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1 결착
[ 수다르, 일어나라. 이 몸에게 지지 않겠다 맹세하지 않았더냐. ]
고미가 선혈을 토하는 수다르를 바라보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 어서, 일어나라! 이 몸에게 수다르가 천하제일의 단약사라는 것을 보여다오! ]
“허허허······. 걱정 마십시오, 이 수다르, 제 길을 증명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몸을 일으킨 수다르는 새하얀 도포로 검붉은 피를 닦아낸 뒤 평온한 표정으로 화원을 둘러보았다.
“그럼 수하님, 이번에는 톱날 같은 이파리가 넉 장에, 하얀색 꽃이 피어있고, 냄새는 인삼과 비슷한 약초를 좀 찾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차분하게 필요한 약초의 생김새와 특징을 일러주었다.
독으로 인해 쇠약해진 탓일까,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목소리에서 나는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느꼈다.
필요한 약초의 종류는 무려 열 가지가 넘었고, 나는 물론이고 고미마저 찾는 데 애를 먹을 정도로 모양이나 냄새가 비슷한 약초가 많았다.
심지어 약초의 양도 너무 적어 모래 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작업이었다.
‘빨리, 빨리, 이러다가 산신령 님이 죽겠어.’
조급해진 삼룡이 패밀리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수천 가지의 약초가 가득한 화원에서 원하는 물건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약초를 찾느라 애를 먹고 있는 사이, 토생원은 자신의 단로 앞에 앉아 해독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상한 점은, 놈의 안색이 이상할 정도로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안색이 조금 변하고,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리고는 있었지만, 그 외에 특별한 이상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독약 선물 세트를 직접 먹어본 적이 있는 나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게 있다.
‘말도 안돼. 수다르 님의 독약을 먹고 저렇게 멀쩡할 수는 없어.’
게다가 이번 독단 대결에서는 분명히 그보다 더 강력한 비장의 수를 썼을 텐데······.
‘괜찮아. 믿는 거야. 첫 번째 대결도, 두 번째 대결도, 모두 산신령 님 손바닥 안이었잖아. 이번에도 그럴 거야.’
나는 불안한 마음을 부여잡고 산신령님이 부탁한 마지막 약초를 찾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정신을 집중해 필요한 약초를 찾는 거니까.
“찾았다! 찾았어요!”
나는 황급히 약초를 가지고 수다르 님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마지막 약초를 받는 산신령님의 상태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이상했다.
지금 그는 마치 눈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나의 손을 더듬거리며 약초를 받고 있었다.
“사, 산신령님······. 설마 눈이······.”
“허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인자하게 웃음을 짓는 산신령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승부의 내용이 이런 거라는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다른 방법을 찾았을 텐데.
아니, 적어도······.
“허허, 수하님. 이 승부는 저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승부를 주선해준 수하님에게 감사하고 있으니, 마음 쓰지 마시지요.”
눈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귀신처럼 나의 감정을 읽어낸 산신령님은 되려 나를 안심시키며 차분하게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대결을 시작한지 벌써 한 시간이 넘게 지났다.
두 시간이면 죽음에 이르는 독을 만들고, 그 시간 내에 해독을 하기로 했으니, 이제 남은 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산신령님의 탕약은 여전히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반면 토생원은 이미 완성된 해독제를 손에 든 채 번들거리는 눈으로 수다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해독제를 안 먹지?’
겪어봐서 알지만, 산신령님의 독은 저렇게 손에 해독제를 들고도 마시지 않고 버틸 만큼 만만한 게 아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구역질이 치밀고, 손발이 굳어간다.
독에 따라서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지는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할 수 있지?
‘설마 애초에 만독불침이라던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분노로 인해 절로 손발이 떨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두 번째 대결에서도 그렇고, 제대로 된 방식으로 승부를 볼 마음은 없었던 거냐.
네가 최고의 연금술사임을 증명하겠다더니.
