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2 갓-고미님의 은밀한 활약
“좋아. 자네 조건을 받아들이지.”
노인국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결과가 자신의 예상과 다르기 때문인 걸까?
한 번 찔러보는 편이 낫겠군.
“결과가 안 좋게 나오지는 않았을 텐데, 뭐가 불만이지?”
“자네 태도. 그래도 실력은 있는 모양이군.”
결과는 ‘길’이지만, 최진웅이라는 캐릭터가 싫다, 그런 의미인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이걸로 노인국이 흑암의 지배자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건 거의 확실해졌으니까.
물론 스킬이 점술인 데다가 점술의 원리를 모두 아는 건 아니니, 결과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지만··· 최소한의 허들은 넘었다.
잠시 후,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노인국이 계약서를 펼쳐 내밀었다.
“S급 저주 계약서네. 내가 직접 만들었지. 계약을 어길 시에는 영원히 시각을 상실할 걸세. 그리고 1년 동안 무작위로 세 개의 스킬이 봉인 당하고, 능력치의 30%가 하락할 거야. 덤으로······. 평생 편하게 자기는 어려울 게야.”
계약서를 내미는 노인국의 눈빛은 마치 악귀처럼 사악하고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갱년기 아저씨 같더니······.
‘엄마, 이 사람 뭐야, 무서워··· 왜 이렇게 사람이 확확 변해.’
설마 DID(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해리성 정체감 장애 = 다중인격)인가.
아니지, DID 환자가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잠깐만 드러나는 인격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 흥! 걱정하지 마라 수하! 그런 것쯤은 이 몸이 찢어버리면 그만이다! ]
그때, 고미가 솜방망이에서 발톱을 꺼내 보이며 나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하긴, 이 녀석이 있는데 겁날 게 뭐 있겠어.
노인국이 아니라 초월자가 직접 저주를 걸러 온다고 해도 무서울 게 없지.
게다가 처음부터 계약서 내밀 것 정도는 알고 있었잖아.
한편, 한유진 씨와 제르보나는 시종일관 말 한마디 없이 나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행동 역시 각본의 일부였다.
‘자, 생각해라. 생각해.’
굳이 함께 와놓고 거래에는 일절 상관하지 않는 태도.
늘 뒤를 잡고 서 있는 이유.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답잖은 잡담 한번 나누지 않는 관계.
이 모든 게 의미하는 게 뭔지, 모를 리는 없겠지.
내가 두 장의 계약서에 마력을 불어넣는 동안, 노인국의 눈길이 잠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역시, 의심하는구나.’
인터뷰에서 최진웅은 ‘심사가 뒤틀리면 언제든 한국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 말에서 이미 눈치를 챘겠지.
최진웅과 용왕이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는 얄팍한 관계라는 걸.
그렇지 않고서야 용왕에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마구 내뱉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은, 최진웅과 한유진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으며, 한유진이 모종의 이유로 최진웅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최진웅은,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지. 언제든 둥지를 옮겨도 이상하지 않은.’
처음부터 최진웅을 무례하고 오만한 사람으로 설정한 이유 역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이 모든 단서가 모이면, 노인국 스스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최진웅이 용왕을 배신할지도 모른다, 혹은 처음부터 용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수상한 조건을 내걸고 블랙 메이지를 찾은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다.’라는 결론에.
그리고, 점술을 통해 그 ‘이유’가 자신에게는 이득이 되는 무언가라는 결론을 도출한다면, 성공이다.
남이 해준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쉽사리 믿지 않는 게 인간이지만, 스스로 추론해낸 결과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믿는 게 인간이다.
노인국처럼 의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 삼룡 어멈 : 설마 눈치 못 채는 건 아니겠죠?
└ 딸기 : 노인국이 그 정도 얼간이는 아니지.
└ 수하 : 지금까지는 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 갓-고미님 : 흥! 저 문어 같은 할아범이 수하의 모략을 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다! 수하는 위대한 이 몸마저 꾀어내는 모리배란 말이다!
음······. 늘 그렇지만, 뒷말이 상당히 마음에 걸리는군.
널 속일 수 있다는 게 뛰어난 모리배라는 증거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허수아비에 검둥이, 빨갱이, 삼룡 어멈에 이어서 이번에는 문어냐······.
그래도 저 정도면 많이 벗겨진 건 아니라고.
게다가 그거 엄청 실례되는 말이야.
나중에 숲속 친구가 되면 문어라고 부르지는 말라고 미리 말을 해줘야겠다.
특징이 잘 요약되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런 상처를 막 후벼파면 안 되는거라고······.
그렇게 우리가 웅톡방을 이용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계약서를 챙긴 노인국이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좋아, 그럼 들어가지.”
[ 수하! 이 할아범이 음흉하게 웃고 있다! 역시 너의 모략에 걸려든 모양이다! ]
그리고 노인국의 앞에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 ‘닌자 곰’이 있었다.
* * *
던전에 들어가자, 목이 부러지라 올려다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오, 진짜 게임에 나오는 던전 같네.’
춘천의 B급 던전, 꽃의 미궁.
이곳은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갔던 던전과는 달리, 정말로 고전적인 던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런 음침한 곳의 이름이 왜 꽃의 미궁이지?’하는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자, 그럼 자네가 앞장서게.”
노인국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곁에는 어느새 검은색과 회색이 얼룩덜룩하게 뒤섞인 해골 두 구가 솟아나 있었다.
‘음, 저게 이강혁 씨가 말한 그 스킬인가?’
