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4 흑암을 잡아라(1) 걸렸다, 요놈
“나일세······.”
또다시 반쯤 죽어가는 목소리.
대체 어떤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하길래 이렇게까지 피폐해지는 걸까?
본래 블랙 메이지의 길드원들은 음침하고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별명이 ‘히키코모리 길드’겠나.
하지만 막상 만나보면, 노인국 씨만큼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하긴 뭐, 흑암의 지배자가 온종일 쉬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낙으로 사는 변태 싸이코가 아닌 이상, 그 많은 사람을 일일이 괴롭히기는 어렵겠지.
“어떻게 됐나?”
“만나겠다고 하더군······. 그런데, 정말 자신 있나?”
“뭐, 없어도 별수 있나, 이미 만나기로 했는데. 안 그래? 시간과 장소는?”
자신감이 넘치는 답변에 노인국 씨는 긴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 전보다는 약간이나마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
“삼 일 후 저녁, 장소는 저주받은 숲의 입구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지.”
노인국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줄 것은 없겠나?”
처음으로 나오는 호의적인 반응에 적잖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없어.”
노인국 씨를 신뢰하고 말고를 떠나, 그가 알고 있는 정보가 진실이라는 보장이 없기에 나온 답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는 하수인조차 아니었다.
흑암은 그를 믿지 않는다. 아니,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런 놈이 자신의 약점이 될만한 정보를, 케르베로스까지 보내 감시하고 있는 사람에게 흘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함정이나 아니면 다행이지.’
게다가 나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척 연기를 해두었다.
그러니, 여기서 도움을 구해봐야 그간 쌓아놓은 이미지를 스스로 흔드는 꼴밖에 되지 않지.
굳이 그의 조언을 듣지 않아도 흑암의 능력이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도 했고.
‘어차피 알 수 있는 정보는 이강혁 씨가 다 알려줬으니까.’
이쪽은 속일 수 없는 정보다. 직접 보고 겪은 것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니까.
약간의 오차는 있다 한들, 상대가 의도적으로 판 함정일지도 모르는 거짓 정보를 믿는 것보다는 낫다.
“대신 일이 끝나면 내 부탁이나 몇 개 들어주지 그래.”
“큭큭······. 얼마든지 그렇게 하지. 하지만 일을 시작하기 전에 조건을 거는 것도 아니고, 의외로 순진하군그래.”
“글쎄, 흑암의 지배자를 이긴 나한테 거짓말을 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겠지.”
싸우기도 전부터 승리를 장담하는 듯한 말에 수화기 너머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그 말은 무슨 요구를 하든 들어줘야 한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이 없었다.
“끌끌, 그것도 그렇군. 너무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노인국 역시 내 말을 정확히 이해한 듯싶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통화를 마쳤고,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는 이미 결전의 날이었다.
* * *
삼 일 후, 안산의 저주받은 숲 던전 입구.
“왔군. 정말 내가 도울 게 없나?”
노인국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자기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한없이 평온하면서도 강인한 눈빛.
이 결전에서 내가 패한다면, 자신도 목숨을 잃을 테니까.
애초에 나와 손을 잡기로 한 시점부터 그에게 남은 것은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었다.
어쩌면 자살을 하기 전 마지막 발악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결정.
물론, 나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다.
그래도 한때 임상 심리학자를 꿈꿨는데, 내담자가 자살을 하게 놔둘 수는 없지.
“뭐, 나름대로 다 계획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 괜히 따라와서 죽으면 이기고 나서도 나한테 남는 게 없으니 얌전히 승전보를 기다리라고.”
아이러니하지만, 그의 목숨이 달린 싸움임에도 이번 결전에서 노인국이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그의 능력 대부분은 흑암의 지배자에게 받은 것이니, 데리고 가봐야 도움도 안 되고 애꿎은 목숨만 잃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죽으면 자유이용권 티켓도 완성할 수 없으니, 이쪽에 남겨두는 편이 낫지.
“이봐, 너무하는군. 손도 못 쓰고 결과만 기다리는 사람 입장은 생각도······.”