바로 그때,
[ 수하, 진정해라. 너와 내가 나서서 저 토끼 놈을 죽인다면, 이는 수다르를 돕는 것이 아니라 녀석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다. ]
고미가 차분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내왔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녀석의 눈은 나보다 더 싸늘하게 얼어있었다.
마침내 수다르의 탕약이 완성되는 순간, 토생원이 입을 열었다.
“수다르, 패배를 인정해라. 그럼 해독제를 주마. 그것으로는 결코 그 독을 해독할 수 없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여기서 죽기에는 네 재능이 너무나도 아깝구나. 내가 최고의 연금술사라는 것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라. 그리고 수다르 4세의 잘못을 인정하고, 네 가문의 비전을 모두 나에게 넘겨라.”
뭐지, 자기가 수다르 4세의 불로초를 훔친 게 아니었나? 그런데 왜 수다르 4세가 잘못을 한 것처럼 말을 하는 거야?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두고 계신 것입니까?”
“전해 들은 바가 있는 모양이구나. 네 선조는 나를 배신했다. 그리고 지금, 네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나마 나의 스승이었던 자, 배운 것도 적지 않지. 그러니 특별히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지금 그 독은 너의 선조와 내가 연구한 것을 발전시킨 것이다. 지금 네 실력으로는 결코 해독할 수 없다.”
“허허허, 수다르 가문의 가장 위대한 천재, 수다르 4세의 독약이라니······. 하지만 벽이 높다 하여 넘는 것을 포기한다면, 저의 길은 거기서 끊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다르의 말에 잠시나마 누그러들었던 토생원의 눈에 다시 광기가 깃들었다.
“흥! 그럼 너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감히 주제를 모르고 이 토생원에게 도전한 본보기로 말이다.”
아니,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도전은 당신이 했······.
“쿨럭!”
그 순간, 탕약을 마신 수다르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하며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산신령님!”
“괜찮으십니까!?”
“산신령님!”
“괘, 괜찮으세요!?”
[ 수다르! ]
다급해진 우리가 자신을 부르자, 수다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고, 눈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로 오직 감각에 의지해 스스로 침을 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산신령님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침을 놓기 전보다도 더 많은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이, 이! 빌어먹을 놈이!”
그 모습에,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토생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는 것이냐!”
반면 수다르의 얼굴은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홀가분했다.
“비루한 몸뚱이에 깃든 과분한 것을 덜어내는 중이지요.”
“이, 이 미친놈! 수다르 가문 천 년의 역사가 깃든 보혈을!”
이어서 수다르의 안색이 평상시와 같이 돌아왔고, 흐려졌던 눈도 다시 빛을 되찾았다.
“사, 산신령님! 괜찮으신 거죠?”
나의 질문에 산신령님은 평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가 똑바로 나의 눈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각도 돌아온 게 분명했다.
“휴······.”
산신령님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 토생원. 나는 독을 모두 풀어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수다르의 물음에 토생원은 분한 듯 이를 갈며 손에 들린 해독제를 들이켰다.
“흥! 어째서 이런 평범한 독을 쓴 것이지?”
그리고는 모욕을 당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따위 독으로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을 터,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한 것이냐!”
“내 목적은 당신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지, 당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겨운 놈! 또다시 연단사의 도리니 뭐니 하는 낡아빠진 규율을 떠들어대려는 것이냐!”
흥분한 토생원이 고함을 내지르는 순간,
“응?”
한유진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수하 씨, 토생원의 몸, 조금 작아진 것 같지 않아요?”
“네? 그러고 보니······.”
그 순간, 토생원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반대로 수다르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토생원, 당신은 정말 해독에 성공한 것입니까?”
수다르가 질문을 던지는 것과 동시에 토생원의 몸이 또 한차례, 아주 조금이지만, 분명하게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나와 눈높이가 거의 비슷했는데, 지금 토생원의 키는 약간이지만, 확실히, 나보다 작았다.
