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6 대트롤 프로젝트의 전모
“어떻게 할까요? 지금 전화해 볼까요?”
“네, 일단 얘기는 들어봐야죠.”
노인국이 정신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게 거의 확실해진 상황에서는 더더욱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그의 요구는 실상 본인이 아니라 흑암의 의중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아……. 한유진인가…….”
한유진 씨가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전환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거친 숨을 헐떡이는 노인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이제 막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거칠고, 탁했다.
“거래… 조건을… 조금……. 바꾸고 싶은데 말이야…….”
노인국은 입을 떼는 것조차 힘든 듯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말씀하시죠.”
“가능하다면… 히드라의 독주머니를 먼저… 받을 수는 없겠나……? 나머지는… 최진웅과… 직접 얘기를 하고 싶군…….”
앞부분은 얘기를 들어보아야겠지만, 뒷부분은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애초에 첫 번째 던전을 돌 때 그렇게 떡밥을 뿌려댄 이유도 그거였고.
“저한테 얘기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한유진 씨는 노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곧바로 그러라고 한다면, 애써 최진웅의 한유진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인상을 준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됐네, 내일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지…….”
뚝.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하자, 노인국은 두말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일단 떡밥은 물었네요.”
“네, 그럼 내일 계획대로 움직여 주세요.”
나의 말에 한유진 씨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노인국은 최진웅과 ‘단둘만’ 남게 될 것이고, 그 자리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어쨌든, 지금까지 얻은 단서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케르베로스는 미완성이다.
둘째,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흑암의 지배자는 케르베로스의 완성을 상당히 서두르고 있다.
“그럼 갈까요?”
고개를 돌리자, 제르보나와 이유찬 씨가 말없이 탑승 대기자들을 훑어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음, 확실히 양심 없는 인원이긴 하지.
곰돌이 삼형제와 수다르, 토생원이야 모두 쪼꼬미 계열이라 숫자가 좀 늘어도 괜찮지만, 늑대들의 크기가 만만치 않으니까.
“저기……. 토생원 님, 혹시 게이트를 열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인원을 모두 태우고 몇 시간을 날아야 한다는 사실이 적잖이 부담이 됐는지, 이유찬 씨는 머리를 긁적이며 게이트를 열어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는 게이트를 그렇게 많이 만들어두는 편은 아니라서요……. 어차피 바깥에 나갈 일도 거의 없고……. 인간들이 저에게 올 일도 없으니까요.”
토생원의 표현에서 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게이트를 ‘만들어 둔다’고?
“그게 무슨 소리죠?”
“아, 심연이나 황금은 본래 마법사인 데다 마력이 넘치는 자들이니 어렵지 않게 게이트를 열 수 있지만, 나머지는 조금 사정이 다릅니다.”
토생원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게이트를 여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인가요?”
“네, 저 같은 경우에는 순수하게 아이템에 의지해 게이트를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을 공격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게이트나 던전을 만들 시간에 연금술을 연구하는 편이지요.”
게이트나 던전과 관련된 것은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던 내용 중 하나였다.
‘트롤 프로젝트’를 보다 완벽하게 성공시키려면, 게이트와 던전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좋았으니까.
게이트나 던전이 이계의 존재들이 생성하는 일종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상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왜 게이트나 던전별로 특성이 다르고, 안정화되는 데 필요한 시간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온갖 추측만이 난무할 뿐,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동이님을 만나려고 했지만, 알틴의 상태가 좋지 않아 게이트를 열 수가 없었다.
그런데 토생원이 이런 고급 정보를 제공해줄 줄이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공간과 관련된 이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특별한 장치나 아이템이 없다면 게이트나 던전을 열기 위해 필요한 마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특히 인간들이 폐쇄형 던전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려면 이공간의 출입구를 따로 만들고 그 외의 공간은 전부 봉인해야 하니, 여간 손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군, 그래서 같은 등급이라도 폐쇄형 던전의 클리어 난이도가 높은 건가.
