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1 흑암의 이야기
“이, 이놈들! 나를 왜 살려둔 것이냐?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나는 절대로······.”
숲속 친구들과 눈이 마주치자, 흑암이 또다시 콩알만 한 눈을 부릅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이 녀석은 더이상 초월자도, 두려운 뭣도 아니었다.
그저 고미의 놀이동산 티켓이자, 워라벨 라이프를 위해 교대근무를 서줄 신병에 불과할 뿐.
- 꼬르르륵······.
바로 그때, 고미의 위장이 또다시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오늘 싸움은 꽤 격렬했으니, 열량 소모도 상당했겠지.
대체 이런 먹보가 어떻게 쫄쫄 굶으면서 살았을까?
일단 애 밥부터 먹여야겠다.
문제는 흑암을 여기에 혼자 버려두고 밥을 먹으러 가기는 좀 어렵다는 건데······.
‘음······. 한유진 씨 집으로 배달시켜서 게이트 안에서 먹어야 하나.’
고미의 배가 보낸 식사 명령에 숲속 친구들 역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뭐, 이제 막 큰 싸움을 끝마쳤으니, 다들 배가 고프겠지.
그렇게 메뉴를 뭐로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이, 이 악랄한 놈들! 설마 나를 잡아먹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냐?”
······.
대체 이 두더지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걸까.
먹긴 뭘 먹어.
물론, 이곳이 동물의 왕국이라면 넌 고미의 한 끼 간식이겠지만······.
“제가 요리를 할까요?”
이유찬 씨가 어이가 없다는 듯 흑암을 한번 훑어보며 말했다.
으음, 이유찬 씨, 말하는 타이밍이나 시선 처리가 좀 오해의 소지가 있잖아요.
왜 그걸 쟤를 보면서 말해요.
“이, 이 악랄한 놈들!”
역시나, 자신이 고미의 한 끼 간식이 될 거라고 착각한 흑암의 목소리가 공포로 가느다랗게 떨렸다.
‘거봐, 딱 그렇게 생각하기 좋다니까.’
그래도 무서워하는 거 보니까 좀 기분이 좋긴 하네.
이놈은 좀 혼이 나야 해.
“그런데, 요리법을 잘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작은 것 가지고는 구이나 찜은커녕 육수조차 제대로 낼 수 없을 듯한데······.”
이어지는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유, 육수라니······.’
두더지로 육수를 우려내겠다는 발상도 문제였지만, 그 말을 한 것이 숲속 친구들 제일의 평화주의자, 수다르님이었기 때문이다.
“토생원, 혹시 이 화원에 사기(邪氣)를 먹고 자라는 약초가 있습니까? 저자를 비료로 쓰면 아주 잘 자랄 것도 같은데.”
비, 비료······. 수, 수다르님이 갑자기 왜 이러시지.
나뿐 아니라, 숲속 친구들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의원인 수다르 님이 보기에 시체를 조종하는 흑암은 상종 못 할 나쁜 놈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잔인한 이야기를 하실 분은 아니니까.
하지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다르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글쎄요, 멸치로도 육수를 내는데요. 두더지 정도면 충분하죠.”
나까지 가세해 육수 드립을 쳐대자, 뭔가를 눈치챈 이강혁 씨가 피식 웃으며 더욱 섬뜩한 제안을 꺼냈다.
“조금 괴롭히면 또 덩치가 커질지도 모르니까, 좀 괴롭힐까요? 그럼 고기가 더 나올 텐데.”
“고명처럼 채 썰어서 올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죠. 월남쌈처럼 야채랑 곁들이면 나름 별미가 아닐까요?”
제르보나 씨 역시 뭔가를 눈치챈 듯 한마디를 보탰고,
“이, 이이······.”
흑암의 얼굴은 점점 더 새파랗게 질려갔다.
그때, 토생원이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흑암의 몸에는 사기(邪氣)가 가득해 요리의 재료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흑암은 조금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이내 토생원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었다.
“대신 제 화원에 요사스러운 기운을 먹고 자라는 약초가 몇 있으니, 비료로 쓰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동충하초처럼 이 녀석의 생기를 먹고 자라는 약초를 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도, 동충하초라니······.
