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8 쾌남, 수다르
워······. 뭐야 이거, 호러 영화냐.
왜 눈이 하얘지고 그래, 무섭게.
“말해라, 이 약을 어디서 구했지? 수다르의 소재를 알고 있나?”
아무리 봐도 빙의 같은데, 약으로 초월자의 정신과 연결된 건가?
‘초월자는 초월자구나. 약을 통해서 빙의하다니.’
무언가 반응을 보일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조금 더 신중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접촉을 할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설마 약을 보자마자 빙의까지 해가며 접촉을 할 줄이야······.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맨입으로?”
나의 질문에 눈동자가 하얗게 변한 포션 제작자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인간 주제에 배짱도 좋구나! 감히 나와 거래를 하려는 것이냐!”
“수다르의 영약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나를 이곳까지 불렀을 리가 없지.
“흥! 웃기는 소리! 그놈의 영약은 쓰레기야! 내가 왜 그런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냐!”
하지만 백색 화원의 주인은 코웃음을 치며 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거, 뭔가 예상하고는 일이 다르게 돌아가는데······.
본래 내 계획은 수다르의 영약을 미끼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고, 가능하면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백색 화원의 주인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반응을 보니, 이 사람은 애초에 수다르의 영약을 얻기 위해 나타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대체 나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뭐지?”
“내가 궁금한 것은 수다르의 소재뿐이다. 그 놈의 동굴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네가 원하는 영약을 만들어 주지.”
약은 됐고, 수다르가 어디 있는지만 궁금하다?
대체 왜?
내가 아는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자면, 결론은 한 가지 뿐이었다.
“수다르를 찾아서 죽이기라도 할 생각인가? 지리산에 봉인을 설치하고, 수다르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너인가 보지?”
[ 뭣이!? 이놈이 감히! ]
수다르를 죽이려 했다는 말에 살곰살곰으로 숨어있던 고미가 곧장 솜방망이에 불끈 힘을 주었다.
[ 고미! 잠깐만 기다려! 아직, 아직이야! ]
[ 하지만 이놈이! ]
그때, 사내가 돌연 고개까지 젖혀가며 광소를 터뜨렸다.
“웃기는 소리! 나는 그런 야만적인 놈들과 다르다! 게다가, 내가 어째서 그런 벌레만도 못한 가짜 연단술사를 죽이려 했다는 거지?!”
상대가 수다르의 암살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에 고미도 조금은 냉정을 되찾았고, 나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누군가 수다르를 죽이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인 것 같은데······.
그래놓고 이제 와서 수다르를 찾는 이유는 뭘까?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말끝마다 수다르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딱히 비교를 한 적도 없는데, 대답의 핀트도 어긋나있고.
“그럼 대체 왜 수다르를 찾는 거지?”
나의 질문에 백색 화원의 주인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보다 내가 더 뛰어난 연금술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깨달았다.
‘열등감이군.’
이 사람은 지금 이상할 정도로 수다르를 의식하고,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냥 죽이려고 했냐고 물었을 뿐인데, 괜히 이상한 말을 덧붙이고.
‘꼭 실력으로 안 되니까 비겁한 수를 썼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말이지.’
정말 상대가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발끈하지는 않을 거다. 애써 그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을 거고.
‘황당하군.’
초월자씩이나 되는 존재가, 열폭이라니.
하지만 그의 열등감은,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였다.
수다르의 영약을 트럭으로 가져다준다 해도 거래는 할 수 없다.
정말 그것을 탐내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받는 순간 자신이 상대의 영약을 탐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니까.
이렇게 열패감에 젖어있는 상대로 그런 거래를 할 리가 없지.
그렇다고 수다르의 소재를 알려주는 건 더더욱 안 된다.
산신령님이 우리 때문에 공격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대신, 그의 열등감을 자극한다면······.
“뭐야, 알면서도 방관했다는 건, 결국 죽이게 뒀다는 거잖아. 역시 수다르의 연단술이 당신의 연금술보다 한 수 위인가 보지? 자기 손으로 죽이면 연금술로는 안 돼서 힘으로 해결했다는 얘기를 들을까 봐, 다른 자들이 수다르 님을 죽이도록 내버려 둔 거야. 아닌가?”