그 정도 자원을 들여서 만든 던전이라면 당연히 개방형 던전보다 중요도도 높겠지…….
또 하나, 이 정보를 기반으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고미가 엉곰엉곰으로 폐쇄형 게이트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원리가 이거였군…….’
봉인된 구역이 벽이라면, 고미는 그것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겠지.
이 능력을 잘 연구하면, 고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고…….
‘이거 흥미로운데.’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토생원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게이트는 손이 훨씬 덜 가는 편이지만, 단순한 정찰이나 파괴 외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해서 만수왕 같은 자들은 게이트를 여는 것을 선호하지요. 어차피 파괴와 살육 외에는 큰 흥미가 없는 자이니까요.”
만수왕도 성격에 문제가 많구나.
하긴, 고미한테 얻어터진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가만히 토생원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초월자를 잡으면 원하는 장소에 게이트나 던전을 생성하게 하는 것도 가능한 거죠?”
우리의 결론은 ‘가능하다’였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수다르 님을 죽이기 위해 지리산을 던전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용궁을 찾기 위해 해상 게이트를 여는 일 따위는 불가능할 테니까.
다만, 그 추측이 사실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었다.
가설이나 추측에 고미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네, 그거야 그렇지요……. 하지만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인간들은 지금 열리는 게이트와 던전도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요. 대균열의 분열 시기에는 자연적으로 생기는 던전과 게이트도 많으니 말입니다.”
“다행이다…….”
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말하자, 토생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커다란 귀를 쫑긋거렸다.
“네? 그것이 어째서…….”
“아, 저희 계획이 초월자를 잡아서 던전이나 게이트를 만들게 하는 거거든요.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시기도 조절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대트롤 프로젝트’의 내용을 들은 토생원은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는 듯 빨간 눈을 깜빡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의 계획은 간단했다.
고미의 말에 따르면, 대균열은 강제로 모든 차원문과 공간 통로를 한군데로 모아두는 차원의 교차로라고 했다.
그러다가 압력이 너무 커지면, 대균열이 붕괴되면서 그 통로나 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버리는 거고.
바로 이때가 초월자들이 다른 차원을 점령하거나 침략할 수 있는 시기이자, 고미가 교통정리(?)를 위해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니까, 충분한 수의 게이트나 던전을 파괴하면, 압력이 줄어들어서 다시 대균열이 기능을 찾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고미는 다시 대균열을 지키러 가야 하는 거고. 그렇죠?”
나의 말에 토생원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천천히 눈을 끔뻑였다.
“으음, 그렇지요…….”
“그래서 저희는 흑암의 지배자같이 위험한 초월자를 잡아서 그 압력을 유지할 생각이에요. 그럼 대균열도 계속 붕괴해 있을 테니까요.”
한편, 고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동글동글한 귀를 움찔거리며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대균열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자신의 의무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 말대로 모든 게 잘 풀려서,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자신도 현세에 남아있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 생각이다.
‘위대한 곰은 오늘도 외롭게 던전을 지키고 있답니다.’같은 새드엔딩은 싫으니까.
“그, 그러니까 마, 만수왕이나 흑암처럼 공포스러운 자들을… 포로로 잡아둘 생각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토생원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되묻자, 고미가 진지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 매일 매일 군만두라는 것을 주고 게이트와 던전을 만들게 할 것이니라. 그런 악랄한 놈들은 제 차원으로 돌려보내 봐야 악행만 저지르지 않겠느냐? 차라리 이곳에 붙잡아두는 편이 세상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라.”
사실 고미의 말은, 내가 녀석을 설득하려고 한 말이었다.
자신이 현세에 남아있어서 많은 사람이 불행해진다면, 아무리 슬프고 외로워도 대균열로 돌아가겠다는 게 고미의 입장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은 고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대충 꾸며낸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런 거짓말로 속여봐야 언젠가는 들통이 날 테고, 그렇게 해서는 고미를 진짜로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을 테니까.
