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15화 (115/300)

EP.115 약쟁이는 약으로 불러야지.

고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그네에 오르더니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네를 타보았다.

하지만 어째 즐거워 보이기는커녕, 무언가 깊은 고뇌에 빠진 것처럼 표정이 없었다.

대체 뭘 시험하고 싶은 걸까?

“고미, 왜 그래?”

[ 수하, 이 몸을 아까처럼 밀어줄 수 있겠느냐? ]

나는 영문도 모르고 가볍게 고미의 등을 밀어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갑자기 그네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 이제 알 것 같다! ]

“응? 대체 뭘 알 것 같다는 거야?”

[ 역시, 이 몸은 혼자서도 그네를 탈 수 있다! ]

······.

알아, 방금 봤잖아.

그런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는 거냐.

[ 서핑도 할 수 있고!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버스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

음,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언제나 그렇지만, 고미의 말은 꼭 어린애의 그것처럼 두서가 없어서, 도통 알아듣기 힘들 때가 많다.

[ 하지만 네가 밀어주는 것이 더 좋구나! 역시 혼자 타면 재미가 없느니라! ]

아, 그런 뜻이었구나······.

스스로 할 수 있지만, 내가 해주는 게 좋다는 고미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걸, 내가 도와주는 게 더 좋다고, 혼자서 하면 재미가 없지만, 내가 같이해주는 것만으로 더 즐겁다고 말해주는 녀석의 말이, 왠지 모르게 가슴 깊이 박혔다.

“그래. 앞으로도 잔뜩 같이 놀아줄게.”

[ 후훗, 알겠느니라! 앞으로도 이 몸에게 더욱 신나는 일들을 알려다오! ]

고작 그네 하나로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워하는 고미의 모습에, 새로운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잠시 머리에서 밀려났다.

어쩌면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게 아니라, 단순히 내가 밀어주는 게 더 즐거운지 확인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물론,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보아, 새로운 스킬이 생겼을 가능성이 90% 이상이지.

‘같이 하는 게 즐겁다고 했으니까, 버프 스킬이려나?’

물론 시스템 창을 열어보면 모든 게 확실해지겠지만······.

‘그럴 수는 없지.’

결사항쟁 도중에 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파업을 그만둘 수는 없는 법.

대화를 원한다면 직접 말을 걸어라. 모습을 드러내면 더 좋고. 뺨이라도 갈겨주게.

솔직히 말해서, 시스템 창을 열어보지 않는다고, 당장 뭔가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으로 시스템 창을 열어 뭔가를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말로 옮겨보자면, '꼴도 보기 싫어'라는 느낌.

자꾸 시스템 창을 여는 행위 자체가 '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라는 인상을 줄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시스템의 진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덜컥덜컥 퀘스트를 수행하고 보상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건 나도 모르는 새에 고미를 불행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무기한 농성 파업이다.’

물론 언제까지 파업만 할 생각은 아니다.

흑암의 지배자인지 중2병 걸린 또라이인지는 몰라도, 그놈을 잡아서 거하게 판을 벌이면 시스템도 목소리 정도는 들려주겠지.

이후 우리는 뉘엿뉘엿 해가 저물 때까지 선베드에 반쯤 드러누운 채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노을에 물든 강의 풍경을 즐기다가 제르보나의 등에 올라 춘천을 벗어났다.

* * *

“참으로 신기하군요. 대균열의 수호자가 제 등에 업혀서 잠을 자다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 줄곧 말이 없던 제르보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원체 말이 없고 냉정한 캐릭터라,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조금 낯설었다.

“제르보나 씨는 처음부터 고미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네, 주군께서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다만, 고미님이 스스로 그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는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셔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찬 씨에게 꿀주먹의 달콤함을 깨닫게 해준 날, 제르보나는 무릎을 꿇으며 고미를 ‘위대한 수호자’라고 불렀다.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와 고미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고.

그러니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요?”

나는 고미가 도롱도롱 코를 골며 단잠에 빠진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가슴속 깊이 묻어놓았던 질문을 꺼내 들었다.

“잘하고 있죠! 그럼 고미님을 그냥 돌려 대균열인지 뭔지로 보낼 거예요!?”

어렵게 입 밖으로 낸 말에 한유진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그렇게 쏘아붙였다.

반면 제르보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보기 드물게 상냥한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두려우신 겁니까?”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무력으로 따지면 최강은 고미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말로 고미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면, 시스템은 왜 고미에게 동료와 친구들을 만들라는 퀘스트를 준 걸까? 정말로 단순히 고미에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어쩌면 내가 선택한 길이 잘못된 건 아닐까?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괜한 떼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고미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네.”

“솔직하시군요. 그런데도 이런 일을 벌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미가······. 안쓰러워서요.”

나의 대답에 제르보나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이 이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시원한 웃음이었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는 대답이군요! 그저 안쓰럽다는 이유로 차원의 관리자와 맞서는 인간이라니.”

자신의 반응이 조금 무례하다고 느꼈는지, 제르보나는 곧장 사과를 한 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죄송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답이라, 기분이 나쁘셨다면 사과드리죠.”

“아니에요. 제가 생각해도 웃기기는 해요. 제힘으로 고미를 지키려 드는 것도 그렇고, 시스템에 맞서는 것도 그렇고.”

