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7 흑암을 잡아라(4) 고미vs흑암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검은색의 띠를 그리며 적진을 휩쓸 때마다, 봉식이의 필살기인 갓······.
안 되겠다, 내 입으로는 도저히 말 못 하겠어.
저 녀석은 어떻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거지?
어쨌든, 봉식이의 필살기가 작렬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적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내가 아는 한, 이 정도 파워를 가지고 있는 헌터는 대한민국에 단 한 명뿐이다.
‘문경준?’
하지만 그 사람이 우리를 도와줄 리가······.
차라리 노인국 씨가 왔다면 모를까, 문경준이 이 자리에 나타날 리가 없지.
그렇게 의문의 지원군이 누군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승천하는 용처럼 웅장한 기세로 하늘 위로 솟구쳤다.
‘자, 잠깐, 설마······.’
고미를 닮은 익숙한 형상, 일 미터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키, 짤막한 꼬리에 동글동글한 귀, 통통하고 짜리몽땅한 팔다리까지······.
“다웅이!?”
“다우우우우웅!”
그 순간, 고미 못지않은 커다란 목소리가 이공간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이어서 놀란 정신을 추스르기도 전에 다웅이의 손에서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기다란 막대기의 형태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무기!?’
“다웅, 다웅다웅, 다웅! 다우우우우웅!”
다웅이가 손에 들린 정체불명의 무기를 연달아 지면을 향해 찌르자,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폭격을 맞은 것처럼 지면에 커다란 구덩이들이 생겨났다.
“어, 어어······.”
그야말로 천재지변을 방불케 하는 공격.
다웅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마치 수십 개의 작은 유성이 떨어져 내리는 듯 시커먼 돌조각이 비산하고, 지면이 바르르 떨리며 수십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가 흔적도 없이 뭉개져 사라졌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다웅이의 엄청난 공격에 넋을 놓고 있을 때,
“다······ 우우우웅······!”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녀석의 손에 들린 막대기가 수십 미터로 늘어나며 채찍처럼 지면을 휩쓸었다.
‘여, 여의봉!?’
거대한 뱀의 꼬리처럼 몬스터들을 쓸어버린 물체가 우뚝 멈춰서는 순간, 녀석의 손에 들린 무기의 형태가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주, 죽창······.’
그렇다. 다웅이의 손에 들린 것은 죽창이었다.
아니, 끝이 뾰족하지는 않으니까, 죽봉인가?
판다에 어울리는 무기이기는 한데, 굉장히 유명한 누군가랑 캐릭터가 겹친다는 느낌이······.
“다웅!”
잠시 저작권법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다시 줄어든 여의죽봉을 손에 든 통통한 아기 판다가 화살처럼 몬스터의 바다를 뚫고 나에게 달려왔다.
설마······. 내가 위기에 처한 것 같으니까 이렇게 급하게 움직인 건가?
나를 생각하는 다웅이의 마음에, 그리고 고미의 마음에, 수백에 달하는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마음 한 편이 왠지 모르게 따스해졌다.
저렇게 게으른 와중에도 가족들만큼은 살뜰히 챙기는 건, 틀림없이 고미의 마음이 반영된 거겠지.
“다웅!”
번개처럼 내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 다웅이는 또렷한 눈매로 나를 훑어보며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고미랑 닮긴 닮았네······.’
평소에는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자는 건지 깨어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녀석이라 몰랐는데, 이 녀석도 고미 못지않게 눈이 맑구나.
“다웅.”
하지만 녀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묘해졌다.
‘내, 내려다보고 있어······.’
고미도 그렇지만, 다웅이의 키는 내 반 토막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각도와 무관하게, 어째 사람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확실히 고미 분신 맞구나.
[ 휴우······. 다웅이님 덕에 한숨 돌렸네요. 괜찮습니까 수하 씨? ]
다웅이의 활약에 힘입어 나의 안전이 확보된 듯 하자, 이강혁 씨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 어떻게 된 거예요? 다웅이가 왜······. ]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다웅이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물었다.
