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54화 (154/300)

EP.154 스타에게는 스토커가 붙는 법

며칠 만에 만난 흑암의 모습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외모는 그대로인데, 어딘지 모르게 착 가라앉아 있는 느낌.

“왔군.”

숲속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흑암은 밭을 갈던 손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봤다.

‘굉장하네.’

그의 앞에는 리모델링이 한창인 밭이 펼쳐져 있었다.

어지간한 중고등학교 운동장만 한 밭은 네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첫 번째 구역에서는 수박이니 딸기니 하는 과일들이 익어가고 있었고, 두 번째 밭에서는 상추와 깻잎을 비롯한 각종 쌈 야채를 기르고 있었다.

세 번째 구역에서는 처음 보는 종류의 약초와 꽃들이, 마지막 한 구역에는 아카시아와 생김새가 비슷한 꽃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 구역이 고미를 위한 양봉장인 것 같았다.

‘지, 진짜로 과일이랑 쌈 야채를 기르고 있었네.’

산신령과 연금술사, 흑마법사가 힘을 합쳐 만든 텃밭이라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농업계의 5차 산업 혁명?

“오오! 토생원! 저 나무에서 나오는 꿀들로 이 몸의 간식을 만드는 것이냐!?”

신이 난 고미가 꼬리콥터를 돌리며 묻자, 토생원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우며 답했다.

“네, 조금만 더 연구가 끝나면 곧 최상의 꿀을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는구나!”

고미와 토생원이 양봉 계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천천히 밭에 심은 작물들을 훑어보았다.

뭘 심는지는 둘째치고, 식물이라는 게 이렇게 빨리 자라는 게 아닐 텐데······.

“다른 곳에 있는 걸 옮겨심으신 건가요?”

흑암을 잡은 지는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야채는 그렇다 쳐도, 그 사이에 과일이랑 나무가 이 정도로 자란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던진 질문이었다.

“하하, 이것이 바로 제 화원의 특별한 점이죠. 어떤 식물이든 열 배는 빨리 자라고, 가장 싱싱하고 완벽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과일로 따지자면, 너무 익지도 않고 설익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한달까요. 물론 원한다면 설익은 상태로도 수확이나 보관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엄청난 화원에서 야유회나 캠핑가서 먹을 쌈 야채랑 과일을 기르고 있다는 거잖아.

이게 무슨······.

내가 이 엄청난 낭비(?)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는 사이, 토생원이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정도 넓이에 심어 놓은 독초나 약초들을 모두 뽑고 새 과일과 약초, 나무를 심으려면 한 달은 더 걸렸을 텐데, 흑암 덕분에 일이 빠르게 끝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흑암은 불만스러운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흥, 토끼와 수달이 흙을 만져봐야 얼마나 만져봤다고. 나는 두더지다. 이 정도는 당연하지.”

음, 여전히 까칠하시네.

분위기가 바뀐 김에 말도 예쁘게 한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이곳에는 왜 온 것이냐? 역시 나에게 복수를······.”

따콩!

“윽!”

“네 이놈!”

저럴 줄 알았다. 그러게 왜 자꾸 툴툴거려.

“쳇······. 어이가 없군. 드래곤도 한 방에 때려죽일 수 있다던 대균열의 수호자가 이렇게 마음이 약한 녀석이었다니······.”

입으로는 끊임없이 볼멘소리를 해댔지만, 고미에게 얻어맞은 흑암의 표정은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나의 텃밭에 온 이유가 무엇이냐?”

아니, 이분이······.

여기가 왜 당신 텃밭이에요. 토생원 땅이지.

밭 좀 갈았다고 땅을 날로 먹으려고 하시네.

“포악한 애꾸눈 괭이 놈에 관해 묻고 싶어서 왔느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고미는 곧바로 동이님의 조언에 따라 만수왕에 대한 정보를 캐물었고, 흑암은 잠시 망설이다 퉁명스러운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고작 그것 뿐이냐?”

“허허, 저희가 원하는 것은 만수왕에 대한 정보지만, 더 말해주고 싶은 게 있으시다면 말해주셔도 좋습니다.”

수다르 님이 넌지시 옆구리를 찌르자, 자그마한 눈알을 굴려대던 흑암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순진하기는. 그렇다고 내가 다른 놈들이 모두 고미 너를 노리고 있다고 말이라도 해줄 것 같았느냐?”

