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0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이것 봐라……. 사과도 없이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자고?
뭐 이런 기본도 안 된 자식이 다 있어.
“싫은데요.”
짤막한 한마디에 시스템은 또다시 난감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저랑 직접 얘기하자고 시위인지 뭔지 한 것 아니었어요?”
“그러긴 했는데, 당신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요.”
평소와 달리 감정적이고 공격적인 내 태도에 숲속 친구들은 적잖이 놀란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봉식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아저씨. 잘못을 했으면 일단 사과부터 해야지. 시스템은 뭔가 대단한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예의도 모르고 이 자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난 꽤 무른 편이다.
마음도 약하고.
하지만 이런 나쁜 놈을 상대로 제대로 된 사과도 안 받고 ‘오셨어요?’하고 웃으며 곧장 대화를 나눌 만큼 호인은 못 된다.
“아,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
아아, 더 열 받는다. 지금 저걸 사과라고 하는 건가?
“이봐요, 당신 뭐야. 지금 그게 사과야? 누구 약 올려요?”
시스템의 성의 없는 사과에 발끈한 한유진 씨가 도끼눈을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인간, 아니, 생명체하고 직접 접촉하는 일 자체가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 인간들 표현을 빌자면, 사회성이 아주 떨어지거든요.”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디서 이딴 게 튀어나왔어.
신이라는 추측까지 나도는 시스템의 정체가 이런 사회성 떨어지는 너드(Nerd) 같은 인간이라고?
“당신 진짜 시스템 맞아?”
너무나 예상과 동떨어진 언행과 캐릭터에 불쑥 의구심이 샘솟았다.
당신, 상태창으로 메시지 보낼 때는 위대한 곰이 어쩌고 하면서 드립도 잘 쳤잖아.
“음, 저는 시스템보다는 관리자라는 호칭을 훨씬 좋아하긴 하지만, 맞아요.”
자신을 ‘관리자’라고 지칭한 사내는 다시 한번 ‘꿀태창’을 반짝거리게 만드는 것으로 신분을 증명했다.
그리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들이 그런 말 쓰잖아요. 키보드 워리어? 그런 거예요. 얼굴 보고 말하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까, 이런 쌍방향 통신은 좀 익숙하지 않거든요. 상태창 메시지 보낼 때는 딱히 상대방 기분 고려할 이유도 없고.”
이어지는 말에 순간 마인드 리딩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나 싶었지만, 그건 아닐 거라는 결론을 얻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하다면 상황이 여기까지 굴러오지도 않았겠지.
아마 오랜 시간 세상에 개입하지 않고 관찰자로 지내며 갈고 닦아온 일종의 통찰력일 거다.
즉, 전지전능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거지.
“어쨌든, 죄송하다는 말은 진심이에요. 저도 나름대로 고미를 꽤 아끼고 있거든요.”
“아껴? 아끼는 애를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 싸우게 놔둬?”
나의 반박에 관리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이 아끼는 방식이 결국 대균열로 돌려보내기 전까지 재미있는 시간 보내게 해주겠다, 이런 거 아니냐고!”
“뭐, 그렇긴 하죠. 어쨌든 수호자는 필요하니까.”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를 더욱 화나게 만든 건, 상대의 태도가 너무 담담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정작 고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멀뚱멀뚱 관리자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수하, 진정하거라. 저자의 말대로다. 수호자가 없다면 누가 너희들을 지키겠느냐.”
이어지는 고미의 말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에 차올랐다.
어째서 이 녀석은 이 와중에도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있는 걸까?
동시에 이렇게 착한 녀석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겨우 그거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이유가 고작 ‘수호자는 필요하니까’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이 몸은! 엄마 아빠가 좋다! 수하도, 봉식이도, 허수아비도, 모두 좋다! 다른 인간들도 좋아하는 인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인간들은 이 몸처럼 위대하지 못하니, 이 몸이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고미가 했던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가족이 생기고, 친구들이 생기고, 초코바와 꿀과 온갖 달콤한 것들을 맛보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지만, 고미는 여전히 자신의 의무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의무를 저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하는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더욱 사명감을 불태우는 녀석이 고미였다.
이런 책임감은 보상받아야 마땅한 거라고. 그게 옳게 된 세상이지.
