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4 깨달음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온다
지금 내 눈앞에는 꼬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통통한 다리를 가볍게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는 아기곰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리드미컬하게 상하로 움직이는 무릎, 보석처럼 반짝이는 동글동글한 눈동자, 무언가를 잡고 있는 것처럼 꼭 움켜쥔 솜방망이······.
‘대체 뭘 보고 이러는 거지?’
고개를 돌리자, 신나게 그네를 타고 있는 다정한 부자(父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카페에 그네까지 있다니, 뭔가 굉장한 곳이군.
[ 수, 수, 수하! 저, 저것은 무엇이냐? ]
그네를 가리키는 고미의 손가락은 흥분과 감동으로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타보고 싶은 거군.
“저건 그네라는 거야.”
[ 그네, 그네라······. 이름부터 범상치가 않구나. ]
“조금만 기다려. 이따가 태워줄게.”
나의 말에 고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그네를 바라봤다.
하지만 당장 그네를 태워주기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우리 고미 타야 하니까 비켜 주실래요?’라고 할 수는 없잖아.
뭐, 저 나이 또래 애들이야 조금 타면 금방 흥미가 떨어져서 그만 탈 테니까.
우리는 아포가토라도 먹으면서 느긋하게 기다리지 뭐.
“일단 저 애가 내려오면 타자. 그리고 이대로 놔두면,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서 맛이 없어질 거야.”
[ 뭐, 뭣이!? 어서, 어서 돌아가자! ]
‘맛이 없어진다’는 말에, 고미는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든지, ‘호랑이가 물어간다’는 말을 들은 아이처럼 공포에 떨며 황급히 선베드로 돌아갔다.
역시, 먹는 게 첫 번째, 노는 건 두 번째군.
선베드에 자리를 잡고 앉은 고미는 눈앞에 놓인 두 가지의 새로운 음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더니,
[ 흐음······.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같이 먹는 것이냐? ]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향해 숟가락을 내밀며 반대쪽 손으로 에스프레소 잔을 집어 들었다.
아마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에스프레소를 따로 마시려는 모양이었다.
······.
어째서 그런 결론을 내린 거냐.
보통 한쪽이 고체 형태의 음식이고, 한쪽이 액체 형태의 음식이면, 액체를 고체에 부어 먹는 게 일반적인 식사 방식 아니야?
“고미, 그게 아니야. 이렇게.”
에스프레소 잔을 잡아 아이스크림에 부어주자,
[ 수, 수하! 이게 무슨 짓이냐! 어, 어찌 네가 나에게······. ]
절망에 빠진 고미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거 왜 이래, 탕수육도 아니고······. 아포가토에는 찍먹이라는 게 없다고.
경기를 일으키는 고미의 모습에 한유진 씨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미님, 아포가토는 원래 이렇게 아이스크림에 커피를 부어서 먹는 거예요.”
[ 뭣이!?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먹는 것이냐? 그렇다면 처음부터 부어서 나오면 되지 않느냐! ]
조금 이성을 되찾은 고미가 커피에 의해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며 물었다.
“드셔보시면 알 거예요.”
디저트 전문가의 자신감 넘치는 멘트에 고미의 표정이 돌연 진지하게 변했다.
[ 그렇게나 맛있는 음식인 것이냐? ]
“자신 있어요.”
[ 호오······. 좋다. 삼룡 어멈, 너를 믿어보마! 네가 대접한 것들은 언제나 맛이 훌륭했으니 말이다! ]
말을 마친 고미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쉰 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갔다.
[ 우, 우우웃! ]
마침내 아이스크림이 혀에 닿는 순간, 녀석의 꼬리와 귀에 바짝 힘이 들어가며 동그란 눈이 주먹만 하게 커졌다.
굳이 시식평을 듣지 않아도 맛을 알 수 있는 반응.