해주고 있는 것 같은데······.

“흥, 네 녀석은 아주 오래전부터 드래곤들의 눈 밖에 나 있었다. 그리고 황금의 군주는 이번에 반드시 널 제거할 생각이지. 놈들이 전 우주의 지배자가 되려면 반드시 너를 죽여야 하니까.”

이거, 아무리 들어도 경고인 것 같은데.

말투는 좀 까칠하지만, 분명 ‘그러니까 조심하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만수왕 역시 너에게 복수하려고 이를 갈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둘과 손을 잡고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했지.”

게다가 표현이 상당히 미묘하다.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했다’니, 이제는 아니라는 소리인가.

“하지만 그 둘의 목적은 나와는 달랐다. 나는 순수하게 인간들을 멸망시키고 싶어 했지만, 그 둘은 인간보다는 너에게 관심이 많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셋일지도 모르고.”

잠깐, 셋?

당신하고 손을 잡은 건 둘이라며? 그런데 왜 셋이야.

“셋? 무신도 너희와 손을 잡았다는 건가?”

내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이강혁 씨가 인상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현재까지 알려진 초월자는 무신, 백색화원의 주인, 심연을 기는 자, 황금의 군주, 만수왕, 흑암의 지배자. 모두 여섯이었다.

그중 둘이 우리 편에 붙어있고, 하나는 포로 상태이니, 나머지 하나는 자연스럽게 무신이 되겠지.

“하하하! 그 미친놈이 누군가와 동맹 같은 것을 맺을 리가 없지 않느냐?”

하지만 무신이라는 말에 흑암의 입에서 곧장 광기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놈은 만수왕과 나는 고사하고 드래곤마저 하찮게 여기는 오만방자한 놈이다. 인간 주제에 마치 우주의 정점에 선 것처럼 모든 걸 깔보는 녀석이, 누구와 손을 잡겠느냐?”

음, 무신은 인간이구나.

뜬금없지만, 조금 반가운 마음마저 든다.

이름이 ‘무신’이라면 보통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지만, 지금까지 만난 친구들이 죄다······.

어쨌든, 인간 중에도 초월자가 있긴 있구나.

그래, 하나 정도는 인간이어야 밸런스가 맞지.

“그럼 그 나머지 하나가 누군데요?”

나의 질문에 흑암은 한쪽 입꼬리를 뒤틀며 말을 이어나갔다.

“모른다. 잘나신 용과 호랑이께서는 더러운 땅속에서 벌레나 파먹고 사는 두더지 따위에게 모든 걸 알려주시지는 않으니까.”

음, 이 동맹······. 꽤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군.

목적이 일치해서 함께 가기는 해도, 신뢰나 동료의식, 우정같은 건 전혀 없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이런 건가?

“하지만 그 둘이 누군가와 손을 잡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고미, 너를 죽이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네가 없었다면 그 셋이 손을 잡을 일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르지.”

표정으로 보나, 말투로 보나, 흑암은 자신의 추측에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 싶었다.

“왜 그렇게 확신을 하는 거죠?”

근거가 무엇이냐는 나의 질문에 흑암은 입술을 살짝 내밀며 삼돌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은 사자와 늑대, 개를 합쳐 만든 키메라다. 하지만 본래 내 능력으로는 만들 수 없었던 아이, 아니, 물건이지. 만수왕의 조언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완성할 수 있었다.”

거참 성격 별나시네.

‘아이’라고 했다가, 굳이 ‘물건’이라고 정정할 건 또 뭐람······.

하지만 자신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는 듯, 흑암과 눈이 마주친 삼돌이는 기분이 좋은 듯 두 개의 꼬리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아마 말은 까칠하게 해도, 제법 잘 챙겨줬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겠지.

“하지만 만수왕은 싸움밖에 모르는 얼간이다. 그 돌대가리가 이런 걸 만들 기술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순간 황금의 군주가 만수왕을 통해 키메라 제작법을 전해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황금의 군주는 마력 생물을 만드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만수왕이 황금에게 조언을 받아 이 녀석의 완성을 도와주었을 리는 없다는 소리다.”