본래 우리 계획에 다웅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애가 원체 죽은 듯이 누워 있다 보니, 불안해서 데리고 올 수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애를 억지로 끌고 와서 싸움터에 던져놓을 수도 없는 거니까.
[ 큰 싸움이 난 걸 느꼈는지, 봉식이에게 꽉 매달려서 떨어지지를 않더라고요.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어서 그냥 업고 왔습니다. ]
······.
굉장하군. 게으름을 피울 때든, 움직일 때든, 상당히 자기주장이 강한 녀석이야.
하지만 다웅이 뿐만 아니라, 나머지 그림자들도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본래 이번 싸움에 참여하기로 한 멤버는 봉식이, 이강혁 씨, 삼룡이 패밀리와 아웅이뿐이었다.
그런데 하늘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열 개나 되니, 대체 누가 온 건지 궁금할 수밖에.
[ 수다르님과 토생원님, 그리고 커다란 늑대 네 마리가 함께 왔습니다. ]
[ 네? ]
토생원이라면 모를까, 수다르님까지······?
[ 하지만 수다르님은 싸움을 못 하시잖아요. ]
[ 후방에서 단약만 제공하시기에는 마음이 불편하여 안 된다고, 전장에 의원이 없으면 살 사람도 죽지 않겠냐며 한사코 따라오겠다고 하셔서······. ]
고개를 돌려보니, 봉식이의 주위에서 네 마리의 늑대가 거침없이 날뛰며 몬스터들을 물리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괴물처럼 보이지도 않고,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몸놀림도 가벼운 것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방식으로 길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크하하하! 수하님! 이 토생원이 왔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후미에 있던 토생원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흔들었다.
약을 끊었는지 덩치도 작아졌고,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그 모습이 더 반가웠다.
‘그렇구나. 전투 요원으로 온 게 아니라 의원으로······.’
바른길(?)을 걷게 된 토생원 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약쟁이처럼 웃으시는 걸까······. 저건 그냥 성격인가.
의원 콤비와 사랑(四狼)이들의 도움을 받은 덕일까, 이강혁 씨와 봉식이는 상당한 수의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왔음에도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쿠궁······.
그렇게 예상 밖의 지원군과 다웅이의 활약에 힘입어 지상 조의 싸움이 무사히 끝나갈 무렵, 땅속 깊숙한 곳에서 묵직한 진동이 전해졌다.
쿵······!
조금 전보다 더욱 강해진 울림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직감했다.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네 이노옴!”
그리고, 그 생각을 확인시켜주듯, 먹물처럼 검게 물든 지면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나고, 그 사이로 벽력같은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쩌적, 쩌적······.
‘자, 잠깐, 이, 이거······.’
지면을 타고 퍼져나가는 거미줄 같은 균열에, 내가 아직도 고미의 힘을 얕봤다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서, 설마 땅굴을 파고 쫓아간 게 아니라······.’
이어지는 진동에 불길한(?) 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지금 고미는 땅굴을 파고 쫓아가는 게 아니라, 지면 전체를 붕괴시켜 흑암의 지배자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아, 안 돼. 이대로 있다가는······.’
나는 황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지면이 붕괴하면서 지상 조까지 같이 생매장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
고미도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한 거겠지.
아니면 나와 삼룡이 패밀리들을 믿고 있던가.
[ 제르보나 씨, 이유찬 씨! 도와주세요! ]
다행히 공중 조의 싸움도 막 끝난 상태였다.
삼룡이 패밀리에게 웅톡방을 활용해 음성 메시지를 보내자,
[ 이, 이럴 수가! ]
[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
경악에 찬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두 마리의 거대한 드래곤이 수직으로 지면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궁······.
그와 동시에 지면의 균열이 빠르게 번져나가며 반경 수백 미터에 달하는 범위가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뛰어요!”
내가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네 마리의 늑대와 이강혁 씨, 아웅이, 다웅이가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수다르님!”