“이, 이······.”
이어서 토생원의 뻣뻣했던 털이 조금씩 힘을 잃기 시작했고, 탁한 흰색을 띠고 있던 털이 점점 더 막 내린 눈처럼 깨끗한 백색으로 변해갔다.
“수다르! 네, 네 놈! 설마!”
“이제야 저의 약이 효과를 발휘하는 모양입니다.”
“아, 아, 안 돼! 안 된다!”
토생원이 절망에 찬 외침을 내뱉는 사이, 수다르는 담담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당신의 간은 이미 불완전하나마 만독 불침에 이른 상태.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 어떠한 독이라도 해독할 수 있겠지요.”
이 얍삽한 토끼 자식이!
“그리고 당신이 먹은 것은 해독제가 아니라, 자신의 간을 더욱 활성화해 해독 속도를 높이는 물건에 불과했지요.”
수다르의 설명에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해독과 몸의 크기가 줄어드는 것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몸이 줄어드는 거죠?”
“본래 토생원의 육체는 저리 강건하지 않습니다. 그저 수많은 영약으로 몸을 개조한 것뿐. 제가 준 약의 진짜 효능은 그가 방금 전에 마신 약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영약이 만나면, 그의 간이 스스로 몸에 깃든 모든 약효를 분해해 버리는 것이지요.”
수다르의 말을 들은 토생원의 얼굴이 점점 더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 이 빌어먹을 수달 놈! 처, 천년에 걸쳐 만들어 온 나의 육체를······. 아, 안된다! 어서 멈춰!”
뭐야, 로이더였구나. 어쩐지 토끼치고는 벌크업이 너무 잘돼있다 싶었더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약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 명의 의원으로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 안 돼! 내가 졌다, 내가 졌어, 수다르! 그러니 어서 해독제를 내놓아라!”
“그것은 독이 아니라, 치료제입니다. 그러니 해독제도 없습니다.”
해독제가 없다는 말에 괴성을 지르며 애원하던 토생원은 비통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럴 수는 없다! 다시 비루한 토끼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리고는, 잠시 아무 말도 않다가, 미친 사람처럼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좋다! 이대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니······.”
석상처럼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킨 그의 손에는 기이한 빛을 발하는 동그란 단약 하나가 들려 있었다.
“차라리······. 나를 죽였어야 한다! 날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음, 흐름으로 봐서 대충 뭔지 짐작은 가는데, 저거 드시면 안 될 것 같은데.
“겨우 드래곤 두 마리와 하찮은 인간 둘을 데리고 초월자가 된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오색찬란한 단약이 토생원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저분, 쳐 맞겠구나.’하고.
“크르르르······. 수다르, 최고의 연금술사 자리는 너에게 넘겨주마. 하지만··· 목숨은 두고 가라.”
새하얗게 변해가던 토생원의 털은 마른 피처럼 거무튀튀한 붉은 색으로 물들었고, 몸은 봉식이보다도 더 거대하게 변화했으며, 팔다리가 기이할 정도로 길게 자라났다.
실로 꿈에 나올까 겁나는 끔찍한 모습.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 모습을 보고 겁을 먹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동정심이 가득한 얼굴로 괴물이 된 토생원을 바라봤다.
“오만한 용족 놈들, 역겨운 수달 일족······. 너희들의 눈에는 약에 의지해 강해진 내가 역겹고 한심하겠지! 하지만 보거라! 나는······. 너희를 뛰어넘었다!”
그런 의미 아닌데······.
뭔가 오해하신 것 같네.
그렇게 속으로 토생원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을 때,
“비겁한 놈! 네놈이 시작한 대결에서 패배해 놓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냐! 네 놈 같이 신의를 모르는 녀석은 위대한 이 몸이 혼쭐을 내주겠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보송보송한 초콜릿색 솜뭉치가 토생원의 앞을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