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53화 (153/300)

EP.153 갓-고미님의 든든한 조력자

고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우리의 뒤쪽에 한유진 씨, 보다 정확히는,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알틴’이었다.

“알틴?”

언제나처럼 ‘삐이잇!’하고 울어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말문이 트인 알틴의 모습에, 한유진 씨를 비롯한 모두가 무언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여전히 귀여운 아기 드래곤, 알틴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왼쪽 눈은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고, 오른쪽 눈에서는 눈부신 황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틀림없이······.

[ 도, 동이! ]

고미의 오랜 벗, 동이님의 그것이었다.

[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설마 현세에 넘어올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회복한 것이냐? ]

[ 허허, 아쉽게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고미님과 수하님 덕분에 알틴과의 연결이 더욱 강화되어 이렇게 목소리로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 도, 동이······. 보고 싶구나. ]

동이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미의 커다란 눈망울이 또다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제야 숲속 친구들은 ‘영혼의 다리’가 무슨 스킬인지를 깨달았다.

‘알틴님과 동이님을 연결해주는 스킬이 이거였구나.’

하지만 제르보나 씨의 말에 따르면, 그건 스킬도 마법도 아니라고 했다.

굳이 따지자면, 동이님의 뿔은 알틴을 구성하는 근간이고, 그래서 멀리 떨어져도 공명이 가능한 것뿐이라고.

그리고는 ‘영혼’이나 ‘다리’에 해당하는 드래곤 어(語)가 따로 있지만, 그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이름으로 번역이 되었다며 볼멘소리를 해댔다.

영화로 치자면, 'Mother xxxx'하는 욕설이 '어머니'로 번역되었다는 수준이라나 뭐라나.

‘음, 뭔가 대학원 때 번역 문제로 열변을 토하던 교수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물론 내가 보기에는 ‘영혼의 다리’가 딱 맞는 스킬 명이었지만, 정작 드래곤인 이유찬 씨나 제르보나 씨가 아니라고 입을 모아 말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설마 영혼의 다리가 뭔지 한 번에 못 알아봐서 이러시는 건 아니겠지······.’

어찌 됐든, 마력으로 따지나, 육체의 강도로 따지나, 알틴의 힘은 제르보나와 이유찬 씨에게 미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성체, 그것도 드래곤 중에서도 꽤 뛰어난 전사와 마법사고, 알틴은 아직 아기니까.

하지만 알틴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바로 게이트를 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동이님의 이공간으로 가는 게이트는 오로지 알틴만이 열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사정이 있을 때도 알틴의 마력이 부족하면 동이님을 만나러 가지 못했던 거고.

[ 알틴의 눈을 통해 그간 있었던 일은 조금이나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

[ 아니다, 동이! 네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면 이 몸은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느니라! 게다가 삼룡 어멈과 네 부하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

오랜만에 동이님과 대화를 나누는 고미의 표정은, 그 어떤 놀이기구를 탈 때보다도 신나 보였다.

[ 수, 수하! 삼룡 어멈! 이, 이 유성 특급이라는 녀석은 나중으로 미루자! 어서 밖으로! ]

잔뜩 들뜬 고미는 심지어 놀이기구를 타는 것마저 미루고 어서 밖으로 나가자고 보챘고, 우리는 그대로 지하를 벗어났다.

가까운 벤치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자, 고미는 짤막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알틴, 아니, 동이님과 밀린 대화를 나누었다.

[ 그나저나, 흑암을 잡으셨더군요. 역시 고미님이십니다. ]

[ 후훗, 모두 수하와 네 부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느니라! ]

[ 허허허, 아닙니다. 고미님의 돌봄이 아니었다면, 저의 권속들도 이렇게 빨리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미님과 함께 하며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은 것 같더군요. ]

오랜만에 시작된 대화에 신이 난 두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쪽은 외로운 대균열의 수호자, 한쪽은 동족들에게 버림받은 이형의 드래곤.

고미의 정체를 알고 나니, 두 사람의 관계가 왜 그렇게 각별했는지 조금 더 이해가 갔다.

똑같이 외로운 두 사람이니, 서로가 더 각별하게 느껴졌겠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대충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알틴의 마력이 충분할 때는 동이님이 알틴의 눈을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현세의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게이트를 열거나 알틴을 통해 한유진 씨와 대화를 나누려면 갖춰줘야 하는 조건이 한두 개가 아닌 듯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흑암과의 일전을 치를 때나 토생원을 잡으러 갔을 때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셨을 테니까.

‘동이님의 뿔로 만들어진 존재라더니······. 그런 게 가능했구나.’

그렇게 몇 분이나 대화를 나누었을까, 동이님이 불쑥 심각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 고미님, 만수왕이 고미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는 와중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워낙 시급한 일이라······. 죄송합니다. ]

[ 흥! 괜찮다! 그놈이 이제 나머지 한쪽 눈마저 잃고 싶은 모양이구나! ]

동이님의 이야기를 들은 고미의 눈에는 곧바로 살기가 깃들었다.

무, 무섭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만수왕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고미의 표정은 딴사람, 아니, 다른 곰처럼 변한다.

게다가 대웅전의 벽화도 만수왕과의 전쟁을 묘사한 거였지······.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까지 만수왕을 싫어하는 걸까.

“만수왕?”

만수왕의 이름이 나오자, 전생에 녀석의 사도였던 봉식이도 관심을 보였다.

“확실히 심각한 문제군요. 만수왕은 흑암과 다릅니다. 아마도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니라, 직접 현세를 침공하려 들 겁니다.”

이어서 이강혁 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만수왕의 성격에 대해 말해주었다.

