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39화 (139/300)

EP.139 시스템과의 만남

붉은빛을 내며 깜빡이는 ‘꿀태창’의 모습에 나는 잠시 넋이 나가고 말았다.

초월자를 하나하나 제압해 나가다 보면 뭔가 반응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르네.’

하지만 연락이 왔다고 바로 상태창을 열어볼 수는 없었다.

무슨 요구를 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상태창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고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니까.

‘우선 흑암 일부터 확실히 마무리 해야 해.’

흑암은 토생원과는 다르다.

위험도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이마에 ‘취급 주의’ 딱지라도 붙여줘야 할 것 같은 놈이니까.

“후훗! 보아라! 이 몸이 이 간사한 두더지 놈을 완벽하게 제압했느니라!”

그때, 고미가 숙면을 취하고 있는 두더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다가왔다.

음, 보기에 따라 굉장히 부적절한 그림이군.

꼭 나중에 먹으려고 간식이라도 챙기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그런데······. 진짜 죽은 거 아니야?

너무 축 늘어져 있는데.

“고미, 설마 죽인 건 아니지?”

불안한 마음에 던진 질문에, 고미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하는 짓이 괘씸해 조금 혼쭐을 내주기는 했지만, 주,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

화나서 힘 조절 살짝 실패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정말 괜찮은 거냐.

한편, 토생원은 바닥 곳곳을 파헤치고, 부서진 암석과 뼛조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죠?”

나의 질문에 토생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선 이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곳에 죽음의 기운이 너무 가득해서 그런 것이겠지.”

고미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이자, 토생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체가 썩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곳곳에 마법진이 가득하니, 정신이 들면 또다시 망자의 힘을 흡수해 저항할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여기는 흑암의 홈그라운드고, 밖으로 나가면 힘이 빠진다, 뭐 그런 소리인가.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알겠습니다. 일단 나가죠.”

그렇게 숲속 친구들이 제르보나 호와 유찬 호에 탑승 수속을 마치려는 순간,

“멍! 멍멍!”

자그마한 강아지가 맹렬하게 짖는 소리가 귀를 잡아끌었다.

“응?”

고개를 돌려보자, 어디선가 나타난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을 본 고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저런 것도 주인이라고, 주인을 지키려는 것이냐?”

강아지의 정체는 흑암에게 빨려 들어갔다가 미니 사이즈로 변해버린 가짜 삼돌이였다.

“으음, 대단하군요. 그 정도로 마력을 빼앗기고도 죽지 않았더니.”

미니 삼돌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토생원은 조금 감탄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생사를 건 싸움을 벌였지만, 주인을 지키겠다고 짖어대는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도 데리고 나가기에는 너무 위험한데······.’

하지만, 불쌍하다고 아무거나 거둘 수는 없다.

그게 친구들과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여기에 버리고 가자니, 왠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으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냐.’

바로 그때, 고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훌륭하구나. 신의를 아는 녀석이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고미는, 미니 삼돌이를 거두려 하고 있었다.

고미의 결정에 이강혁 씨와 한유진 씨는 못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솔직히 나도 조금 걱정이 되고.

안쓰러운 건 안쓰러운 거고, 위험한 건 위험한 거니까.

“곰 선생님······. 너무 위험합니다.”

이강혁 씨가 조심스레 반대 의사를 밝혔지만,

“걱정 말거라. 이 녀석은 이미 많이 약해졌으니,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니라. 게다가 정말 나쁜 놈이라면 이 몸의 눈이 닿는 곳에 두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고미의 뜻은 단호했다.

“허허허, 모두 불안해하시니, 제가 이 아이를 한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분위기가 애매해지자, 수다르 님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디 보자······.”

“스승님, 제가 하겠습니다.”

수다르 님이 진맥을 하려고 자세를 잡는 것을 본 토생원이 곧바로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힘이 남아있으니, 제가 하는 것이 안전할 듯합니다.”

음······. 그새 사제지간의 정이 꽤 돈독해졌구나. 보기 좋군.