적어도 고작 몇 달, 길어야 몇 년짜리 나들이로 퉁치는 건 용서가 안 된다.
“휴우……. 어째 얘기할수록 제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군요.”
고미의 말을 들은 관리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되는 게 아니라 나쁘지.”
“나쁜 게 맞습니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줄줄이 이어지는 숲속 친구들의 성토에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가 생각한 거랑 일이 다르게 흘러가는데 즐거운 건 또 처음이군요.”
웃어? 이거 완전 돌아이 아니야?
“혹시 사이코패스세요?”
“뭐, 인간의 기준에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감정이라는 걸 거의 갖고 있지 않은 편이라. 그래도 오랫동안 수고해 준 고미에게 뭔가 해줘야겠다는 정도의 생각은 가지고 있죠.”
“그래서, 뭘 해줄 건데?”
나의 질문에 관리자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애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고미가 계속 밖에 있는 건…….”
“난 그거 아니면 거래를 안 할 생각인데?”
이놈이 뭐라고 이유를 갖다 붙이든, 나는 한 발자국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김수하 씨, 당신은 지금 수만 년에 걸쳐 찾아낸 가장 안정적인 체계를 흔들고 있어요. 그걸 알고는 하는 소리예요?”
“진짜 지랄도 가지가지네. 수만 년 동안 만든 체제가 겨우 어린애 하나 들들 볶아서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거라고!?”
“적어도 지금까지 확인된 것 중에 가장 안정된…….”
“안정, 안정! 지랄하지 말라고!”
화가 난다.
저 사람이 말하는 안정이 뭔지는 대충 알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건 인정할 수 없다.
아니, 인정해서는 안 된다.
“결국 고미가 대균열을 잘 지켰으니까 세상이 안정됐다는 거잖아! 그럼 당신은 고미를 위해서 더 좋은 방법을 찾았어야지! 없어도 만들었어야지! 당신은 다 봤을 거 아니야!”
언젠가 만날 친구를 상상하며 그렸을 대웅전의 벽화도. 조각상도, 그 투박하고 통통한 손으로 어설프게 조물거리며, 있지도 않은 친구에게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는 날을 기대하는 모습도, 다 봤을 거잖아.
그럼 적어도 당신은 이러면 안 되는거지.
“고미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가족이 생겨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친구들을 사귀어서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이런 날들이 찾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다 봤잖아!”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솟았다.
분하고, 억울하고, 안쓰러워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나처럼 거래를 하려 들지 않고 세상의 안전과 자신의 행복 중에 뭐가 더 중요한 것인지, 아무 말도 없이 고민에 빠져있는 고미가 너무 안쓰러워서.
“수, 수하, 진정하거라.”
내가 또다시 발광을 하자, 고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나의 다리를 붙잡았다.
“하아……. 진정하시고, 제 얘기도 좀 들어보세요. 저도 나름대로 노력했다고요. 그런데 수호자의 숫자가 많아지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그만큼 커져요. 이미 몇 번이나 그랬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만든 체계가 안정적인 게 아니라, 그냥 고미가 착해서 아무 일도 안 벌어지고 있는 거잖아!”
“아니, 체계는 제가 만든 게 아니라…….”
“누가 만들었든! 어린애 하나가 착해서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걸, 너 같은 새끼들이 뒷짐 지고 앉아서 일이 잘되고 있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잖아!”
“안정적이면 변화를 꾀하지 않는 게 당연하죠. 뭔가 문제가 생겨야 변화를…….”
“그래서 내가 문제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거잖아!”
그렇게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자, 관리자의 입가에 또다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 잘하셨어요.”
퍽!
그 순간, 참다못한 숲속 친구들이 앞다투어 홀로그램을 향해 주먹과 발길질을 날려댔다.
“도저히 못 참겠군요!”
허수아비도,
“수하 씨, 죽여요, 죽여! 알틴! 저거 찾아내서 게이트 열어! 죽여버리게!”
삼룡어멈도,
“야, 김수하, 이 새끼 어떻게 못 하냐? 도저히 못 참겠다!”
봉식이도,
“수하님! 이 수다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평화주의자 수다르 님마저 홀로그램을 향해 회초리를 휘둘러댔다.