“잘하고 있냐는 물음은, 결과가 좋을 것 같냐는 질문이십니까?”

“음······. 그런 의미이기도 하고, 이게 옳은 건지 모르겠어서요.”

이어지는 말에 제르보나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두 가지 모두에 대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거니와, 그런 것을 믿지도 않으니까요. 수하 님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제가 대답을 드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제르보나의 대답에는 어떤 긍정적인 기대도, 부정적인 기대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참, 그녀다운 대답이군. 언제봐도 냉정하단 말이지.

“정의롭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저는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자칫하면 모든 차원을 연결하고 있는 대균열과 관련된 규칙을 영원히 바꿀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럼 제르보나 씨는 저를 왜 도와주시는 건가요?”

“드래곤의 수명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 동안 세상을 위해 희생한 수호자도, 한 번쯤은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행복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한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우아한 날갯짓을 반복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고미님은 누구보다 큰 책임을 짊어졌지만, 그 어떤 영광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셨지요. 순수하게 그런 위대한 존재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정의나 질서라는 말보다 더 가치가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제르보나는 내가 지금껏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냉정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 기분을 생각해 듣기 좋은 말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위로가 됐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르날 그 얼간이는 동족 중에서도 제법 뛰어난 전사입니다. 저만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주군 역시 고미 님의 힘이 되어줄 것이니, 반드시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음, 이 와중에도 서열은 정확하게 매기시는구나.

은근히 자존심이 세시단 말이지.

“그래요. 거기에 노인국 그 인간 문제도 잘 풀리고 있으니까, 꼭 잘 될 거예요.”

한유진 씨와 제르보나의 말에 추가 달린 것처럼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힘내볼게요.”

* * *

집으로 돌아간 뒤, 나는 노곤한 몸을 뉘고 잠을 청했다.

제르보나와 한유진 씨 덕분에 조금 마음이 가벼워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오랜만에 제법 깊게 잠을 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한유진 씨를 만나 ‘최진웅’의 신분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고, 고미는 수다르에게 기력의 수정석과 생명의 돌을 건네주고 왔다.

[ 일주일만 지나면 아웅이와 다웅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수다르의 동굴에서 돌아온 고미가 꼬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 작은 금동이를 위한 약도 그때 완성된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

그리고는 한유진 씨를 바라보며 그렇게 덧붙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산신령님의 약이요, 정말 효과가 좋던데요. 고수 맛이 난다는 게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수다르의 이야기가 나오자, 한유진 씨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영약’의 효과를 칭찬했다.

이번에는 고수냐. 정말 잘도 취향 타는 맛만 골라서 넣으시네.

말을 마친 한유진은 곧바로 약효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손 위에 불꽃을 피워올리더니, 그것을 여러 가지 동물 모양으로 바꾸어 보였다.

[ 오오! 이것은 위대한 곰의 형상이 아니더냐! 곰을 만들 수 있다면, 마력 수행은 거의 끝났다고 보아도 되겠구나! ]

음······. 곰보다 더 복잡하게 생긴 것도 많은데, 뭔가 기준이 많이 이상하군.

“솔직히 산신령님 외모가 수달이라서, 조금 반신반의했거든요? 그런데 백색 화원의 주인의 후원을 받는 A급 포션 제조자가 만든 약도 수다르님이 만들어 주신 약에 비하면 거의 돌팔이가 만든 가짜 약이나 다름이 없더라고요.”

언제 또 그런 줄을 갖고 계셨대.

하여간 은근히 발이 넓으시단 말이야.

뭐, 사대 길드의 길드장이니 당연한 건가.

“그런 사람도 알고 있어요?”

“네, 저희 길드에 포션 대주는 사람 중 하나가 백색 화원의 주인의 계약자니까요.”

이거 흥미롭네.

“그 초월자, 중립 성향이죠?”

“음······. 그렇죠. 그냥 장사꾼인 것 같아요. 마일로스트 님에게 엘릭시르를 팔았다는데, 그렇다고 황금의 군주와 사이가 나쁜 것 같지도 않고.”

“그럼 그 초월자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의 질문에 한유진 씨는 조금 애매하다는 듯 눈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어차피 노인국하고 던전 돌기 전까지 시간도 좀 있고 하니까, 같이 그 제작자를 만나러 가 보실래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백색 화원의 주인이 추구하는 것은 연금, 연단의 극치라고 했다.

그리고 수다르 4세에게 약을 훔쳐 갔다고 했으니, 수다르 8세보다 약을 잘 만들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직접 비슷한 걸 만들 수 있다면, 초월자씩이나 되서 좀도둑질이나 하지는 않겠지.

“아니에요. 저한테 다른 생각이 있어요. 일단, 수다르 님에게 영약을 하나 받아서 그 제작자한테 보내보죠.”

“네?”

영약을 보내자는 이야기에 한유진 씨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수다르 님의 약이라면 그 초월자도 반드시 관심을 보일 거고, 계약자에게 연락을 취할 거다?”

“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시게요?”

“글쎄요······. 일단 얘기나 해보죠.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가 반드시 연락을 취해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만나면, 흑암의 지배자를 만나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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