이어지는 흑암의 말은 곧바로 내 추측을 부정했다.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토생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확실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연금술만은 천하제일이라 자부했던 저조차 케르베로스 같은 키메라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요.”

음, 그러고 보니, 사랑이들은 케르베로스를 ‘참고’해서 만들었다고 했었지.

확실히 네크로맨시와 흑마법이 전공인 흑암이 토생원을 능가하는 마력 생물을 만들어냈다는 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기는 하다.

“그렇겠지.”

요약하자면, 그 제3의 존재는 토생원 이상의 연금술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수왕이나 황금의 군주와 어깨를 나란히 할 힘까지 갖추고 있다는 건가······.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군.

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흑암의 시선이 고미에게 향했다.

“만수왕은 이미 너를 상대하기 위해 수만에 달하는 군대를 준비해둔 상태다. 너 혼자서 수만에 달하는 괴수들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흥, 아무리 많은 적들이 몰려와도, 위대한 이 몸의 상대가 될 수는 없느니라! 게다가 이 몸은 더이상 혼자가 아니다!”

고미의 반박에 흑암은 조롱 섞인 표정으로 우리를 훑어보았다.

“이런 놈들에게 만수왕의 군대에 맞설 용기가 있겠느냐? 네 녀석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고 달아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내용만 듣고 보면, 상당히 기분이 나쁜 발언.

하지만 어째 흑암의 그 말이, 크게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녀석의 눈빛은, 마치 우리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내 착각이 아니라면, 지금 흑암은 우리가 고미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어차피 황금의 군주하고는 한 판 하려고 했으니까 잘됐네요.”

가장 먼저 답을 내놓은 것은, 한유진 씨였다.

“그렇군요. 이번 기회에 드래곤 로드를 교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다음으로 제르보나가 평소와 똑같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기회에 저도 만수왕에게 밀린 빚을 좀 갚아야겠군요.”

“가족한테 손을 대겠다는데 지켜볼 수는 없지.”

이어서 이강혁 씨와 봉식이가 기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허허, 의원으로서 사람들이 죽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지요. 이 수다르, 힘이 닿는 데까지 고미 님과 친구분들을 도와보겠습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호랑이와 늑대 같은 맹수들에게 시달려온 원한을 갚아주겠습니다.”

“삐이이이이!”

그렇게 숲속 친구들 중 누구도 발을 빼거나 고미에게만 의지하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흑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감각 강화가 없다면 보지 못했을 아주 작은 미소.

하지만 녀석은, 분명히 웃었다.

순간 뭔가 흉계를 꾸미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흑암의 말에 그 생각은 깨끗하게 날아가 버렸다.

“어쨌든, 그놈들은 아주 오랫동안 너를 관찰해 왔다. 나 역시 네 행적을 알아내자마자 스켈레톤 나이트를 이용해 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아니면 더 약해졌는지, 약점이 있지는 않을지 파악해 보려 했지.”

스켈레톤 나이트라면······. 꿀폰 사러 갔을 때 게이트를 연 게 이 녀석이었단 말이야?

‘아오오오!’

어쩐지 핸드폰 하나 사러 가는 것 치고는 장애물이 너무 거창하다 했더니!

“만수왕도, 황금의 군주도, 그리고 그 세 번째도. 너희들이 던전에 들어갈 때 자신들의 권속을 그 안에 잠입시키거나, 때로는 직접 게이트를 열어 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왔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얻었지.”

“흥, 위대한 이 몸에게는 당할 수 없다는 결론이겠지.”

고미가 그렇게 말하며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자, 흑암은 못 당하겠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거다. 심지어 너는 이 친구들인지 뭔지와 어울리며 더 강해진 것 같더군. 나를 상대할 때 사용했던 그 이상한 기술, 틀림없이 최근에 얻은 겠이겠지?”

자신의 ‘빔’을 ‘이상한 기술’이라고 칭하자, 분노한 고미의 꼬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상한 기술이라니! 감히 이 몸의 웅왕빔을!”

그렇지, 무려 빔인데, 이상한 기술이라니. 이런 꿈도 희망도 없는 놈 같으니.

“흥, 빔이라니……. 정말 유치한 녀석이군. 어찌 됐든, 내 생각이 맞다면, 네가 강해질수록 그 녀석도 더욱 강해질 거다.”

그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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