“다들 성질이 급하시네. 제 말 좀 들어요. 제가 그랬잖아요. 체계는 제가 만든 게 아니라고,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못 고친다고. 그런데 김수하 씨가 한 짓 때문에 문제가 생겼어요. 아니, 생길 예정이죠. 그것도 아주 크게. 그러니까, 수정이 필요해진 거죠.”
‘수정’이라는 말에 숲속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주먹질을 멈추고 관리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주먹을 꼭 쥐고 있는 폼이, 한마디만 잘못 나오면 또다시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 준비가 되어있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실 체계는 변화를 싫어해요. 아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변화하지만, 안정적인 상태에서는 변화를 할 이유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으니까 본론만 말해.”
“김수하 씨가 한 짓은 꽤 인상 깊었어요.”
관리자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그래서 더 사람의 화를 돋우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는 아주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각 차원에는 초월자라고 부르는 강력한 자들이 존재해요. 하지만, 아까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는 초월자가 죽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새로운 통치자, 혹은 초월자급의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면, 거기에 맞춰서 모든 계획을 바꿔야 하거든요. 그 변화가 인간에게 있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마찬가지죠.”
그 순간,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제거하지 말고, 다른 차원을 침공하지 못하게 만들어라?”
“정답. 그게 가장 좋아요. 변수를 최대한으로 줄이면서, 평형을 유지할 방법이죠. 그럼 저도 최대한 양보해 볼게요.”
“양보라니?”
“대균열의 붕괴와 재결합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그건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섭리에 가까운 원리니까요. 다만 대균열의 관리 규칙은 어느 정도 손볼 수 있죠.”
“어떻게?”
“고미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없지만, 고미의 짐을 덜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바깥세상에 머물게 해드릴게요.”
얼핏 듣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최대한도가 얼마인지가 관건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할 수가 없다.
“주 3일, 하루 7시간 근무. 연차, 월차 보장.”
나의 대답에 관리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풋, 정말 재미있는 분이네. 여기에 지구의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기준으로도 근무시간이 너무 짧은 거 아닙니까?”
“어린애잖아.”
“좋아요. 단, 무조건 그렇게 해드릴 수는 없어요. 고미를 대신해서 대균열을 감시할 수 있는 존재를 섭외한다면, 그 숫자에 따라서 근무시간을 줄여드릴게요.”
“기준은?”
“최소한 S급 이상, S급이라면 2인 1조, 그 이상이라면 단독 근무, 근무시간은 24시간. 일단은 그렇게 하죠. 하지만 비상시에는 반드시 고미가 직접 출동해야 합니다.”
관리자가 설명을 마치자, 고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통통한 손가락을 접어가며 필요한 인원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줄곧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와 행복 사이에서 고민하던 녀석의 입가에는 어느새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웃음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큰 보상이었다.
“오오, 수하, 그럼 S급이 20명, 초월자라면 8명만 있으면 되겠구나!”
…….
잠깐, 왜 계산이 그렇게 되냐.
14에 7이지. 대체 왜 이렇게 숫자에 약한 건데.
하지만 계산의 정확도야 어찌 됐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걸로 고미가 돌아가지 않을 방법을 찾았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지. 산수 실력 좀 떨어지면 어때.
“자, 그럼 계약 성립이죠? 저 빨리 돌아가 봐야 하거든요. 사실 지금 이것도 엄청난 규칙 위반이라고요. 인간으로 치자면 해직될지도 모를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관리자가 초조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중요한 임무는 앞으로도 계속 상태창으로 보내드릴게요. 퀘스트 잘 수행하시고, 지금처럼 또 문제 일으키시면 안 돼요. 여러 명한테 맡겨놨더니 역시 상황이 나빠진다. 이런 결론 나오면 고미는 결국 대균열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뭐, 인마!?”
“그럼 믿고 갑니다! 거기 있는 흑암부터 어떻게 잘 꼬셔봐요.”
할 말을 끝마친 관리자는 마감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처럼 휑하니 자리에서 사라졌고,
“으으으…….”
때마침 꿀주먹에 취해있던 흑암이 숙취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오, 수하! 이 녀석이 깨어났다!”
“자, 얼른 시작하죠.”
“야, 김수하, 이거 거꾸로 매달면 말 듣지 않을까?”
그리고는, 자신을 둘러싼 숲속 친구들의 흉흉한(?) 시선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