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35화 (135/300)

EP.135 흑암을 잡아라(2) 어딜 달아나느냐, 요놈

‘하아······. 이강혁 씨, 진짜 이런 것 때문에 세 번이나 회귀한 거예요?’

지금 내 눈앞에는 새카만 털에 빨간 코, 기묘할 정도로 기다란 발톱을 가진 ‘두더지’가 서 있었다.

심지어 크기도 작다.

고미나 지리산을 벗어난 수다르님처럼 쪼꼬미 계열.

그것도 고미보다 더 작은 초미니 사이즈.

발톱이 칼날을 연상시킬 정도로 단단하고 날카롭다는 것 외에는 딱히 무서워 보이지도 않고.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한숨이 나오네······.’

호랑이, 토끼, 용, 곰, 수달, 거북이······. 이제는 두더지냐.

이거 뭐 동물의 왕국도 아니고.

“큭큭큭, 말해라, 원하는 게 무엇이냐?”

세상을 세 번이나 멸망시켰다는 악당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긴장감이 없다.

물론 외모나 사이즈와는 무관하게 극도로 위험한 놈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생긴 게 두더지여서는 무게가 안 느껴진다고 무게가.

‘아니지, 정신 차리자.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이건 완전히 상정 밖의 사태다.

덕분에 계획에도 약간의 수정이 필요해졌고.

[ 수하! 다 되었다! 이제 돌아가겠다! ]

그때, 고미가 플랜 B에 따라 놈의 퇴로를 차단할 준비를 맞췄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문제는, 플랜 B에 땅속으로 달아나는 걸 막을 방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거지.

설마 상대가 두더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 고미! 안돼! 이놈 두더지야! ]

[ 뭐, 뭣이!? 어, 어쩐지, 위대한 이 몸의 눈을 피해 잘도 숨어다녔다 했더니! ]

[ 네 결계로 땅속까지 막을 수 있어? ]

[ 가, 가능은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

[ 내가 시간을 벌게. 땅속까지 다 막아줘! ]

고미와 대화를 마친 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날 너의 사도로 삼아다오.”

나의 대답에 흑암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검은 털을 가다듬으며 음침하게 웃음을 흘렸다.

“큭큭큭······. 재미있는 인간이군. 난 사도를 두지 않는다.”

알아, 그냥 시간 끌려고 아무 말이나 던져본 거야.

“게다가 너는 평행 세계에서 온 놈이 아니었나? 내 목적이 뭔지 알 텐데 사도로 거둬달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흑암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머리를 쥐어 짜냈다.

숲속 친구들과 토생원에게 들은 모든 정보를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결계가 완성되기 전에 싸움이 벌어지면 이놈이 땅굴을 파고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편집성 인격······. 의심이 많고, 늘 사람들을 시험하고, 자기 생각이 맞다는 증거를 수집하는데 열을 올리고······.’

대학원 그만둔 지가 언제인데, 왜 이런 걸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거냐고.

그때, 토생원이 해주었던 말이 번뜩 머리를 스쳤다.

흑암이 생각하는 인간이란, 힘이 있으면 반드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이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다.

그리고······. 이길 수 없으면 ‘빌붙는다.’

“그래,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길 방법이 생각이 안 나더라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 밑에 붙는 게 낫지 않겠어?”

나는 말만 바꾸어 내 입으로 흑암의 인간관을 말해주었다.

상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법의 하나인 ‘재진술’의 변형.

원래는 공감을 표현하고 내담자와 라포를 쌓기 위해 사용하는 기법이다.

편집증 환자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는 이만한 게 없지.

‘언제나 집요하게 자기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해 줄 증거를 찾는데 열중하는 사람들이니까.’

물론, 흑암은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이 말이 더 잘 먹힐 거고.

나는 지금 그가 믿는 비겁한 인간, 그 자체니까.

“크하하하하하하!”

자신의 인간관을 확인시켜주는 듯한 발언에 흑암은 미친 사람, 아니, 미친 두더지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일단 이걸로 잠깐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겠지.

“역겹군, 역겨워! 역시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야!”

하지만 나는 마음을 풀지 않았다.

편집증 환자와의 대화는, 여기서 시작이니까.

맘에 드는 말 몇 마디 해줬다고 금방 경계를 푼다면, 괜히 기피 대상 1호가 아니지.

“그런데,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역시, 한 번으로는 안 되겠지.

몇 번이고 상대가 자신을 속이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게 편집증 환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니까.

“이봐, 당신이 원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지?”

“큭큭큭······. 그래. 너 같은 인간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가족이니, 친구니, 연인이니, 죄책감이니, 온갖 같잖은 구실을 들어서 다시 인간의 편에 서더군. 거짓말과 배신이 본능이나 마찬가지인 종족이야.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뿐이지.”

어휴……. 암울하기는…….

그래도 됐다, 계속 떠들어 주기만 하면 돼.

“난 고아다. 친구도 없지.”

어머니, 아버지, 죄송합니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 좀 하겠습니다. 불효자를 용서하소서. 사랑합니다.

“재미있군······. 그래서, 평행 세계에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노인국에게 접근했다? 그것도 나에게 필요한 아이템까지 준비해서 말이지?”

“그래.”

나의 대답을 들은 흑암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눈이 웃질 않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눈이 없는 건가.

두더지는 원래 눈이 없나? 모르겠다.

‘이번 싸움 끝나고 나면 동물 대백과라도 한 권 사다 봐야겠네······.’

어쩌면 수련을 하는 것보다 동물 다큐라도 잘 챙겨 보는 게 초월자들을 상대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잠시 후, 흑암이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좋은데 말이야······.”

녀석의 입가에 어린 싸늘한 미소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머리가 너무 좋군. 불합격이다.”