순식간에 엑스트라로 전락해버린 노인국이 당황한 듯 자신에게도 뭔가 역할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을 때······.
- 지이이잉.
기이한 소리와 함께 공간이 뒤틀리며 시커먼 소용돌이 같은 게이트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아, 곧 누가 여기 올 거야. 당신 목숨을 건져주기 위해 오는 친구들이니까, 막지 말고 잘 보내주라고. 그게 당신 역할이야.”
“뭐? 하지만 이 게이트는 곧 닫힐······.”
말을 마친 나는 노인국의 답을 듣지도 않고 살곰살곰으로 모습을 감춘 고미와 함께 게이트 안으로 발을 옮겼다.
* * *
게이트를 지나 도착한 곳은, 시커먼 바위로 뒤덮인 거대한 돌산이었다.
“운이 좋네.”
‘산신령의 진짜 가호’는 산악 지형에서 10%의 능력치 상승과 스킬 효과 보정을 제공한다.
오랫동안 쓸 일이 없었던 칭호 효과지만, 전쟁의 무대가 산이라니, 하늘마저 고미와 놀이공원에 가라고 도와주는 느낌이군.
[ 역시, 이 흑암이라는 놈이 어둠의 군주였구나. ]
바닥에 납작 엎드린 고미가 자그마한 코를 연신 킁킁거리며 중얼거렸다.
[ 이놈이 네가 찾던 그놈이야? ]
노인국 씨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고미는 그의 배후가 ‘어둠의 군주’일 것으로 추정한 바 있었다.
노인국 씨가 흑암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도 거기서 비롯된 거고.
그 후로는 딱히 언급이 없었지만, 뭐······. 그게 고미가 아는 것의 전부였으니까.
[ 그렇다, 예전에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지. 드디어 이놈을 찾아냈구나. ]
하지만 만수왕을 애꾸로 만들어준 것과는 달리, 흑암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을 어지럽히다가 자신이 나타나니 슬그머니 종적을 감췄다고.
함정을 파고 미끼를 뿌리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방식은 고미와는 맞지 않으니, 무력에서는 앞서도 이놈을 잡지는 못했던 거겠지.
말하자면, 상성이 안 맞는 적이랄까.
몸이 너무 좋아 머리 굴릴 일이 없는 고미에게는 가장 까다로운 적이었을 거다.
[ 과연, 위대한 이 몸의 제자답구나. 정말로 이 음흉하고 간사한 놈을 찾아내는 데 성공할 줄이야. ]
돌산의 봉우리를 훑어보는 고미의 눈이 사냥감을 찾는 맹수처럼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 비겁한 놈, 반드시 잡아서 아주 혼쭐을 내줄 것이니라. 누구도 이 몸이 놀이공원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
마음은 이미 놀이공원에 가있구만······.
초월자와의 전쟁을 목전에 두고도 놀 생각에 정신이 팔린 고미의 모습에 나도 적잖이 긴장이 풀어졌다.
“네가 감히 나에게 거래를 요구한 건방진 인간이냐?”
그때, 저 멀리 어디에선가 음침하고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오며 꿀태창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오자마자 장난질이냐.’
하지만 들리는 건 목소리뿐, 상대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거리도 너무 멀고 메아리까지 울려 위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 나는 아무런 이상도 못 느끼는데, 꿀태창은 계속 반짝인다.
케르베로스가 정신지배를 시도할 때와 똑같은 상태.
아마 환술을 사용해 실제로는 자리에 나오지 않으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나를 속이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정말 의심이 많네. 자기 공간에 불러놓고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시작부터 상대가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놈이 모습을 드러내면 바로 고미가 나타나 제압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놈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얼굴은 좀 보고 얘기하지. 예의가 없군.”
“······.”
나의 대답에 흑암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놈, 대체 정체가 뭐냐?”
“정체가 어딨어. 그냥 물건팔러 온 거지.”
