단칼에 흑암을 죽였다면, 이런 정보를 얻지는 못했겠죠. 그럼 결국 만수왕과의 전쟁에서 곰 선생님이 녀석을 상대하는 동안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이런 미래가 펼쳐질 걸 알고 흑암을 살려준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들만한 상황이기는 하지.
“그리고 흑암에게 얻은 정보가 있더라도, 토생원의 화원과 수다르님이 없었다면 포션을 대량생산하지 못해 똑같은 결과를 얻었겠지요.”
이강혁 씨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작은 선택들이 모여 미래를 만든다는 말이 새삼 실감이 났다.
지금 이 멤버가 아니었다면, 고미가 토생원과 흑암을 용서하고 그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곰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날, 제가 느꼈던 직감이 들어맞은 것 같군요. 저는 정말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모양입니다.”
이강혁 씨의 말에 신이 난 고미는 곧바로 꼬리를 빙글빙글 돌려대며 입을 열었다.
“후훗! 당연한 것 아니더냐! 진정으로 옳은 길을 선택한다면, 길은 저절로 열리는 법이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친 후, 숲속 친구들은 언제나처럼 두 마리의 드래곤에 나눠타고 노인국 씨를 만나러 갔다.
“허허허, 왜 번거롭게 직접 오고 그러나, 말만 해도 우리가 다 알아서 가져다줄 텐데.”
블랙 메이지의 빌딩 앞에 도착하자,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노인국 씨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 던전 가는 김에 길드 연합 이야기도 마무리할 겸, 겸사겸사 왔습니다.”
나의 대답을 들은 노인국 씨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관리팀에는 미리 연락을 해두었으니, 지금 가면 곧바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야.”
“자, 그럼 어서 타시죠. 차로 가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더 빠를 테니까요.”
한유진 씨가 빌딩 앞에서 블랙 메이지의 길드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제르보나와 이유찬 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오, 드래곤이다, 드래곤!”
“실물로 보는 거 처음이야!”
“엄청 커! 나도 타보고 싶다!”
“사진 찍어도 돼요!”
이 사람들이 정말······.
밝아진 건 좋은데, 너무 에너지가 넘치잖아.
“에이, 얼른 비켜 요놈들아!”
New인국 씨가 동네 꼬마들을 혼내는 아저씨처럼 손을 휘휘 저으며 외치자,
“아아, 길드장님도 정말 너무하시네.”
“우리 길드는 왜 용이 없는 겁니까!”
블랙 메이지의 길드원들이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제르보나 씨와 이유찬 씨에게서 멀어졌다.
“에잇, 놀이공원 갔다 오고 나서 너무 친해졌어! 이것들이 이제는 위아래도 없고!”
그러게요.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게 놀랍네요. 대체 몇 년 동안 어떻게 친해지지 않고 지냈는지 묻고 싶을 지경입니다.
[ 흠흠, 수하, 이 녀석들, 뭔가 이상하구나. ]
심지어 활력 넘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고미마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해댔다.
“나는 얼른 볼 일 마치고 올 테니까, 건물 리모델링이나 잘들 하고 있어!”
말을 마친 New인국 씨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등에 올라탔다.
‘이분도 드래곤에 타보고 싶었던 모양이군.’
노인국 씨의 뒤를 이어 숲속 친구들까지 모두 탑승을 마치자, 거대한 두 마리의 드래곤은 우아하게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잊혀진 왕의 평원
몬스터 등급 A ~ B
클리어 조건
평원의 맹수들을 뚫고 잊혀진 왕의 무덤을 찾아 왕가의 비밀을 밝혀내세요.
클리어 보상
왕가의 보검, 왕가의 축복이 담긴 두루마리(x5).
던전에 발을 들이자, 상태창에 곧바로 던전의 공략 조건과 보상 등이 주르륵 떠올랐다.
던전의 지형은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언덕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광활한 초원이었다.
형태는 개방형에, 등급은 A급.
하지만 삼대 길드의 길드장에 고미, 드래곤 세 마리까지 있으니, 마주치는 몬스터가 불쌍할 수준이지.
“가자.”
내가 무기를 꺼내 들고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노인국 씨가 웃으며 나를 막아섰다.
“찾는 게 약초 두 가지라고 했지 이렇게 넓은 곳을 무턱대고 돌아다니면 괜한 힘만 빠지니, 내가 정찰을······.”
말을 마친 노인국 씨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수백 마리에 달하는 검은 쥐 떼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정찰대가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우주 제일의 네비, 아니, 곰비게이션이 있으니까.
“훗, 저쪽이다, 수하.”
거만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까마득히 먼 곳을 가리키는 고미의 모습에 New인국 씨는 귀신에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이 고미라는 친구가 흑암을 물리쳐줬다고 했었지. 말을 하는 것도 놀라운데,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친구구만 그래.”
“후훗,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 위대한 이 몸의 능력은 아직 털끝만큼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말을 마친 고미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기이한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초원에 늘어서 있던 몬스터들이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오, 설마 던전에서 보여주었던 그 위압 스킬의 주인공이 자네였던 건가”
“후훗, 이제 이 몸의 위대함을 실감하겠느냐, 문어 할아범”
무, 문어······. 전부터 느낀 거지만, 탈모인들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 아닌가
쓸데없지만 궁금하다.
New인국 씨가 되면서 문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만큼 밝은 인간으로 거듭난 걸까
아니면, 고미가 흑암을 물리쳐줬으니 은인에게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뿐일까
‘한번 확인해 볼까’
노인국 씨가 기분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감각 강화 능력을 활용해 표정을 살피려는 순간,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전보다 풍성해지신 것 같은데.’
틀림없다. 전에는 이마 라인도 조금 더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살짝 원형 탈모가 진행 중이었는데······.
‘설마, 그 탈모, 스트레스성이었어’
“허허허, 이제 곧 문어라고 부를 수 없게 될걸세. 요즘 머리가 안 빠지거든.”
여, 역시······.
스트레스성 탈모였던 거구나.
“뭐, 뭣이! 그럼 더 이상 문어가 아닌 것이냐”
노인국 씨의 머리털이 풍성해진다는 소식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고미의 동공이 격렬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음, 자기가 붙인 별명이 그 사람의 특징을 잘 설명해줘야 한다는 것에 대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이, 이럴 수가······.”
“허허, 계속 문어라고 불러도 되네. 뭐 어떤가, 친근감 있고 좋지.”
음, 다행이다. 혹시 고미가 엄청난 실례를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 안 된다······! 문어가 아닌데 문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몸의 규칙에 어긋난단 말이다!”
······.
그럼 이강혁 씨는, S급이 됐는데도 여전히 허수아비라는 거냐.
“허허허, 그렇다고 내가 억지로 머리를 빠지게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렇게 N.G. 콤비가 답도 없는 만담을 나누는 사이, 곰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은 숲속 친구들은 첫 번째 약초를 찾는 데 성공했다.
“이게······. 정말 흑암이 말한 약초 맞아요?”
하지만 약초를 발견한 한유진 씨의 표정은 떨떠름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