“호오, 토생원! 참으로 훌륭하구나!”

개과천선한 토생원의 모습에 고미 역시 흡족한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맥을 마친 토생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라면, 인간들의 기준으로는 C급이나 B급의 몬스터입니다. 인위적으로 마력을 불어넣는다고 해도 단기간에 예전 같은 힘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 그래도 꽤 세네.

워낙 작아져서 더 약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광견병 검사(?)를 마친 토생원이 품 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자,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가며 이빨을 드러내고 있던 삼돌이는 스스륵 잠이 들었고, 우리는 녀석과 꿀잠에 빠진 두더지를 챙겨 곧장 흑암의 땅을 벗어났다.

* * *

“응?”

알틴이 만든 게이트를 지나 현세로 돌아오자, 그새 십 년은 늙어버린 노인국 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걱정됐던 모양이군.’

다시 최진웅으로 변한 나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조만간 정체를 밝히고 양해를 구할 생각이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까.

“서, 설마······. 정말 흑암을 물리친 건가?”

“뭐, 대충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건가, 한유진에, 이강혁에······. 저 기묘한 펫들은 또 뭐고?”

펫이라니, 이래 봬도 하나는 산신령에, 하나는 초월자에, 하나는 대균열의 수호자라고.

“그런 건 나중에 설명하지. 거래 조건은 곧 알려줄 테니까, 집에 가서 푹 쉬라고. 아, 그리고······.”

노인국 씨는 무언가를 덧붙이기도 전에 눈치 빠르게 내 의중을 읽어냈다.

“알고 있네. 오늘 본 것에 대해서는 함구하라는 것이겠지?”

“눈치가 빨라서 참 좋아. 이제 가서 쉬어, 일주일 내로 다시 연락을 주지.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말을 마친 우리는 다시 제르보나 호와 유찬 호를 타고 다시 먼 곳으로 날아갔다.

* * *

이후 우리는 한유진 씨의 집을 거쳐 또 다른 이공간인 토생원의 화원으로 들어갔다.

본래는 비토섬까지 날아가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며칠 새 한유진 씨의 집에도 굴을 파놨거든.

“이곳이 백색 화원이군요······.”

“와, 냄새 끝내준다.”

화원에 처음 들어와 본 이강혁 씨와 봉식이는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응?”

그때, 주위를 둘러보던 이강혁 씨가 갑자기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어딘가에 눈을 고정했고,

“우웅?”

고미와 나를 비롯한 숲속 친구들은 반사적으로 그 시선을 따라갔다.

“누, 누구냐!”

이어서 토생원이 새하얀 털을 잔뜩 부풀리며 처음 만났을 때처럼 광기 어린 표정으로 눈을 번뜩였다.

지금 숲속 친구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흰 티에 청바지를 입은 사내 하나가 뒷짐을 진 채 화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나는 반사적으로 흑염대웅신검과 영지버섯을 꺼내 들었다.

상대가 적이라고 판단한 숲속 친구들도 곧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토생원의 반응으로 보아, 사내는 무단침입자가 분명했다.

문제는, 어떻게 초월자의 이공간에 멋대로 들어올 수 있었냐는 거지.

흑암의 이공간에 게이트를 열고 들어갈 수 있었던 건, 드래곤 로드급의 마력을 가진 동이님의 힘을 이어받은 알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흑암이 자신의 이공간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열었기에 그 흔적을 추격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곳을 발견조차 하지 못했을 터.

즉, 지금 저 괴한은, 적어도 공간 마법에 한해서는 초월자를 능가하는 존재라는 소리다.

“우웅?”

심지어 고미마저 그 괴한을 발견하고는 놀란 듯 연신 눈을 깜빡였다.

[ 고미, 너도 저 사람의 존재를 느끼지 못 한 거야?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고미의 모습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향해 적의가 가득한 시선이 쏟아지자, 사내는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어······. 그런 거, 별 의미 없으니까 넣어두시면 안 될까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 이강혁 씨의 검을 가리켰다.