“전생에도 흑암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흑암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현세에 강림한 것이 바로 만수왕이었으니까요.”

이전에 숲속 친구들과의 회의에서 이강혁 씨가 해주었던 말에 따르면, 만수왕의 힘은 삼룡이 패밀리 전원을 혼자서 몰살시킬 정도로 강했다.

[ 아마도 만수왕이 현세를 침공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흑암을 심문해 보십시오. 그자는 틀림없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

[ 흐음······. 알겠느니라. ]

동이님의 말에 고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흑암이 얌전하게 구는 이유가······. 만수왕이 자신을 풀어줄 거라고 믿는 건 아닐까요?”

조금 삭막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수다르님과 토생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나란히 고개를 저었다.

[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무언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고미님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표정은 아니었습니다. ]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수다르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안심해도 되겠지.’

늘 인자하고 사람(?)이 좋기는 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르고 고미의 안위에 대해 나 못지않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이 바로 수다르님이니까.

[ 그럼 고미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저는 하루라도 빨리 마력을 회복해 고미님을 도우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

그 말을 끝으로 알틴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고,

“삐이잇!”

평소처럼 말 대신 아기 같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흠, 분위기 이상해졌네.”

잠시 어색한 정적이 이어지자, 봉식이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 설마 놀이공원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고미의 표정은 더없이 해맑았다.

[ 후훗,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더냐? 동이가 도우러 온다고 하질 않느냐. ]

그간 언제나 자신이 모든 걸 해결한다고 말하던 것과는 달리, 동이님이 도우러 온다는 말에 고미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실제로도 마법사들이 가장 계약을 맺고 싶어 하는 초월자이니, 그 힘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신의 오랜 친구가 힘을 보태준다고 말해준 것이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 게다가 수다르도 흑암이 더 이상 만수왕을 돕지 않는다고 말하였느니라. ]

그건 그렇지······.

[ 걱정 말거라, 위대한 이 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데, 동이에 그 작은 두더지 녀석까지 더해진다면, 만수왕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느니라. 거기에 문어 할아범도 우리의 친구가 되었는데, 너희는 너무 걱정이 많구나. ]

예리하다······.

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예리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걸까.

가끔 똑똑한 건지 맹한 건지 구분이 안 간단 말이야.

“그건 그렇군요. 게다가 적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 해도 흑암이 우리 편에 서주고, 블랙 메이지까지 한편이 되어준다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심지어 심각하고 걱정 많기로는 숲속 친구 중 제일인 이강혁 씨마저 고미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후훗, 그러니 우리는 어서 그 유성 특급이라는 녀석을 즐기러 가자꾸나! ]

내용과는 무관하게 오랜만에 동이님과 대화를 나눈 탓인지, 놀이기구로 향하는 고미의 발걸음은 전에 없이 가벼웠다.

* * *

이후 우리는 예정대로 ‘유성특급’에 몸을 실었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릴’이라는 감각을 체험할 수 있었다.

형형색색의 조명이 켜져 있는 어두운 터널을 돌파하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몸의 털이 쭈뼛쭈뼛 곤두섰지만, 의외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오, 이거 재밌네.”

덕분에 탑승을 마친 뒤에는, 과거의 나였다면 절대 나오지 않을 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재미? 재미이? 김수하가 놀이기구를 타고 재미있다고?”

나의 발언에 봉식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그렇게 되물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 후후후, 위대한 이 몸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도 드디어 그것을 깨달은 모양이구나! ]

으음, 그런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이 문제는 패스.

결국, 우리는 여세를 몰아 유성 특급에 이어 자이로 스윙은 물론이고 아틀란틱, 롤러코스터까지 완전히 정복해버렸고,

< 스킬 등급이 상승합니다. >

< 스킬 등급이 상승합니다. >

< 스킬 등급이 상승합니다. >

시련을 극복했네, 어쩌네 하는 뻔뻔한 멘트와 함께 ‘웅혼한 기상’의 스킬 등급은 연달아 세 번을 상승해 C까지 치솟았다.

‘불안한데.’

하지만 스킬 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기쁘기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보상을 주는 건, 내가 아니라 늘 고미를 위해서다.

그러니까, ‘웅혼한 기상’의 등급 상승 역시 고미를 위한 일이라고 봐야지.

‘왜 하필 만수왕 얘기가 나왔을 때 이렇게 보상을 마구 뿌려대는 건데요.’

앞으로 꽤 위험한 일이 닥칠 테니까, 준비 단단히 하라는 신호로밖에 안 받아들여진다고요.

어쨌든, 고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놀이기구는 바로 ‘회전목마’였다.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꽤 의외의 선택이었지만······.

[ 수하! 이 몸과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 ]

그 말을 듣자마자, 왜 마지막을 회전목마로 선택했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고미가 좋아하는 ‘스릴 있는’ 놀이기구들은 모두 너무 빠르거나, 위험하니까.

‘확실히 사진을 찍기에는 적합하지 않지.’

아마도 녀석에게는, 스릴 있는 놀이기구보다, 친구들과 이런 곳에 왔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놀이공원을 찾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 꿀폰에 회전목마를 타는 친구들의 모습을 찍어 저장했고, 고미는 집으로 가는 내내 자신의 꿀폰을 손에 꼭 쥐고 수십 번, 수백 번이나 반복해서 그것을 바라봤다.

* * *

놀이공원에 다녀온 뒤, 우리는 해가 떨어질 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으니, 밤까지 잠을 자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는 잠깐 일어나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다음 날 아침까지 또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우리는 동이님의 조언에 따라 흑암을 만나러 갔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만수왕도, 황금의 군주도, 흑암 본인도 아닌, ‘고미’에 대한 이야기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