[ 어, 어째서······. 쓴맛과 단맛이 이리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단 말이냐. 어, 어째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이리도 자연스럽게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
아포가토의 맛에 흠뻑 빠진 단맛 중독자는 걸신이 들린 것처럼 숟가락을 놀렸고, 마지막에는 국밥을 마시듯 그릇을 들어 남아있는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들이켰다.
으음, 원샷이라니.
아포가토를 저렇게 먹는 건 처음 본다. 참 사소한 것 하나에도 자기 스타일이 확고한 녀석이란 말이지.
[ 이럴 수가, 단맛의 위대함은 참으로 대단하구나! 이리도 쓴 것을 이리도 맛있게 바꿀 수 있다니! ]
음, 단맵단맵, 단짠단짠에 이어 단쓴단쓴의 맛을 알아버린 건가.
그간 쓴맛이 나는 건 죄다 피해왔으니까, 씁쓸한 것도 나름대로 맛이 있다는 걸 느껴볼 기회가 없었지.
“그럼 고미, 커피에 마카롱도 먹어볼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고미의 모습에 나는 곧바로 마카롱을 내밀었다.
뭐, 아포가토와는 살짝 느낌이 다르지만, 이것도 단쓴단쓴이기는 하니까.
[ 오오, 그렇군! 이 마카롱이라는 녀석도 달콤한 냄새가 나니, 커피와 함께 먹어도 좋겠구나! ]
고미의 앙증맞은 에스프레소 잔에 내 아메리카노를 따라주자, 녀석은 비장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물고는 잽싸게 커피를 들이켰다.
나름대로 아포가토와 비슷한 방식을 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나 커피의 쓴맛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아직 무리였는지,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던 녀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흐, 흐흠······. ]
표정으로 보아 기분이 언짢아진 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먹을 것을 나눠준 사람에게 차마 안 좋은 말을 하지는 못하겠는지, 녀석은 말없이 두 번째 마카롱으로 손을 뻗었다.
[ 이 마카롱이라는 녀석은, 참으로 신기하구나. 어째서 첫입은 바삭한데, 그다음은 젤리처럼 쫀득하고, 마지막은 초콜릿처럼 달콤한 것이냐? ]
커피에 대한 시식평을 건너뛰고 곧바로 마카롱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군.
커피의 맛이 마음에 안 들어도, 내 앞에서 악평을 늘어놓지는 못하겠고, 그러니까 건너뛴다. 참 고미다운 배려다.
“후후후, 마음에 드세요? 고미님이 딱 좋아할 맛이라고 생각하는데.”
마카롱을 먹는 고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자, 한유진 씨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 으음, 훌륭하구나. 삼룡 어멈, 역시 너는 이 몸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느니라. ]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또다시 꿀태창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이 와중에도 계속 퀘스트를 보내는 건가.
‘조금 짜증 나네.’
이건 뭐 스토커도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
사실 상태창을 안 본다는 건 꽤나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 내 스킬 등급은 어느 정도인지, 능력치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태창을 보지 않아서 얻는 것도 있었다.
「 그런 것 따위에 의존하니 진정한 강함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라! 」
처음에는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의 말대로, 숫자와 알파벳으로 표현되는 능력치와 스킬의 등급은, 내가 내 스킬과 능력치를 ‘몸으로’ 느끼는 것을 방해했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A는 이 정도, 스탯 20은 이 정도, 하는 식으로 한계를 정했지.’
더욱 나쁜 것은, 능력치를 올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정작 내가 가진 힘을 온전하게 사용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래서 같은 능력치를 가진 사람이라도 실제 힘이나 민첩성에는 차이가 있는 건가.’
상태창을 보지 않으니, 좀 더 내 몸과 기(氣)의 흐름이라던가 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분명히 등급이나 능력치에는 변화가 없을 텐데도 이전보다 강해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직 더 강해질 수 있어. 상태창이 없어도,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어.’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던가.
지금만 해도 그렇다.
- 아빠, 이제 재미없어. 들어갈래!
“고미, 그네 타러 가자.”
