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44화 (144/300)

EP.144 가자, 꿈과 희망의 나라로!

“으응, 얼른 말해봐요. 괜찮아, 괜찮아.”

같은 말 두 번 하기, 음정 넣기, 추임새 넣기까지, 완벽한 아저씨 말투다.

뭐 다웅이 못지않은 다크서클을 자랑하는 좀비 아저씨보다는 훨씬 밝아서 보기 좋기는 한데······.

정도가 지나치잖아, 정도가.

“그 전에, 먼저 밝힐 게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폴리모프를 유지한 상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실 제 정체는 최진웅이 아닙니다. 지금 이건 폴리모프로 모습을 바꾼 것뿐이고요. 속여서 죄송합니다.”

New인국 씨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이상, 섣불리 얼굴을 드러낼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용서해주겠다고 하면······.

“아이, 뭐, 그게 대수라고. 그나저나 재주도 좋구먼. 폴리모프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꽤 진귀한 능력인데, 대단하구만, 껄껄껄!”

······.

저기요? 이게 그렇게 쉽게 넘어가도 되는 문제입니까.

호방하다 못해 약간 모자란 사람은 아닌가 의심스러운 반응에 이유찬 씨와 한유진 씨는 또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최진웅 씨, 당신 덕분에 나도 다시 즐겁게 살 수 있게 됐고, 우리 길드원들도 다들 너무 즐거워해요. 이런 일이 우리 길드 생기고 처음이야. 세상에, 길드원들이 밝은 날에 산책을 하러 다닌다니까? 이 바닥이 까딱하면 던전에서 칼 맞는 바닥인데, 신분을 감췄을 때는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괜찮아요, 괜찮아.”

“그렇다고는 해도······.”

“목숨 걸고 초월자와 싸운 사람이 정체를 감출 때는 뭔가 이유가 있었겠지. 앞으로도 원래 얼굴은 안 드러내도 돼요. 뭐,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고. 그거는 그, 최진웅 씨 편한 대로 하면 돼요.”

New인국이라고는 해도, 눈치 빠른 건 여전하구나.

좋은 점만 남겨두고, 안 좋은 점은 사라진 완벽한 업그레이드 인국인가.

“아닙니다. 아직 외부에 얼굴을 밝힐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노인국 씨한테는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제 본명은 김수하입니다.”

내가 본모습인 ‘김수하’로 돌아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노인국 씨는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껄껄, 이렇게 안 해도 되는데, 참, 사람이 바르구만. 혹시 여자친구 있나? 없으면 우리 딸은 어떤가? 내 딸이지만,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

“네, 네?”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나의 표정에 노인국 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농담일세. 내 딸 또래인 것 같아서, 인물도 훤하고, 인품도 훌륭하고, 유능하고, 그래서 농담을 해본 거야.”

음······. 소개팅 드립에 약간의 푼수끼, 존댓말과 반말을 묘하게 섞어 쓰는 것까지, 정말 굉장한 아재 캐릭터가 하나 나타난 것 같군.

“흠흠, 노인국 씨,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한유진 씨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불쑥 입을 열자, New인국 씨가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야, 내 정신 좀 봐. 잠깐만 기다려요. 생각해 보니까 커피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최진웅 씨 진짜 얼굴 보면 좀 곤란하겠네.”

그리고는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달려가’ 직접 커피를 받아 사무실 안으로 돌아왔다.

“자자, 마시면서 얘기들 하자고. 이게 또 우리 김 비서가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있어서, 커피를 아주 제대로 하거든.”

“음, 그렇네요. 확실히 향이 좋습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이강혁 씨는 줄곧 웃으며 커피 향을 음미했다.

“첫 번째는 좀 민감한 사안이라······. 길드 운영과 관련된 문제거든요.”

나는 노인국 씨가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곧바로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사안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보시면 알겠지만, 지금 용왕이랑 저스티스는 동맹 상태예요. 그동안은 비밀로 해왔지만······.”

“그거는 이미 알고 있는 사안이야. 그게 아니면 이강혁 씨랑 한유진 씨가 같이 다닐 이유가 없지. 지금까지 비밀로 했던 건, 그쪽이 손을 잡으면 우리랑 무신도 동맹을 맺고 세력다툼을 할까 봐 그랬던 것 아닌가?”

