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3 액션은 합이지
나는 노인국의 답을 듣지 않고 구울과 스켈레톤, 거대한 미궁 거미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강혁 씨의 말에 따르면 노인국의 비장의 무기는 머리 셋 달린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였다.
다만 던전에서 잡은 것을 네크로맨시 스킬로 부활시킨 게 아니라, 다른 수단으로 그걸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던전에서도 케르베로스가 나온 적이 없는데, 갑자기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노인국이 본격적으로 맛이 가기(?) 시작한 게, 그 케르베로스를 얻고 난 뒤라고 말했다.
‘으, 지금도 상태가 충분히 안 좋아 보이시는데, 여기서 더 안 좋아질 수가 있는 건가?’
이에 우리는 그것이 흑암의 지배자에게 받은 선물이거나, 특수한 마법을 사용해 제작한 마력 생명체, 혹은 소환수일 거라고 추측했다.
네크로맨시 스킬로 부리는 다른 몬스터와는 달리 자아를 가진 것처럼 행동했다는 점 역시 그런 추측을 한 이유 중 하나였다.
「흠, 그 할아범이 정말로 케르베로스를 부린단 말이냐?」
한편,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미는 의심스럽다는 듯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문제에 대해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추측만 난무했을 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에 우리는 가능하면 첫 번째 던전에서 케르베로스를 꺼내게 만들자고 결론을 내렸다.
'아쉽게도 이번에 케르베로스를 구경하는 건 어렵겠지만 말이야.'
노인국은 내 질문에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래도 가지고 있기는 한가 보네. 지난 번보다 상태가 나빠진 게 그것 때문인가.’
나는 그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더 이상 케르베로스를 꺼내도록 부추기지 않았다.
빨리 확인하면 좋은 건 사실이지만, 억지로 꺼내게 하려다가는 공연히 의심을 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때 되면 케르베로스를 꺼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내가 그의 소환수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성공한 것에 만족하자.
[ 자, 고미. 시작하자! ]
신호를 보내며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 고미류 장법! 대력곰강장! ]
고미가 나와 동작을 맞추어 젤리를 앞으로 내질렀다.
그러자 무형의 기가 휘몰아치며, 나를 향해 달려오던 스켈레톤 몇 마리가 문자 그대로 뼈조차 추스르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왜 매번 공격할 때마다 기술 이름을 외치는 걸까.’하는 의문이 잠깐 머리를 스쳤지만, 귀여우니까 넘어가자.
내가 고미가 된 듯한 기분으로 앞을 향해 매의 발톱처럼 손가락을 세워 휘두르자,
[ 웅조수(熊爪手)! ]
와드드득!
엄청난 소리와 함께 거대한 회색 벽에 거대한 발톱 자국이 생겨났다.
‘으아······. 언제봐도 굉장하구나.’
지난 일주일 동안 고미와 함께 가장 공들여 연습한 것은 바로 이 ‘액션’이다.
살곰살곰 상태로 숨어있는 고미가 최진웅을 S급, 아니, 그 이상으로 보이도록 연출해주는 것.
이런 방식을 취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내가 무기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흑염대웅신검’은 너무 눈에 띄니까.
‘그런 희한한 물건을 휘두르고 다니면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지.’
라면처럼 구불구불한 검은 색 막대기에서 검은 화염이 마구 뿜어져 나오는데, 한번 보면 잊을 수가 없지.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대력곰강장’과 ‘웅조수’의 파괴력에 넋이 나간 문ㅇ..., 아니, 노인국의 얼굴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 후훗, 굉장하다, 수하! 특훈의 성과가 나오는 것 같구나! ]
간만에 몸을 풀어 기분이 좋아진 고미가 꼬리와 함께 솜방망이를 붕붕 돌리며 물었다.
아마 고미에게 있어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는 건 강아지에게 있어 산책과 비슷한 의미가 아닌가 싶다.
넘치는 에너지를 어딘가 발산해야 하는데, 평범한 운동으로는 도저히 그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풀어낼 수가 없는 거지.
[ 응, 완벽해! 계속 가자! ]
손짓 한 번에 몬스터가 박살 나고, 지축이 울리고, 강철 같은 장벽이 두부처럼 으깨진다.
‘굉장해······!’