“아아아, 초월자의 생기를 빨아먹고 자라는 약초라니, 얼마나 약효가 뛰어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군요.”
흑암을 바라보는 토생원의 눈은 광기와 호기심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약쟁이 모드로 들어간 토생원과 눈이 마주치자, 흑암은 겨울바람을 맞은 두더지처럼 온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이, 이거 반쯤 진심인 것 같은데······.’
약에 취해있을 때 토생원의 캐릭터를 알아서 그런지,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발언.
“토, 토생원! 네가 어떻게!”
그 말을 들은 흑암은 곧장 작은 눈을 까뒤집으며 악을 써댔지만, 토생원의 입가에는 상대를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흐음, 설마 물건 몇 개 사 갔다고 제가 당신 편이라도 된 줄 알았습니까?”
바로 그때, 수다르님이 결정타를 날리셨다.
“흐음······. 토생원, 그보다는 피안목(彼岸木)의 씨앗을 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피안목이요?”
봉식이의 질문에 수다르님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숙주의 영혼, 정확히는 고통을 먹고 자라나는 식물입니다. 피안목에 갇힌 자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며, 영원히 죽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주로 자신의 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순간들을 반복해서······.”
“차, 차라리 나를 죽여라!”
가장 끔찍한 순간을 반복해서 보여준다는 말에, 흑암의 입에서 곧장 죽여달라는 소리가 나왔다.
“수다르, 수하! 토생원! 모두 왜 이러는 것이냐! 이 녀석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그런 방식은 안 된다!”
그때, 모두가 예상했듯, 고미가 흑암의 앞을 막아섰다.
고미는 한 번도 누굴 잔인하게 죽인 적이 없다.
몬스터를 죽일 때도,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
처음 만난 날도 S급의 몬스터를 죽이고 합장을 해주었을 정도니, 흑암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이런 방법에 동의하지는 않을 테지.
“뭐, 뭐라고?”
갑작스런 정의의 사도의 등장에, 흑암의 콩알만 한 눈이 두 배는 커졌다.
“허허, 고미님, 걱정하지 마시지요. 이 수다르, 벌을 준다 해도 그런 인의를 벗어난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평상시처럼 인자한 산신령으로 돌아온 수다르님의 모습에 고미는 진심으로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고, 흑암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편집증 환자가 보기에는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조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걸 막는 고미나, 이런 말을 하는 수다르님이나.
“흑암, 이제 당신이 괴롭혔던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습니까?”
깨달음을 주려는 수다르 님의 한마디에 흑암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를 악문 채 들릴락 말락하게 중얼거렸다.
“보, 복수다······. 나는 복수를 하려고 한 것뿐이다.”
그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해는 한다는 소리네.
“그럼 당신에게 해를 입은 인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복수를 한들, 잘못된 것이 아니지요.”
“이, 인간들이 먼저 시작한 전쟁이다!”
흑암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인간들이 먼저 농사에 방해가 된다며 내 친구들을 모조리 죽였단 말이다! 덫을 놓아 죽이고, 도망가는 내 친구들을 전부 잡아 꼬리를 부, 붙잡고······ 바위에!”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흑암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은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저게 흑암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인가.
설마 수다르님은 이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우리는 너무나 무서워서 그들이 절대 우리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농사꾼들이 없는 아주 먼곳까지 달아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느냐?!”
이 대목에서 흑암은 돌연 실성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번에는 조상님을 묻을 묫자리에 두더지가 있다며 또다시 내 친구들을 죽여댔다! 이미 죽은 자의 묫자리를 좋은 곳에 써야 한다고, 살아있는 내 친구들을 이 잡듯이 뒤져 모조리 죽여버렸단 말이다!”
“태어난 지 육 개월도 안 된 젖먹이를, 육십 년도 더 산 늙은이의 관을 파먹을지도 모른다며, 모조리 때려죽였다! 그리고는 아이의 먹이를 찾다 덫에 걸려 죽어가는 내 친구의 시체에 침을 뱉더구나! 마치 우리가 자신의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말이야!”
흑암의 목소리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처절함과 깊은 한이 느껴졌다.
“그러니 나도 갚아주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할 말이 없었다.
두더지의 입장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처럼, 흑암의 말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면서도 차마 면전에 대고 반박을 하지는 못하겠다는 기분인거겠지.