슬쩍 떡밥을 던져보자, 사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죽어도 그만, 죽지 않아도 그만이기에 내버려 둔 것이다! 당장 그놈을 불러와라! 지금 당장이라도 그놈의 싸구려 단약보다 백배, 아니, 천 배는 더 뛰어난 물건을 만들어 줄 테니!”
역시. 이 초월자, 수다르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
[ 수하, 이 녀석은 아주 단순하구나. ]
백색 화원의 주인이 발끈하는 모습을 본 고미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고미에게 단순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라니… 안쓰럽군.
고미의 단순함은 귀엽기라도 하지, 초월자씩이나 돼서 열등감에 이성을 잃을 정도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뭐, 내 입장에서야 고마운 일이니까, 조금 더 속을 뒤집어 볼까?
‘수다르 님의 선조인 수다르 4세의 불로초를 훔쳐 엘릭시르를 만들었다고 했지.’
그리고 수다르는 그것을 단박에 알아봤다.
즉, 수다르 8세의 연금술에 대한 조예는, 자신의 선조의 것을 훔쳐다 개량한 물건을 단박에 알아볼 정도로 깊다는 소리.
“왜? 수다르 8세에게 열등감이라도 있나? 알틴이라는 골드 드래곤을 만들 때 쓴 엘릭시르, 수다르 4세에게 훔친 물건이라던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몰래 한유진 씨에게 전음을 보냈다.
[ 한유진 씨, 이 사람 약 좀 올려봐요. ]
나의 요청에 그녀는 왜 그러냐는 질문 한번 없이 곧장 맞장구를 쳐 주었다.
“4대에 걸쳐 패배라니, 비참하네요. 인간으로 쳐도 100년은 넘게 흘렀을 텐데, 얼마나 차이가 크면 4대가 지나도 못 이기나? 손자의 손자에게 진 거잖아.”
워······. 내가 시킨 거지만, 말을 정말 심하게 하시는구나.
상처받겠다.
“이, 이, 빌어먹을 연놈들이!”
그는 길길이 날뛰면서도 함부로 우리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약을 통해 정신만 빙의했기에 그런 건지, 무력 캐릭터가 아니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지금 상태로 S급 헌터인 한유진 씨와 나를 이길 수 없으리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든지.
뭐, 우리 입장에서도 이게 낫지.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포션 제작자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김춘식 때야 이미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일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당신이 수다르보다 낫다는 걸 뭐로 증명할 건데?”
나는 일부러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상대를 계속해서 도발했다.
이런다고 본체가 현세에 강림한다던가 하는 미친 짓을 벌이지는 않겠지만, 거래가 불가능해진 이상, 어떻게 해서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으니까.
“연금술 대결이다! 수다르를 불러온다면, 너희가 보는 앞에서 그놈을 꺾고 내가 연금술의 정점에 선 자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와······. 월척이다, 월척.
정신세계 유치한 거 보소.
동이님이 워낙 위엄이 넘치고 멋진 드래곤이라 다른 초월자들도 그럴 줄 알았다.
기형으로 태어나 천대받고 괴롭힘을 당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약자들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존재. 얼마나 멋져.
‘흑암의 지배자가 이상한 놈인 줄 알았더니, 동이님만 정상이고 나머지는 죄다 이런 캐릭터인 거 아니야?’
그렇게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서 수다르를 내 앞에 불러와라! 보여주마, 누가 진정한 최고의 연금술사인지!”
눈동자가 하얗게 변한 포션 제작자가 눈알을 까뒤집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으, 꿈에 나올까 무서운 비주얼이네.
“산신령님이 댁처럼 한가한 줄 알아? 불러오려면 뭐라도 대가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어디서 자꾸 맨입으로 덥석덥석 뭘 내놓으래.”
