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2 갓-고미님의 물리치료
땅에서 솟아난 듯 갑자기 나타난 아기곰의 모습에 괴물로 변한 토생원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뭐지? 이 이상한 놈은? 아니, 그보다 네놈, 언제부터 나의 화원에 들어와 있던 것이냐?”
고미를······ 몰라?
초월자나 신령한 존재들은 모두 고미를 아는 거 아니었나?
“저, 토생원씨······.”
혹여 고미에게 맞아 죽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빌라고 말하려는 찰나,
“무엇이냐 수다르, 설마 드래곤조차 초월한 이 몸을 이깟 주먹만 한 곰 따위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토생원이 자살을 시도했다.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 알아서. 제 발로 관 짜고 드러 눕겠다는데······. 고미도 죽이지는 않겠지. 대균열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저 녀석에게 꼭 알아내야 할 게 있으니까.’
“에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토생원의 언행에 이유찬 씨의 입에서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중에서 고미의 꿀주먹을 직접 맛본 유일한 사람이 이유찬 씨니, 그 달달함 역시 가장 잘 이해하고 있겠지.
“죽이면 안 돼. 알지?”
“고미님, 그자를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다르와 내가 주의를 주자, 고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 초월자가 된 나를?! 이깟 능소니가!?”
우리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토생원은 또다시 열등감이 폭발해 2미터 가까이 자라난 앞다리를 휘둘렀다.
쉭-
마른 가지처럼 앙상한 놈의 앞다리가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채찍 같은 잔영을 남겼고,
콰드드드득-
팔이 휘둘러지며 발생한 날카로운 돌풍에 화원의 지면에는 거대한 고랑이 생겨났다.
“느리구나.”
하지만 고미는 그 공격을 피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녀석의 앞다리 위에 사뿐히 올라탔다.
“고작 이따위 힘을 얻었다고 그리도 기고만장해 있던 것이냐?”
“어, 어떻게!”
당황한 토생원이 한 번 더 앞발을 휘두르자, 초콜릿색 솜뭉치가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솟아올랐다가 우아하게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착지했다.
음, 우리 애가 요즘 멋에 눈을 떴나······.
어째 액션이 갈수록 화려해지네.
“약으로 몸을 강화했을 뿐, 수련이 전혀 되어있질 않구나. 동작이 너무 크지 않느냐. 근성이 썩어 빠진 놈다운 형편없는 주먹질이로다.”
고미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자, 분노한 토생원은 엄청난 속도로 두 앞발을 번갈아 휘두르며 앞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고미의 말대로, 수행이 너무 부족했다.
아니, 이건 부족하다는 말도 칭찬이다.
‘막 주먹이네.’
그저 양팔을 마구 휘두를 뿐인, 기본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공격.
물론 그런 근본 없는 공격이라도 S급 이상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단순한 막 주먹은 아니지만.
파파파팟-!
압도적인 팔길이, 눈이 따라갈 수 없는 엄청난 속도,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울리는 천둥 같은 굉음.
강화된 신체능력만으로도 토생원의 주먹은 충분히 강력했고, 잔영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수백 개의 주먹이 고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흠······.”
하지만 고미가 여름밤 모기를 쫓는 것처럼 가볍게 손을 휘휘 젓자, 그 수백 개의 주먹이 모조리 튕겨 나갔다.
“와······. 역시 고미 님은 차원이 다르네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유진 씨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내가 괜히 한 방에 누운 게 아니라니까.”
이유찬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꿀 주먹의 맛을 회상하자,
“넌 조용히 있어. 까불다 얻어 터진게 뭘 자랑이라고.”
제르보나가 한심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시시하구나.”
이어서 고미가 가볍게 앞으로 손을 내밀었고, 바위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토생원의 몸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헉!”
너무나도 뻔한 결과.
“어, 어떻게······.”
일격에 다리가 풀린 토생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고미를 바라봤다.
그때, 고미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놈의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제 약속대로 혼쭐을 내주마.”
서늘한 한마디에 이어 고미의 솜방망이가 토생원의 커다란 두 귀를 덥석 붙잡았다.
“아아악! 네, 네 이놈! 감히 나의 귀······”
쩡!
토생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그마한 아기곰이 제 몸의 몇 배는 되는 괴물을 들어 올렸다가 거세게 바닥으로 내리쳤다.
퍽!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쩌정!
고미의 ‘패대기 쇼’가 펼쳐질 때마다 바닥에는 거대한 균열과 깊숙한 구덩이가 생겨났고,
“끄······ 끄륵······.”
비명을 지를 힘조차 잃어버린 토생원은 입에서 붉은 선혈을 토하며 그대로 정신을 놓고 말았다.
“흥, 비겁한 놈. 수하와 수다르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더욱 혼을 내줬을 것이다.”
토생원을 혼내준 고미는 조금은 기분이 풀린 듯 두 손을 탁탁 털며 우리를 바라봤다.
“죽이지는 말라고 하여 주먹으로 때리지는 않았다.”
보통은 저게 더 심하게 다치지 않나······. 어째서 주먹으로 때리는 게 더 센 건데······.
* * *
“으, 으음······.”
몇 시간 후, 기절했던 토생원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솔직히 바닥에 열 번쯤 내리쳐졌을 때는 저러다 죽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고미의 힘 조절이 절묘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물론, 땅이 꺼질 정도로 패대기가 쳐졌으니, 처음에는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산신령님이 침을 놓고 탕약을 먹이자, 몸은 못 가눠도, 눈을 뜨고 말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회복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를 죽이려던 사람인데, 천생 의원이시구나.’