지금처럼, 계속 감각을 강화한 상태로 지내도 불필요한 자극을 무시하고, 필요한 자극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도 있게 됐고.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스킬을 끄고 켜지 않으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감각을 전환할 수 없었지만 말이야.
아마 이게 평소 고미의 상태겠지. 늘 온갖 게 다 들리고 보이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다가, 필요하면 거기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거.
나는 이렇게 하는 법을 배우기보다 편리하게 스킬을 켜고 끄는 걸 택했고.
[ 우웃! 좋다! 어서 가자! ]
그네가 빈 것을 확인한 고미는 신이 나서 쪼르르 그쪽으로 달려갔다.
[ 합! ]
그리고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풀쩍 그네 위에 뛰어올라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반짝이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
“밀어줄까?”
[ 후후후! 그렇다! 어서 밀어다오! ]
아까 그네 타는 아이를 따라할 때의 움직임으로 봐서는 혼자서도 잘 탈 수 있을 것 같지만, 역시 내가 밀어줬으면 하는 거겠지.
“자, 그럼 갑니다!”
가볍게 손을 뻗어 조그마한 등을 밀어주자,
[ 오오오! 괴, 굉장하구나! ]
신이 난 고미는 아까 본 아이처럼 신나게 발을 구르며 반동을 주기 시작했다.
역시, 동영상만 보고 파도를 타는 녀석이 그네를 못 타는 게 이상한 거지.
그렇게 가볍게 고미의 등을 밀어주고 있을 때, 멀리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아기곰이 그네 타는 거야?”
“그냥 타는 게 아니라 엄청 잘 타는데?”
“아기한테 곰 옷 입혀 놓은 거 아니야?”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그네는 어느새 90도를 넘어 120도 가까이 올라가 있었다.
으아아, 제발 조금만 덜 열정적으로 놀아줘.
[ 우하하하! 수하! 보아라! 이 몸의 위대함을! 아까 그 조그만 녀석보다 훨씬 더 대단하지 않느냐!? ]
‘설마, 네다섯살 먹은 꼬마를 이기려고 이러고 있는 거였냐…….’
그렇게 되뇌며 녀석을 말리려는 찰나, 그네가 정점에 이르며 고미의 몸이 완전히 거꾸로 서버렸다.
뭐, 뭐야! 그네라는 게 원래 이렇게 한 바퀴 돌아갈 수 있는 거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거 아니었어!?
[ 으, 으응!? ]
이어서 대참사가 일어났으니······.
덜컥, 덜컥, 끼익-
도를 넘은 움직임에 그네가 완전히 한 바퀴를 돌며 그넷 줄이 기둥에 말려버리고 만 것이다.
[ 수, 수하, 뭔가가 이상하다! 갑자기 줄이 짧아졌느니라! ]
전혀 이상하지 않아. 줄이 짧아진 것도 아니고······.
“으이구, 살살 타야지. 이리와.”
나는 빠르게 고미를 안아 내려준 뒤 반대편으로 힘껏 그네를 밀어 둘둘 감긴 그넷줄을 풀어주었다.
그래, 이렇게 움직이는 게 맞지. 뭐가 올라타 있는데 180도 이상 도는 건 정상이 아니라고.
‘설마 또 이기어곰이니 허곰섭물이니 그런 걸 쓴 건 아니겠지?’
어째서 뭘 하고 놀든, 항상 마지막은 이렇게 되는 걸까······.
역시 매사 너무 열정이 넘친다.
그렇게 조금(?) 격렬한 그네타기를 마친 고미는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꼬리는 가만히 있는데 귀만 아주 미약하게 움찔움찔하는 것이, 꽤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미? 왜 그래?”
“고미님?”
나뿐만 아니라 한유진 씨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듯, 고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어서 시스템 창이 또다시 신경을 거스르는 알림음을 울려댔고,
[ 으음······. 수하.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
나는 녀석에게 또다시 무언가 새로운 능력이 생겼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