잠시나마 내가 슈퍼 먼치킨이 된 듯한 착각에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고,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 고미! 웅조수! ]
[ 고미! 대력곰강장! ]
[ 고미! 일지곰! ]
손만 휘둘러도 강철처럼 단단한 벽에 오선지를 그리고, 손바닥으로 폭풍을 일으키고, 손가락을 내지르는 것만으로 총알보다 강력한 기탄을 쏜다.
솔직히 남자라면 어릴 때 누구나 하는 상상이잖아.
지금, 눈속임이지만 그게 현실이 되고 있고.
게다가, 하다 보니 고미가 왜 매번 기술명을 외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뭔가 신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난다고!
멋있어! 더 강해 보여!
으하하······! 내가 바로······.
[ 김수하 씨, 김수하 씨! 정신 차려요! 지금 당신 괴물 같다고! 문경준도 그 정도는 아니야! ]
하지만 남자의 로망을 몰라주는 냉정한 한 여자에 의해 나는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흠흠, 너무 신을 내긴 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 수하! 아직이다! 아직이야! 이 몸은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
나의 정열(?)이 전달됐는지, 고미 역시 잔뜩 흥분해 허공을 향해 열심히 주먹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이건······. 굉장하군······.”
기가 질린듯한 노인국의 목소리에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아차······.’
고미와 내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최진웅의 힘을 문경준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문경준이 싸우는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고, 그와 비슷한 수준의 파괴력만 내도록 일주일 내내 합을 맞췄다.
고미가 진짜 힘을 쓰면 미궁은 진즉에 가루가 됐겠지.
그런데, 너무 신이 나서······. 좀 도를 지나친 것 같았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다 보면 캐릭터에 너무 빠져서 진짜로 세게 때린다던가, 연기가 끝나고 나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던데······.
‘으음, 너무 즐겼어.’
그래도 한유진 씨가 때맞춰 말려준 덕에 계획을 망칠만한 수준까지 가지는 않았다.
[ 고미, 그만하자. 나머지는 다음에 또 하자. ]
그래, 나라도 정신줄을 잡아야지. 이래서야 작은 고미, 큰 고미잖아.
[ 우웅······. 알았느니라. ]
쩝, 그래도 조금 아쉽네. 완전 신났는데.
평소 같으면 고미를 어떻게 말릴까 고민했겠지만, 솔직히 조금 더 먼치킨이 된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이래서 남자는 다 커도 애라고 하는 거구나.
그렇게 S급의 위용을 한껏 뽐낸 뒤 몸을 돌리자, 나를 바라보는 노인국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굉장하군. 기공 계열 헌터인가? 문경준 이상의 힘을 가진 헌터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역시, 문경준보다 더 세 보였나······.
“감탄하기는 아직 이르지. 그건 앞으로 나랑 다니다 보면 알게 될 거야.”
[ 오오, 수하! 멋지다! 무언가 멋진 말이구나! 기억해 두겠다! ]
최진웅의 오만한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한 말에 고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신이 나서 박수를 쳐댔다.
음······. 어째서 저렇게 신나게 손뼉을 치는데 아무도 못 보는 거냐고.
어쨌든, 첫 번째 던전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모두 달성했으니, 이제 그만 나가볼까.
* * *
던전을 벗어난 뒤, 나는 일부러 노인국에게 연락처를 주지 않고 헤어졌다.
연락이 필요하면 반드시 한유진을 거쳐야 한다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기 위해서였다.
이걸로 노인국은 내가 자신과 접촉하고 싶어 하지만, 한유진이 모종의 이유로 그걸 막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
노인국이 떠난 후, 나는 한유진 씨와 함께 용을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적당히 날아가다가 본래 모습으로 변해 춘천으로 돌아왔다.
“어디에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 고미가 좋아할 만한 멋진 카페가 있다고 들었거든.
기왕 춘천까지 왔으니 같이 가서 느긋하게 녀석이 좋아하는 달달한 디저트도 사주고, 조금 놀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우리의 목적지는 널따란 정원에 앞으로는 산과 강이 보이는 멋진 카페였다.
서울이나 우리 집 근처처럼 땅값이 비싼 곳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탁 트인 정원.
[ 오오오! 수하! 굉장하다! 지난번 삼룡 어멈이 데리고 간 곳도 좋았지만, 이 몸은 이곳이 더 마음에 드는구나! ]
고미가 짜리몽땅한 꼬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환호성을 내지르자, 한유진의 입가에도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고미 님이 좋아해 주시니까 저도 기분이 좋네요. 춘천 오면 꼭 들르는 카페거든요. 서울에서는 절대 이런 곳 못 찾아요.”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제법 사람으로 북적였다.