“누구냐,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이강혁 씨의 날 선 질문에 사내는 다소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음, 말하기가 좀 애매한데, 적은 아닌데, 그쪽에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고, 그런데 싸우러 온 건 아니기는 하거든요.”

‘뭐야, 저 애매한 말투는······.’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쉬이익!

이강혁 씨가 곧바로 상대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아이참······.”

그러나 사내는 피하지도, 손을 들어 막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에 서 있었고,

“환영이냐!?”

새하얀 검기는 그대로 괴한의 몸을 ‘통과해서’ 화원의 땅에 깊은 검흔을 남겼다.

“안 통한다고 했잖아요. 이거 어차피 환상이란 말이에요. 사람 말을 좀 끝까지 들어요. 아니, 자기들끼리는 얘기도 잘 들어주고 그러더니, 나한테는 왜 이런데?”

여유롭기 그지없는 사내의 태도에 나도, 고미도, 나머지 숲속 친구들도,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리고 말았다.

“거짓말하지 말거라! 위대한 이 몸마저 간파할 수 없는 환영이라니! 대체 무슨 사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냐!”

그 순간, 고미가 솜방망이를 움켜쥐며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상대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자신마저 간파할 수 없는 환술을 사용하는 자라면,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설명하기가 복잡한데. 이건 마법이나 그런 게 아니에요. 그래, 인간들의 기술로 치면 홀로그램 같은 거라고요. 아주 리얼한 홀로그램.”

사내의 태도는 지나치게 여유로웠고, 표정에서 적의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게 홀로그램이라면, 표정을 읽는 건 아무 의미도 없겠지.

“그럼 대체 여기에 왜 나타나신 건데요? 그리고 정체가 뭐죠?”

나의 질문에 괴한은 또다시 어색하게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어 허공을 톡톡 두드리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꿀태창이 무언가에 반응하듯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설마······.”

“네, 맞아요. 그 호칭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시스템. 제가 그거예요.”

사내의 마지막 말에 화원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거기 계신 김수하 씨가 그랬잖아요.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그런데 제가 현세에는 이렇게도 못 나타나거든요. 고민고민하다가 이쪽으로 길을 좀 파봤죠. 곧 이쪽으로 올 것 같아서.”

괴한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새끼가!”

쾅!

갑작스레 흑염대웅신검을 집어던지는 내 모습에 숲속 친구들은 모두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했지, 언제 홀로그램 들이밀랬어!?”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는 느낌.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야, 야, 김수하! 진정해!”

분노한 내가 발광을 해대자, 봉식이가 커다란 두 손으로 나를 붙잡았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전에 없이 급발진을 하는 내 모습에 조금 놀란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 의외로 과격하신 면이 있······.”

“이 아동학대범 새끼야!”

“아니······.”

“동물학대에 아동학대까지 해놓고, 대화를 하자니까 홀로그램을 들이밀어? 이 개xx, 씨xxx, x같x, x호xxx, xx!”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내가 육두문자를 쏟아내자,

“수, 수하! 지, 진정해라! 너답지 않게 왜 이러느냐!”

당황한 고미가 허겁지겁 달려와 나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놔! 저 새끼가 너를!”

“수하님, 진정하십시오. 일단 대화를 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저자가 끝내 고미님을 불행하게 만들겠다면, 이 수다르도 모든 것을 걸고 저자에게 저항하겠습니다!“

“수하님, 지금 이러시면 좋을 게 없습니다. 여태 노력해 온 것은 모두 저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아니었습니까.”

수다르님과 제르보나의 말에 나는 조금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냉정해질 수는 없었지만······.

‘그래, 참자. 참아, 내가 여기서 발광하면 고미가 다시 대균열로 돌아가야 할지도 몰라.’

내가 씩씩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자신을 ‘시스템’이라고 지칭한 흰옷의 사내가 느긋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신 모양이네. 그럼, 이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