역시,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르구나.

“대충 상황 돌아가는 거 보고,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 이제 우리는 두 길드의 산하 길드로 들어가는 건가?”

그런데, 조금 앞서 나가신다.

이야기가 시원시원하게 진행돼서 좋기는 하지만, 우리 목적은 세를 불리는 게 아니다. 그냥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거지.

우리는 고미와 함께 대균열을 지켜줄 친구를 구하는 거지, 강제 노역을 시키려는 건 아니니까.

“아니요, 그냥 길드는 그대로 유지해주시면 돼요. 노인국 씨 밑에 있는 분들 입장도 있는데, 그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할 수는 없죠. 다만 앞으로 던전이나 정보도 공유하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같이 이야기도 하고······.”

“껄껄! 아니, 그럼 우리가 손해 볼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어렵게 말을 꺼내고 그러나. 좋네, 당장 진행하지. 세부적인 사항은 차차 조율해 나가세. 뭐, 우리가 손해를 좀 보더라도 상관없으니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게.”

너무 순탄해, 뭐가 이렇게 진행이 빨라.

“어······. 네, 감사합니다.”

“자, 그럼 두 번째는 뭔가?”

감사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이어지는 질문에 오히려 내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원래는 첫 단계부터 꽤 일이 막힐 거로 생각했는데······.

“어, 그, 한유진 씨 말에 따르면 놀이공원을 빌리려면 노인국 씨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응? 놀이공원을 빌린다고? 갑자기 왜? 설마 꼬시고 싶은 여자라도 있는 겐가?”

······.

New인국 씨는 김태평 사장님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하군.

“껄껄, 하긴, 젊은 아가씨가 남자친구가 놀이공원 전세 내서 고백하면 안 넘어 갈래야 안 넘어갈 수가 없지. 아주 로맨틱한 친구고만. 나도 젊었을 때는 말이야······.”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따라갈 수가 없다. 김태평 사장님의 드립과 급발진으로 단련된 나로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하이 텐션.

나는 설명을 하는 대신, 고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살곰살곰으로 숨어있던 고미가 짐짓 위엄있는 표정을 지으며 뒷짐을 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오, 이 곰돌이도 동료인가? 은신이 가능한 곰돌이라니, 동료들도 정말 개성이 넘치는구만.”

뭐야, 안 놀라?! 이분 대체 뭐지!?

“흐, 흐흠. 사실은 이 몸 때문이니라.”

“응?”

하지만 고미가 입을 떼는 순간, 아무리 새로워진 New인국 씨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뭐지? 말을 하네?”

“사실 흑암의 지배자를 물리쳐 준 게 그 곰돌이예요. 이름은······.”

“후훗, 이 몸의 이름은 바로 고미니라.”

거만하게 자신을 올려다, 아니, 내려다보는 고미의 모습에 노인국 씨는 넋이 나간 듯 말을 잇지 못했고,

“후후후, 네 녀석 역시 이 몸의 위대함을 알아보는 것이구나. 하긴, 이 몸을 처음 만난다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느니라.”

신이 난 고미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신의 위대함을 알아보는(?) 인간의 반응을 한껏 즐기며 말을 이어나갔다.

“문어 할아범을 괴롭히던 흑암은 이 몸이 친구들과 함께 혼쭐을 내주었느니라. 대가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지만, 이 몸이 놀이공원이라는 곳에 가고 싶은데, 네가 그곳에 가게 해줄 수 있다고 하기에 직접 와 보았다. 본래 부탁을 할 때는 직접 모습을 보이는 게 예의가 아니더냐?”

“어허허······. 나름대로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노인국 씨는 천천히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고미가 한 말이 진짜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하긴, 갑자기 슈퍼 곰돌이가 나타나서 이런 말을 하면 누구라도 이런 반응이겠지.’

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농담이나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노인국 씨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놀이공원 전세라······. 어렵지 않지. 일단 연락을 해보겠네.”

“우, 우웃! 정말이더냐?”