정신을 차리고 한 번 더 도발을 해보자,
“흥! 원하는 게 뭐냐! 내가 패배한다면 무엇이든 내놓지! 대신 수다르가 나에게 패배한다면 너는 나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해라! 그리고 평생 나에게 약재를 바치는 것이다!”
음, 나, 바다 갔다 와서 낚시가 좀 늘었나. 던지는 것마다 월척이네.
게다가 조건도 의외로 악랄하지 않다.
성격이 괄괄하고 열등감에 쩔어 있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닌가?
당연히 목숨으로 사죄하라던가, 뭐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글쎄, 수다르 님이 나서줄지 모르겠군. 어쨌든, 지면 우리가 원하는 건 뭐든지 내주겠다 이거지?”
“그렇다! 당장 수다르에게 내 도전장을 전해라! 결투는 내일! 장소는 나의 이공간으로 하겠다!”
너무나도 유치한 백색 화원의 주인의 대사에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유치한 것도 이 정도면 귀엽네.
게다가 뭘 믿고 덥석덥석 자기 이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대.
물론, 이 사람도 바보는 아니니,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하는 말일 거다.
무투파는 아니라도, S급 정도에게 죽지 않을 힘 정도는 있는 거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초월자니까.
[ 고미, 어떻게 할까? ]
내기를 끌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수다르 님에게 허락을 받는 것과, 초월자가 우리의 생각보다 강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였다.
당연히 이런 문제는, 숲속 대장님에게 허가를 받아야지.
[ 흥! 웃기는 놈이구나! 수다르를 불러라! 이놈은 절대로 수다르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
[ 이공간에서 갑자기 우리를 죽이겠다고 날뛰면? ]
뭐, 대답은 뻔하지.
[ 저놈에게 위대한 곰의 친구를 건드린 대가를 알려줄 것이다! ]
고미는 그렇게 말하며 곧바로 고미 빔을 쏘는 자세를 취했다.
역시, 이래야 고미지.
그나저나, 신기술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군.
곧바로 빔을 쏘는 자세가 나오다니.
“좋아. 수다르님에게 네 말을 전하지. 장소는?”
“비토섬! 비토섬으로 와라! 그곳에 내 이공간으로 오는 게이트를 열어주지!”
* * *
“김수하 씨, 약 올리는 거 장난 아니던데요.”
무사히 포션 제작자의 작업실을 벗어나자, 한유진 씨가 웃으며 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봉식이랑 단련 좀 했어요.”
내가 웃으며 농을 던지자, 그녀는 픽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수다르님이 정말로 초월자를 이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죠.”
나는 이 승부에서 수다르에게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다.
백색 화원의 주인이 스스로 그걸 증명했으니까.
수다르의 약을 보고 자신이 그를 뛰어넘었다고 느꼈다면, 이렇게 과민 반응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4대 어쩌고 하는 말에 그렇게 길길이 날뛰지도 않았을 거고.
“그럼 고미, 부탁 좀 할게.”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고미는 수다르의 동굴로 이어지는 공간 통로를 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신령님과 함께 돌아왔다.
그런데, 수다르의 모습이 어째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오늘 산신령님은 사극에 나오는 의원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허허허, 연단술 대결이라니, 참으로 예상치 못한 일이로군요.”
“산신령님, 그 옷은······.”
“전사가 갑옷을 입듯, 저희 수다르 일족의 명예를 건 대결을 펼치는 자리에서만 입는 특별한 의복입니다.”
음, 생각한 것보다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건가.
“죄송합니다. 생각했던 거랑 일이 좀 다르게 풀려서··· 혹시 불편하시다면······.”
만에 하나라도 산신령 님이 자신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한 말이었다.
눈치 빠른 산신령 님이라면, 내 말에 담긴 뜻을 정확히 알아 들을 거고.
그 말에 산신령님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의 눈은 승리를 확신하는 챔피언의 그것처럼 맑고도 깊게 빛나고 있었다.
“이 옷은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긴 복장. 이 수다르, 누군가의 앞에서 실력을 뽐내는 것은 연단사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오나, 고미님의 행복이 걸린 이상 상대가 신농(神農)이라 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