회색 미궁 속에서 검은 해골을 끌고 다니는 시체 같은 할아버지라니······. 분위기 제대로 호러네.
이런 거 싫은데.
노인국이 나를 앞장세운 이유는 뻔했다.
내가 정말 이 미궁의 길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나는 이 미궁의 길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슈퍼 곰비게이션’이 있는 이상, 굳이 이런 복잡한 미궁의 길을 외울 필요가 없으니까.
[ 고미, 천천히 가! 개미굴 때처럼 갑자기 없어지면 안돼! 알지? ]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말에, 고미는 궁둥이를 두어 번 씰룩거리며 초코바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고미의 뒤를 따라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 으으으······.
- 끄으으으······.
미궁 곳곳에서 끙끙 앓는 듯한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강혁 씨의 말에 따르면, 이 미궁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이런 소리가 더욱 강해지고, 곳곳에서 들려오는 곡소리에 의해 더욱 방향을 잡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좋아, 이쯤에서 한번 보여줄까.
[ 고미. 그거 하자. ]
[ 알겠느니라! 하나, 둘, 셋! ]
신호를 받은 고미는 곧바로 숫자를 세며 가볍게 발을 들었다.
“시끄럽군.”
이어서 고미가 발을 구르는 타이밍에 맞추어 바닥을 쿵, 하고 내리찍자, ‘우웅’하는 기이한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사방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호오······.”
시끄러운 곡소리가 사라지고 미궁에 정적이 내려앉자, 노인국은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어떻게 한 거지?”
“글쎄. 일종의 위압이라고만 해두지.”
나는 그렇게 말한 뒤 태연하게 통통한 갈색 솜뭉치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위압 스킬이 없다.
아니, 이렇게 넓은 미궁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위압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건, 고미 외에는 없지.
내가 한 건 그저 고미가 ‘웅기충천’을 쓰는 타이밍에 맞춰 발을 구른 것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는데도 몬스터 한 마리 나타나지 않자, 노인국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지?”
“왜? 내 전투력을 확인하고 싶은데,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아서 아쉬운가 보지?”
“아니, 그건 어차피 곧 확인하게 될 테니 전혀 궁금하지 않네. 그냥 너무 이상해서 말이야.”
“거짓말이 서툴군. 그 해골 두 마리, B급 이하의 언데드에게 위압 효과를 주는 녀석들 아닌가? 몬스터를 나에게 몰아주고 뒤에서 구경하려고 부른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다른 걸 꺼냈겠지. 아니면 아직 그건 완성이 안 됐나?”
자신의 스킬을 훤히 꿰고 있는듯한 발언에 노인국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이강혁 씨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저 스켈레톤 두 마리는 평범한 녀석들이 아니다.
「검은색 스켈레톤은 B급 이하의 언데드들에게 위압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범위는 그렇게 넓지 않지만, 적어도 자기 근처에 다가오는 언데드들을 물러나게 할 정도는 되죠. 그리고 일정 이상의 데미지를 입힌 몬스터를 제한된 시간 동안 자신의 수하로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 한유진 씨가 입을 열었다.
“최진웅 씨.”
“까칠하게 굴기는. 계속 가지.”
결국 우리는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죽이지 않고 보스 룸 앞에 도달했다.
아니, 죽이기는커녕 싸움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인가 스켈레톤이니 구울이니 미궁 거미니 하는 것들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녀석들은 모두 무언가에 겁을 먹은 듯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으니까.
“히든 아이템 획득 조건, 궁금했지?”
보스룸 안으로 들어가자, 보스가 있어야 할 곳에 보스 대신 푸른 빛을 내뿜는 커다란 수정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이런······. 정말 평행 세계에서 온 자가 맞기는 한가 보군.”
푸른 수정을 발견한 노인국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던전의 소유주인 블랙 메이지의 수장도 모르는 걸 내가 알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뭐, 어차피 시간이 좀 더 지났으면 당신이 발견했을 히든 피스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당신이 직접 그 스켈레톤을 이끌고 이 던전을 돌았다면 이걸 발견했을 거야. 이 던전의 히든 피스 조건은 단 한 마리의 몬스터도 죽이지 않고 보스룸에 들어오는 거니까.”
“이봐, 최진웅 씨.”
한 번 더 한유진 씨가 내 이름을 부르자, 노인국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굳이 히든 아이템을 찾는 법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나와, 그걸 막는 한유진.
이게 어떻게 보일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그럼 약속대로 기력의 수정을 받아가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기력의 수정석을 챙겨 보스룸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던전의 출구로 향하는 길···
[ 고미, 이제 그거 하자. ]
[ 알겠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느니라! 특훈의 성과를 보여주자꾸나! ]
음, 보여서는 안 되지만, 보여주기는 해야 하니까, 보여주는 건지 아닌지 애매하군.
어쨌든, 일주일 동안 열심히 합을 맞춘 액션이니 제대로 해보자고!
[ 좋아! 가자! ]
고미는 나의 신호에 맞춰 미궁 전체에 흩뿌린 자신의 기를 거두어 들였다.
- 으으······.
- 끄으으으.
다시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노인국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스킬, 효과가 끝난 건가? 생각보다 지속 시간이 짧군.”
“그럴 리가. 내 전투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조금 구경을 시켜주려는 것 뿐이다. 어차피 보여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지.”
말을 마친 나는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은 채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내가 이 정도로 서비스를 했으면 그쪽도 만들고 있는 걸 꺼내보지 그래. 설마 아직도 완성이 안 됐나? 아니면, 여전히 통제가 안 되나?”
그리고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확인하기 위한 미끼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