만수왕이 자기 차원에서 정확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다른 세계를 침공했다가 고미에게 패배하니 부하들을 모두 버리고 혼자 달아났다는 것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만수왕의 군대에는 ‘노예 부대’까지 존재했다고 하니, 악랄한 폭군인 건 거의 기정사실이지.
그런 놈을 자기 차원으로 돌려보내면 또 나쁜 짓을 하다가 대균열이 붕괴되면 다른 차원을 침략할 게 뻔하다.
“무, 무섭지만… 가슴이 뛰는 일이군요. 그 사악한 놈들에게 벌을 줄 수 있다니…….”
토생원의 새하얀 솜털이 긴장과 흥분으로 바짝 곤두섰다.
만수왕과 흑암을 가둬둔다는 말에 이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그동안 삥이라도 뜯기신 건가…….
뭐, 무력 캐릭터가 아니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지.
토끼의 천적은 호랑이기도 하고.
“이 토생원, 연구에 박차를 가해 반드시 힘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마친 토생원은 품에서 포션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일시적으로 체력과 힘을 증가시켜주는 포션입니다.”
그러니까, 저게 비행기 값이다 이거군.
“그리고 앞으로 고미 님의 동료분들에게는 기존 가격의 반값에, 제가 직접 만든 포션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반값……. 음, 확실히 파격 할인가이기는 한데, 돈을 받기는 받으시는구나.
그래, 무임금 무노동 원칙은 초월자에게도 지켜져야지.
그게 바로 된 세상이다.
“진짜요?”
게다가 한유진 씨의 반응으로 보아, 그 반값이라는 것도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인 모양이었다.
하긴, 포션 값만 반으로 줄여도 길드 자금 사정이 몇 배는 넉넉해지겠지.
“제르보나, 유찬아, 뭐해, 빨리 VIP 안모시고.”
한유진 씨의 말에 제르보나는 별다른 반응 없이 드래곤으로 변해 손님(?)들을 실었고, 이유찬 씨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도 등을 내어주었다.
* * *
이후 우리는 수다르님과 토생원, 그리고 네 마리의 늑대를 지리산에 내려준 뒤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포션을 마셨다 해도 커다란 늑대를 네 마리나 싣고 날아다니는 것은 적잖이 피곤한 일이었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이유찬 씨와 제르보나의 날갯짓은 상당히 힘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반쯤 녹초가 되어 있었다.
어깨에는 고미가 타고 있고, 절대 제 발로 걷지 않는 다웅이는 품 안에 안지 않으면 이동이 불가능했으니까.
아웅이가 어른스럽고 부지런한 녀석이라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으음…….”
게다가 고미는 다웅이에게 뭔가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지, 시시때때로 다웅이를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음, 고미랑 다웅이도 좀 더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게다가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살기에는 집도 좁고……. 빨리 이사도 가야겠는데…….’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아들! 왜 이렇게 늦었어, 오늘 아빠가 말이지, 응?”
무언가 할 말이 있으셨던 것 같은 아버지는 곰 세 마리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아웅!”
아웅이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고, 다웅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도로롱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품 안에 안겨 그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
“여, 여보! 고미가 셋이야! 고미가 분신술을 썼나 봐!”
어, 어떻게 알았지. 이게 고미의 분신들이라는 걸…….
물론,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아버지의 이상한 소리는 묘하게 적중률이 높단 말이지.
당황한 아버지가 횡설수설하며 어머니를 부르자,
“또, 또, 실없는 소리 한다. 우리 막내가 어떻게…….”
언제나처럼 핀잔을 주면서도 얼굴에는 싱글벙글 웃음을 띤 어머니가 방안에서 나오셨다.
“응? 수하야, 이게 어떻게 된 거니?”
그리고 곰돌이 삼 형제를 발견한 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여는 순간,
“다, 다웅!?”
품 안에 안겨 있던 다웅이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