“큭큭큭, 갑자기 나타난 놈이 SS급의 정신 방벽 스킬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그 말을 듣는 순간, 흑암의 환술이 SS급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케르베로스는 나에게 정신지배 스킬을 사용하려다 실패했다.
당연히 이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고.
그런데도 환술을 걸려 했다는 건, 케르베로스의 정신지배보다 자신의 환술의 등급이 높거나, 내가 가진 스킬이 ‘모든 정신 계열 스킬’을 차단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거지 같네. 이봐, 네가 아무리 초월자라고 해도······.”
“죽어라.”
······.
이분도 성격에 문제가 있군. 초월자들은 다 이런 건가.
그야말로 문답무용.
놈은 아주 조금의 의심만으로 나를 제거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직접 당하니 황당하네.’
- 그워어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오우거의 시신들이 솟아났고, 검은 돌무더기로 보였던 물체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 수하! 안 되겠다! ]
고미는 곧바로 주먹을 바르쥐며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너무 급하다.
'역시, 상성이 좋지 않네.'
이런 성격 때문에 이 의심 많은 놈을 못 잡았던 거겠지.
[ 안 돼, 고미. 조금만 기다려. 놈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나서지 마. 그리고, 플랜 B로 가자. ]
지금 모습을 드러내면 어렵게 찾은 자유이용권 파편 3은 이대로 달아날 거라고.
[ 플랜 B라면······. 그레이트 베어 작전이구나! ]
음······. 그런 의미로 B라고 말한 건 아닌데, 그걸 그렇게 이해했구나.
어쨌든 알아듣기는 했으니 됐다.
이후 고미는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 돌산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미친놈.”
나는 히드라의 독주머니와 큐브를 바닥에 던진 뒤 흑염대웅신검을 꺼내 들었다.
“이게 갖고 싶은 게 아니었나 보지?”
- 화르륵!
검붉은 화염을 내뿜는 구불구불한 쇠막대를 독주머니 가까이 대자, 나를 향해 다가오던 시커먼 해골과 반쯤 썩어버린 오우거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필요 없으면, 그냥 태울까?”
의심하고,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몇 번이고 자신의 계획을 확인한다.
만나보니 더욱 확신이 든다.
이놈은 중증 편집증 환자인 동시에, 강박증까지 앓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병적일 정도로 의심이 많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다.
‘얼핏 보기에는 빈틈이 없어 보이지만, 너무 치밀하다는 게 문제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작은 톱니바퀴 몇 개만 망가뜨려도 ‘그러려니’하고 넘어가질 못하고, 계획이 모두 무너질까 걱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심이 많은 놈이 거래에 응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거다.
첫째, 이 두 개의 아이템이 자신의 계획에 꼭 필요하다.
둘째,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나를 죽이거나, 최소한 달아날 자신은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내 전투력을 가늠해 보는 과정이겠지.’
자신이 병력을 내보내면, 나도 감춰둔 무기를 꺼내거나 내 힘을 보여줄 수밖에 없고, 그걸 보고 나서 퇴각을 할지 모습을 드러낼지 확실히 정할 생각일 거다.
“크크크큭······. 하하하하!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고작 그 정도 힘으로 나에게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흑염대웅신검의 불꽃을 확인한 녀석은 자신감을 얻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맞설 수는 없지만, 네가 필요로 하는 아이템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나의 대답에 흑암은 웃음을 뚝 그치고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는······.
검은 돌산의 바닥이 물결치듯 일렁이며 그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이 불쑥 솟아났다.
‘진짜 교활하네. 목소리는 네크로맨시 스킬을 이용해서 다른 쪽에서 내고, 사실은 바닥에 숨어있었던 거야?’
하지만 아무리 얍삽하고 신중한 놈이라도, 진짜로 자기보다 약한 놈이 자신을 잡으러 왔다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겠지.
잠시 후, 끈적한 액체처럼 기분 나쁜 질감을 가진 그림자가 꿀렁이며 아주 익숙한 형상으로 변화했다.
“그래, 좋다. 원하는 게 뭐지?”
흑암의 정체를 보는 순간,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