“아아, 아아······.”
간신히 눈을 뜬 토생원은 우리를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싫어하던 ‘비루한 토끼’로 돌아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토생원의 본 모습은, 고미와 비슷한 크기의 새하얀 토끼였다.
“아아, 안돼······. 보지 마, 보지 말란 말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토생원은 귀를 접고 머리를 감싸 쥔 채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학대받은 동물처럼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공포에 질려버리는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딱한 마음이 들었다.
“토생원, 어서 일어나십시오.”
“주, 죽여. 차라리 날 죽여다오······. 제발 부탁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토생원이 수다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며 애원했다.
“어이, 염치도 없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쳐 날뛰더니, 약속도 안 지키고 죽겠다고?”
인간 형태로 돌아와 있던 제르보나가 다시 반인반룡의 형상으로 변하며 말했다.
“그, 그래. 너는 내가 밉구나. 그러니 어서 죽여다오.”
토생원은 구원을 얻은 사람처럼 제르보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자신을 죽여달라고 간청했다.
“시끄러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네가 죽고 살지는 그다음에 결정할 테니까.”
하지만 제르보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렇게 쏘아붙이며 나를 바라봤다.
“수하님, 이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는, 공이 나에게 넘어왔다.
“토생원님, 약속을 지켜주시죠.”
나의 말에 토생원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모든 걸 잃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내 화원? 포션? 모두 가져가거라······. 그리고 나를 죽여다오.”
우씨, 뭘 말끝마다 죽여달래 자꾸. 누굴 살인마로 아나.
“당신, 초월자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죠?”
“그게 목적이었나? 그래, 모두 말해주마. 그러니 깨끗이······.”
토생원이 다시 죽여달라는 말을 꺼내려 하자,
“네 이놈!”
참고 있던 고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너를 살려준 수다르 앞에서, 감히 죽여달라는 말을 하다니! 얼마나 더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고미의 호통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토생원은 더이상 죽여달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무릎을 꿇었다.
“무, 물어보고 싶으신 게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수다르님을 죽이려고 한 초월자가 대체 누구죠?”
“마, 만수왕과, 흑암의 지배자, 그리고 황금의 군주입니다.”
나는 토생원의 말을 듣는 내내 감각을 활성화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일단,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황금의 군주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이강혁 씨와 동이님에게 받은 정보를 종합해보자면, 셋 다 인류의 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특성상 다른 종족과 손을 잡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게다가 동이님과 대립하고 있는 와중에 이쪽에도 벌써 손을 쓰고 있을 줄이야.
“초월자들에게 아이템을 파셨다죠?”
“그,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파셨나요?”
구매자에 대해 묻자, 토생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초월자 중에 제 아이템을 사 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 봐라······?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노셨네.
“그럼 흑암의 지배자에게는 뭘 파셨죠?”
나는 가장 먼저 흑암의 지배자에 대해 물었다.
가장 먼저 만나야 할 것은 역시 그 중2병 걸린 초월자니까.
“키메라를 만드는 데 쓰이는 포션들과 마력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들을 팔았습니다.”
“키메라요? 뭘 만드는지는 알고 있나요?”
“케르베로스······입니다.”
“흥, 그럴 줄 알았다. 역시 가짜를 만들고 있었구나.”
그때, 고미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얼마 전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 고미는 그게 진짜 케르베로스가 맞느냐고 물었었다.
하지만 이강혁 씨는 직접 불을 뿜는 머리 셋 달린 개를 봤다고 말했고, 이에 고미도 마지 못해 수긍을 했었다.
그런데 이강혁 씨가 틀리고, 고미가 맞았다니······.
“고미, 그걸 어떻게 알았어?”
“삼돌이와는 두 번 정도 마주친 적이 있느니라.”
사, 삼돌이······ 삼룡어멈 만큼이나 구수한 호칭이군.
“삼돌이는 성격은 괴팍하지만, 충직한 놈이었느니라. 명계의 수문장답게 실력도 제법이고, 자존심도 강했다. 무엇보다 신의를 아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문어 할아범 따위를 따라다닌다니, 진즉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느니라.”
진짜 케르베로스를 안다는 고미의 말에 토생원의 눈은 진짜로 놀란 토끼 눈이 되어버렸다.
“능소니 님께서는 대체 누구시길래······. 진짜 케르베로스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훗······.”
토생원의 질문에 고미의 꼬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하겠군. 그거.
“정말 이 몸을 모른단 말이더냐?”
“네, 도통 짚이는 것이 없습니다······.”
“훗, 놀라지 말 거라.”
역시.
“이 몸이 바로, 고미니라. 너도 비실비실하기는 하나 초월자 중 하나이니, 한 번쯤은 위대한 이 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겠지?”
저 녀석, 은근히 자기 소개하는 걸 좋아한단 말이지.
하지만 그 자신만만한 소개 멘트를 들은 토생원은 조금 전 얻어터진 것을 잊어버린 듯,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고미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만, 어찌 대균열의 수호자의 이름을 참칭 하시는지요.”
“뭐, 뭣이!?”
졸지에 가짜 취급을 당한 고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허허, 토생원님, 이분은 진짜 대균열의 수호자, 고미님 이십니다. 어찌 토생원 님께서 고미님을 몰라보신단 말입니까?”
수다르까지 나서서 고미가 진짜 수호자라고 말하자, 토생원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수다르와 고미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그럼 제가 만난 것은 누구란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