전투력이 떨어지는 수다르님은 미처 하늘로 뛰어오르지 못하고 무너지는 지면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스승님!”
그 순간, 토생원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조각난 바윗덩어리들을 발판삼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수다르님을 향해 달려갔다.
“토생원! 위험합니다!”
“스승님! 기다리십시오!”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는 바위를 피해 날아간 토생원은 잽싸게 수다르님의 손을 붙잡았고,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떨어지는 돌덩이들을 밟고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수다르님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순간, 이유찬 씨의 발톱이 나를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휴우······.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드래곤으로 변한 이유찬 씨의 발에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름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싱크홀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굉장하군요. 고미님이 그날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싱크홀을 바라보는 이유찬 씨의 목소리에는 긴장과 공포감이 잔뜩 묻어났다.
하긴, 저 정도 힘으로 두들겨 맞았으면······. 숙취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겠지.
고미가 초코바 하나 때문에 용을 때려죽일 만큼 포악하지는 않은 훌륭한 곰성을 가진 아이라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네 이놈! 계속해서 달아나 보거라!”
한편, 싱크홀의 중심에는 갈색의 솜뭉치가 노발대발하며 삿대질을 하고 있었고, 싱크홀의 끄트머리에는 공포에 질린 두더지 한 마리가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 이, 무식한 곰이······.”
“뭣이!? 이 음흉한 두더지 놈이!”
“이 무식하게 힘만 센 곰돌이 놈아!”
“흥! 비겁하게 땅굴을 파고 숨어다니는 녀석이 입만 살았구나!”
“두더지니까 땅굴을 파지!”
“이 몸도 위대한 곰이니 힘이 센 것이다!”
······.
뭐냐, 이 먼치킨 급 싸움에, 유치원생들도 안 할 것 같은 유치한 말싸움은.
제발 긴장감을 가지고 싸움에 임해달라고.
대균열의 수호자와 대악당의 결전에 걸맞은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시끄럽다! 어서 이리 와서 순순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거라! 그럼 이 몸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다, 닥쳐라! 나는 인간들의 씨를 말리기 전까지는 결코 멈출 수 없다!”
“이놈이······.”
분노한 고미가 솜방망이를 움켜쥔 채 뚜벅뚜벅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흑암의 콩알만 한 두 눈에서 흉흉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수백 년간 아무 대책도 없이 도망만 다녔을 것 같으냐······. 인간계라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너라 해도 나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치는 순간, 검은 대지 곳곳에서 섬뜩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고, 곧바로 인간계로 진격해 모든 인간을 없애주마!”
우뚝 솟은 검은 산들이 무너지고, 숲속 친구들이 쓰러뜨린 몬스터들의 잔해가 붉은빛에 의해 빠른 속도로 녹아내려 검은 대지에 흡수되었다.
“네, 네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 장면을 본 고미의 눈이 전에 없이 격렬한 분노로 물들었다.
“너희들이 내 집에 쌓아놓은 시체들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 그리고 이제 그 버림받은 것들이······. 모두 나의 힘이 되리라!”
이어서 피로 물든 것처럼 흉흉한 붉은 빛을 띤 굵은 빛줄기가 흑암의 몸을 감싸더니, 검은 흙과 단단한 바위들이 흑암의 몸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모든 시체는 나의 육체가 되고, 모든 썩어가는 것들은 나의 힘이 되어라!”
지금 놈의 육체는 거의 동이님과 맞먹을 정도로 커져 있었고,
쿵, 쿵, 쿵······.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지가 울리고, 숨을 내쉴 때마다 썩은 내가 진동했다.
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음험하고 섬뜩한 기운에 온몸의 솜털이 빳빳하게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고미의 표정 역시 전에 없이 진지했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결연하고, 심각한, 실로 사투를 앞둔 전사의 얼굴.
쿠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괴물로 변한 흑암이 발을 휘두르자,
“모두 피해라!”
갈색 솜뭉치가 거대한 벽에 부딪힌 테니스공처럼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