노인국 씨가 핸드폰을 꺼내 들자, 고미의 꼬리가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에는 안전 수칙이 있고, 키로 보나, 종(種)으로 보나, 고미는 놀이기구를 탈 수 없다.

물론 고미의 신체 능력이면 안전벨트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그걸 직원들한테 납득 시키기가 어렵다는 거지.

그래서 한유진 씨와 내가 생각한 방법이 바로 ‘놀이공원 전세’였다.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려버리고, 미리 양해를 구해두면 고미도 놀이기구를 탈 수 있을 거라는 게 우리의 계산이었다.

「 그런데 왜 노인국 씨에요? 이런 문제는 한유진 씨 전문 아니에요? 」

「 아, 기업들하고 관계는 저보다 노인국이 훨씬 낫거든요. 어차피 놀이공원은 다 대기업 소유인데, 다이렉트로 통화해서 곧바로 날짜 잡으려면 노인국이 나아요. 」

「 왜요? 」

「 점술이요. 업계 뒷소문이기는 한데,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요한 투자나 프로젝트 있을 때 노인국한테 찾아가서 점을 본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

······.

말하자면, 용한 무당보다는 점술이라는 확실한 이능을 가지고 있는 헌터 쪽이 믿음이 간다는 소리구나.

가끔 기업 총수들이 대선 결과 같은 걸 알고 싶어서 용한 무당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참······.

뭐, 어찌 됐든, 내 입장에서는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고미가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 하고, 오랜 시간 대균열을 지켜온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이것도 갑질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깨부순 히어로에게 놀이공원 전세 정도는 선물해 줄 수 있는 거잖아?

그렇게 몇 번의 통화 끝에, 노인국 씨가 환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냈다.

“우우웃!”

그 사인을 본 고미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노인국 씨의 사무실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우하하! 문어 할아범, 최고다! 어서, 어서 그 놀이공원이라는 곳을 가보고 싶구나!”

기뻐하는 고미의 모습을 보니, 나 역시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

그나저나, 대기업 총수들이 점 보러 노인국 씨를 찾아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이렇게 다이렉트로 통화해서 곧바로 대여가 가능한 걸 보면······.

“자세한 사항은 조금 더 조율을 해보아야겠지만, 날짜가 정해지는 대로 알려주겠네. 늦어도 이삼일 내로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 걱정 말고 기다리게.”

기뻐하는 고미의 모습을 보는 노인국 씨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이지만, 지긋지긋한 흑암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준 히어로가 이렇게 귀엽기까지 하니, 아빠 미소가 나오는 게 당연하지.

“자, 그럼 세 번째 조건은 뭔가?”

일사천리로 두 개의 조건을 들어준 노인국 씨가 곧바로 세 번째 조건에 관해 물었다.

“아,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우리는 세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굳이 지금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조금 더 신뢰가 쌓이고 나면 말해야 할 문제니까.

대균열을 지키는 동료가 되어달라는 말 같은 걸 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흐음······. 그렇게 말하니 괜히 더 궁금하군그래. 알겠네. 일단 동맹 문제에 대해서는 천천히 조율을 해나가도록 하지.”

“아, 그리고, 혹시 놀이공원에 블랙 메이지 길드원들이나 가족분들도 와주실 수 있나요? 절대 강요는 아니고요······. 저희끼리 놀기에는 너무 크잖아요.”

나의 질문에 노인국 씨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사실 우리 길드는······. 좀, 그······. 어두웠거든. 길드원들끼리도 거의 얼굴 마주치는 일 없고, 단합대회 같은 건 꿈도 못 꿔서······. 이번 기회에 단합대회를 하는 것도 좋겠군.”

“후훗, 좋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물건은 클수록 좋고,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고미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제안이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마침내 ‘약속의 그 날’이 왔다.

[ 우우웃······. 수하! 아직이냐, 아직이란 말이냐! 이 몸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

오늘 놀이공원의 입구에는, 고미와 숲속 친구들을 필두로 4대 길드 중 세 곳의 길드원들과 그 가족들이 이 성대한 파티를 즐기기 위해 눈을 빛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