“생각보다 평일에 여기까지 놀러 오는 사람이 많네요?”
나의 질문에 한유진은 자랑하듯 설명을 늘어놓았다.
“여기 꽤 유명해요. 아마 주말이나 휴일에 왔으면 줄 서서 한참 기다려야 했을걸요?”
음, 확실히 그건 그렇지.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메리카노를 시킬 예정이었고, 고미는 오늘따라 고민이 많았다.
[ 으음······. 수하, 그 커피라는 것이 그렇게 맛있는 것이냐? 냄새를 맡아보면 도저히 맛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말이다. ]
그런가······. 생각해보니 나도 커피를 맛으로 먹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습관처럼 마시는 거지.
가끔 나같이 맛에 무감각한 사람이 마시기에도 ‘어? 이건 좀 맛있네?’하는 커피들도 있지만, 대체로 커피 맛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지 뭐.
“음, 글쎄. 그냥 습관처럼 먹는 거지. 단 건 입에 맞지도 않고.”
나의 대답에 한유진 씨와 고미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단맛의 위대함을 모르다니, 안타깝네요.”
[ 으음, 확실히 맛을 모른다는 것은 수하의 가장 큰 단점이지······. 하지만 괜찮다. 위대한 이 몸은, 맛을 모른다 하여 타박을 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
이미 타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단맛 중독자들아.
[ 그래도 조금 아쉽구나. 단맛의 훌륭함을 깨닫는다면, 조금 더 즐거운 일이 많아질 텐데······. ]
그렇게 고미는 나에게 단맛의 위대함(?)을 설파하려 했지만, 나는 넘어가지 않았다.
단 거 많이 먹으면 속 안 좋다고. 이건 체질이야 체질.
“괜찮아. 나는 그냥 커피 마실게.”
[ 흐음, 네가 그렇게 좋아하니, 이 몸도 커피라는 것이 궁금해 지는구나······. ]
내가 단 음식을 거절하고 또다시 커피를 선택하자, 고미가 처음으로 커피에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커피를 시켜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한 모금, 많아야 두 모금 정도 마시고 혀를 내밀며 고개를 젓겠지.
“내꺼 나눠 먹으면 되지.”
내가 심플한 해결책을 제시하자, 잠시 고민하던 한유진 씨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아포가토를 드셔보는 게 어때요?”
오, 아포가토면 커피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을 수 있군. 역시 디저트 전문가다운 훌륭한 해답이다.
[ 아포가토? 그것이 무엇이냐? 이름이 아주 이상한 녀석이구나. ]
“아이스크림에 커피를 부어 먹는 거야.”
그러고 보니, 아직 아이스크림도 사준 적이 없구나.
날씨도 덥고 하니 아포가토로 커피와 아이스크림에 동시에 입문 시켜볼까?
[ 좋다! 그럼 이 몸은 그 아포가토라는 녀석으로 하겠다! 삼룡 어멈 너도 신의를 아는 녀석이니, 믿어도 되겠지! ]
이상한 대목에서 신의를 찾는 것 같기는 하지만, 고미의 칭찬(?)에 한유진 씨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메뉴를 결정한 우리는 커피와 아포가토, 그리고 고미를 위해 산 또 다른 디저트인 마카롱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강이 보이는 널따란 정원에는 폭신한 선베드가 두 개씩 나란히 붙어있었고, 정원의 오른쪽 구석에는 대나무로 된 오두막 같은 단체석도 마련되어 있었다.
[ 으음, 으으으음······. ]
고미는 그 대나무 오두막과 폭신해 보이는 선베드 중 어느 곳에 앉아야 할지 턱을 괸 채 한참을 고민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참 사소한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한단 말이지.
“고미, 저기는 단체석이라 못 들어가. 우리는 넷 밖에 안되잖아.”
[ 우웅!? 그런 것이냐? 어째서!? ]
고미는 아쉬운 듯 대나무 오두막을 한참 바라보며 손가락을 꼽아가며 숫자를 세보았다.
[ 으음, 일곱······. 일곱이라······. ]
“친구들까지 다 데리고 오면 충분히 되니까, 다음에 이용하자.”
나는 그렇게 고미를 달랜 뒤 강이 보이는 선베드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고미에게 아이스크림과 커피, 마카롱의 맛을 알려주려던 찰나, 녀석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이며 짤막한 꼬리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수, 수하! 저, 저것은 무엇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