그때, 수다르님이 굳은 표정으로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렁이나 당신의 친구들에게 잡아먹힌 벌레들이 복수를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
“네, 다르지요. 하지만 두더지 중에 인간들처럼 잔인하게 다른 벌레를 죽인 자가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잠깐의 정적.
“당신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고한 인간들까지 모두 죽이려는 것은 좌시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정론이다.
······.
하지만 이런 말로 흑암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흑암 역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을까?
“당신이 끝내 모든 인간을 죽이겠다는 뜻을 꺾지 않겠다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딱 한 번만 기회를 드리지요. 잠시 이 화원에 머물며 선량한 인간도 있다는 것을, 한 번쯤은 지켜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흑암은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더는 죽이네, 죽겠네 하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을 뿐.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흑암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나를 이곳에 가두어두겠다는 것이 아니냐?”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를 함부로 풀어둘 수는 없다. 그, 그렇지만······. 치, 친구들을 잃은 네가 얼마나 슬펐는지는 잘 알겠느니라.”
답을 한 것은, 수다르님이 아닌 고미였다.
깊은 슬픔이 묻어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고미의 모습에, 흑암이 작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물었다.
“왜 나를 그렇게 보는 것이냐. 나는 너의 적이다.”
“이, 이 몸도, 친구들을 잃는다면 너처럼 슬플 것이다. 그러니, 너를 나쁘다고 욕하기가 어렵구나. 하지만······. 하지만······. 내 친구들과 인간들을 다치게 한다면, 너를 이곳에 가두어 둘 수밖에 없느니라.”
자신의 슬픔을 이해해주는 듯한 고미의 말에, 흑암은 잠시 망설이다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너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서 대균열을 지켰다고 들었다. 정말로 인간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느냐?”
“있다! 수하도, 봉식이도, 허수아비도! 삼룡 어멈도! 모두 좋은 녀석들이다! 수, 수다르와 토생원도!”
“나는 믿지 못한다. 지금도 저자들이 널 이용하는 것은 아닐지 의심이 들 정도니까. 하지만······. 당장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어쩔 수 없으니 지금은 참겠다는 건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고미는 흑암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듯 싶었다. 축 처져 있던 꼬리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으니까.
“우웃! 수하! 어서 먹을 것을 시켜라! 이 녀석도 배가 고프지 않겠느냐?”
······.
결론이, 이상하다.
“너도 맛있는 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달콤한 것을 먹고, 친구들과 놀다 보면, 슬픈 날들은 모두 잊히고, 다시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것도 같고.
말하는 게 고미라서 그런가.
어쩌면 친구를 모두 잃은 흑암에게 필요한 건, 그럴싸한 정론이 아니라, 고미처럼 비슷한 종류의 슬픔을 아는 사람의 위로였을지도 모르지.
시체들만 가득한 자신의 이공간에서는 누구도 그의 슬픔을 위로해주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이, 이 몸은 곧 놀이공원이라는 곳에 갈 것이다! 아주 즐거운 곳이라고 들었느니라! 너도 나의 친구가 되어준다면, 언젠가 함께 데리고 가주겠다!”
그, 그건 무리지. 벌도 제대로 안 받았는데 곧바로 놀이공원이라니.
게다가 아직 확실히 마음이 바뀐 것도 아닌데······.
하지만 내가 무언가 말을 하려하자, 수다르 님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수다르님 역시 나와 생각이 같지만, 지금은 말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신호.
그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수다르 님을 믿어보자.
나보다 백 년은 더 산 수다르 님이, 어영부영 이 문제를 넘어가지는 않겠지.
“두더지와 곰이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수하는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인간과 곰도 가족이 될 수 있는데, 두더지와 곰이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냐!”
흑암의 마음이 돌아선 것이 적잖이 기뻤는지, 고미의 꼬리가 봄바람을 맞은 강아지풀처럼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흑암의 말에, 우리 모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뭔가 이상하군. 저자들이 너를 속인 것이 아니냐? 나도 놀이공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런데, 너와 나처럼 작은 동물들은 놀이공원에 갈 수 없다.”
그 순간, 봄바람이 멈추고, 고미의 꼬리에 겨울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