흑암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잠시 멈춰있던 스켈레톤과 오우거의 시체,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몬스터들이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 이봐! 머리가 좋은 게 왜 문제라는 거야!”

“나를 찾아온 이유는 충분히 납득이 간다. 하지만 말이야, 나보다 더 강한 자가 있다면, 그자의 밑으로 굴을 옮기지 않겠나. 아니, 언젠가 나보다 더 강해져서 나를 배신할지도 모르지. 역시 인간은 믿을 수 없다.”

이, 이 자식이! 답정너냐!

“그리고 내가 널 부른 것은, 거래 때문이 아니다. 네 놈을 빨리 제거하고 싶어서였지. 뭐가 됐든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놈을 오래 살려둬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았거든.”

“뭐? 그럼 이 아이템들은······.”

그 순간, 땅바닥에서 불쑥 검은 손 하나가 솟아났고,

‘아, 아차!’

- 크르릉!

동시에 나의 머리 위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삼색 영지버섯을 꺼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쾅!

그와 동시에 땅속에서 솟아오른 손이 아이템을 가지고 다시 지면 아래로 사라지고, 가짜 삼돌이가 내 앞을 막아섰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시간을 끈 거였나?”

“큭큭, 그렇다. 네까짓 놈을 죽이겠다고 아이템을 잃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야.”

정체불명의 손에서 아이템을 회수하는 흑암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작아······.’

눈이 있긴 있구나. 하도 콩알만 해서 없는 줄 알았다.

“이제 너에게는 볼일이 없으니, 죽어라.”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냈다고 생각한 두더지가 등을 돌리는 순간,

[ 수하! 준비가 끝났느니라! ]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격 준비 신호가 떨어졌다.

휴, 살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은 맞췄네.

“고마워, 덕분에 나도 준비가 끝났다.”

“그게 무슨······.”

쿵, 쿠궁······.

흑암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거대한 돌산의 깊은 곳에서부터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대지가 부르르 떨렸다.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전해지는 진동에 흑암의 콩알만 한 눈이 공포로 물들었고,

쾅!

이어지는 굉음에 흑암의 목소리가 파묻혔다.

“네 이놈!”

이어서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거대한 ‘불도장’이 떨어졌다.

- 그워어어어······!

- 킥, 키이이이익!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 존재하던 모든 것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어, 어째서 저 괴물이 이곳에 있는 것이냐!”

“괴물이라니! 이 간악한 놈이! 입버릇을 고쳐주마!”

그리고는 돌산의 산봉우리에서 까맣게 변한 고미가 기다란 호를 그리며 날아와 벼락처럼 대지 위에 착지했다.

“흑곰덫!”

고미의 발이 거세게 바닥을 내리찍자,

- 우우웅······.

고미가 좋아하는 ‘웅장한’ 소리와 함께 시커먼 돌산 전체가 바르르 떨리며 허공 위에 시커먼 벽이 생겨났다.

‘헐······.’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방대한 크기의 결계에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어, 어떻게 내 눈을 속이고 이곳까지 잠입한 거지!?”

흑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완두콩만 한 눈을 치켜뜨며 외쳤다.

음······. 아무리 봐도 그 눈을 속이는 건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보이기는 하는 거냐.

“마, 막아라! 막아!”

당황한 흑암이 기다란 손톱을 휘두르며 명령을 내리자, 주위에 늘어선 산봉우리 곳곳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온갖 짐승과 몬스터들의 시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도 수천은 넘어 보이는 숫자.

망자의 군대가 우리를 향해 진격하는 사이, 흑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땅을 파고 들어갔다.

실로 두더지의 명성에 걸맞은 엄청난 속도.

캐릭터성 확실한 거 보소.

“네 이놈! 위대한 이 몸에게서 달아날 수 있을성싶으냐!”

그 순간, 고미가 벽력처럼 호통을 치며 적진을 뚫고 달려갔다.

콰드드득!

녀석이 손을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곰기가 춤을 추고, 산산조각난 뼈다귀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갈색 솜뭉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들을 헤집고 엄청난 속도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흑암의 모습은 이미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나로서는 놈이 어디쯤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 고미! 달아날 수 없는 거 맞지? ]

[ 걱정 말거라, 땅속까지 흑곰 덫이 쳐져 있으니, 설령 이 몸의 코를 피해 달아난다 해도 덫에 닿는 순간 곧장 알아차릴 수 있다! ]

- 크르릉!

바로 그때, 자신의 주인이 위기에 처한 것을 직감한 케르베로스가 고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딜!”

화르륵!

나는 곧바로 흑염대웅신검을 휘두르며 놈의 앞을 막아섰다.

- 크, 크릉!?

눈앞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화염에 가짜 삼돌이의 여섯 개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고미의 흑곰 덫이 강력하다고는 해도, 상대는 초월자다.

시간을 주면 어떻게든 결계를 뚫고 달아날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고미가 흑암을 쫓을 동안 너는 내 몫이다.

- 크오오오······.

그때, 나의 귀에 익숙한 듯 낯선 포효가 들려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맹수와도 다른, 압도적인 위용과 공포감을 선사하는 묵직하고도 힘 있는 소리······.

‘자, 잠깐 이거······.’

고개를 돌려보자, 시커먼 산봉우리 위에서 새하얀 뼈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잇달아 몸을 일으키는 장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들이 나타나는 순간, 노도처럼 몬스터들을 휩쓸며 달려 나가던 고미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 수, 수하! ]

그렇게 고미가 나를 지키러 돌아올지, 계속 흑암을 쫓을지 망설이고 있을 때, 이공간 전체를 뒤덮고 있던 흑곰덫에 돌연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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