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1 갓-고미님은 행운을 불러온다
회의를 마친 후, 나는 한유진 씨를 통해 노인국에게 연락을 취했다.
물론, ‘김수하’가 아닌 최진웅의 신분으로.
“히드라의 독주머니를 원한다지?”
“팔 생각이 있는가?”
수화기 너머에서 노쇠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대 길드의 길드장 중 한 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매가리가 없는 목소리.
‘어째 지난번보다 상태가 훨씬 안 좋은 것 같은데.’
시장에서 봤을 때도 좀 어둡고 힘이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법 날카로운 분위기 같은 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꼭 병든 닭처럼 힘이 없군.
“내가 필요한 게 좀 있는데, 돈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럼 뭘 원하는가?”
“블랙 메이지의 던전에서 나오는 아이템. 별로 대단한 물건들은 아니야.”
“어떤 아이템을 원하는지 말해보게.”
“생명의 돌과 기력의 수정석.”
나의 제안에 노인국은 잠시 고민하다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생명의 돌은 마침 남는 게 있지만, 기력의 수정석이라는 아이템은 처음 듣는군.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생명의 돌은 블랙 메이지의 개방형 던전에서 나오는 A급 아이템으로,마력으로 만들어진 생물의 핵으로 쓰이는 재료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는 블랙 메이지가 독점하고 있는 아이템이지만, 사실상 다른 길드에서는 크게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
다른 길드에서 생명의 돌이 필요한 건 특수한 아이템을 제작할 때 정도다.
기력의 수정석은 블랙 메이지가 가진 B급 던전에서 나오는 히든 아이템이었다.
우리는 이강혁 씨 덕에 그곳에서 기력의 수정석이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작 노인국 본인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알고 있다. 모르는 건 너지. B급 히든 아이템이다.”
“아주 확신에 차서 얘기를 하는군.”
“뉴스는 좀 보고 살지 그래? 내가 평행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
“그 평행 세계의 정보가 반드시 이곳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만일 그 던전에서 기력의 수정석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빼고 히드라의 독주머니를 넘겨주지. 어때?”
“자신만만하군, 좋네. 다음 조건은?”
S급인 히드라의 독주머니와 A급, B급 아이템을 교환하자는 것은 내 쪽이 너무 손해였다.
노인국 역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니 다른 조건이 붙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고.
“그건 만나서 얘기하지. 이 거래가 당신에게 득이 될지는 점술로 확인해 보고 연락을 주든지.”
“내 스킬도 알고 있나?”
나는 일부러 그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평행 세계에도 당신이 있거든.’이라는 암시를 주는 동시에, 그걸 직접 말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했는지 정도는 알아서 생각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노인국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일주일 뒤에 보도록 하지. 괜찮겠나?”
“그렇게 하지.”
통화를 마치자,
“김수하 씨, 진짜 노인국을 친구로 만들 생각이 있긴 한 거예요?”
한유진 씨가 한쪽 눈살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네.”
자신감 넘치는 나의 대답에 그녀는 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갈색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잠시 어물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전 최진웅을 왜 그런 캐릭터로 잡았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별로 친구하고 싶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일리 있는 이야기다. 최진웅은 썩 호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외모만 바뀌고 캐릭터가 똑같다면, 굳이 폴리모프를 하는 의미가 없다.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예측이 안 가는 사람. 최진웅은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노인국이 보기에 이 스토리가 개연성이 있거든.
“곧 알게 되실 거예요.”
나의 대답에 한유진 씨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알겠어요. 일단 믿어 볼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헤어지죠.”
노인국과 만나기로 한 것은 일주일 뒤.
나도 준비할 게 있고, 상대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뭘 준비하든,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지만.
* * *
다음 날 동이 트기 전, 나는 고미와 함께 집을 나섰다.
[ 후후, 그럼 오늘부터 위대한 이 몸이 특훈을 해주마! ]
평소처럼 늦잠을 자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고미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아마 나와 특훈을 하는 게 제법 즐거운 모양이다.
앞으로 폐쇄형 던전은 고미와 내 몫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빌붙을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더 강해져야지.
게다가 노인국을 만났을 때 실력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됐다.
평행 세계에서 온 S급을 연기하려면 그럴싸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
[ 자! 그럼 우선 수다르가 준 영약을 먹거라! ]
영약··· 이라고 하기에는 독약 아닌가 이거? 아니, 독약이라고 하기에는 영약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알겠어.”
약병을 흔들자, 삼키자마자 위장에서 신호가 올 것 같은 불길한 보라색을 띤 알약 하나가 또르르 굴러 나왔다.
“음······.”
색깔 겁나네. 자취할 때 오래된 반찬통에서 본 곰팡이 색인데.
“근데 이렇게 아무렇게나 막 먹어도 되는 거야? 무협지에서 보면 이런 건 먹는 순서가 있던데.”
[ 후훗, 걱정 말거라. 어떤 순서로 먹어도 점차 독성이 강해지도록 되어 있으니 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모든 단약이 서로 다른 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지! ]
음, 말이 좀 이상한데.
순서와 무관하게 독이 강해진다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 뒤에 붙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잖아.
[ 후후후, 어서 먹거라! 이 몸도 강해지기 위해 젤리를 먹겠다! ]
말을 마친 고미는 곧바로 보라색 젤리 하나를 꺼내물고는 기분이 좋아진 듯 가볍게 꼬리를 흔들었다.
어째 오늘은 초코바가 아니라 젤리 세트를 가지고 나온다 했더니, 내 독약 색깔에 맞춰서 먹으려고 그랬던 거냐.
“욱······.”
보라색 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여태 느껴본 적 없는 비릿하고 쉰 맛과 냄새가 미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하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독약이라 그런지, 취향 타는 맛조차 아니네.
그래도 왕유를 견딘 나에게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현기증을 느낀 내가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자, 알 수 없는 기운이 나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 자, 일어나라 수하! 지금 달려야 한다! 그래야 독이 더 빨리 퍼질 테니 말이다! 어서! ]
으으······. 도와주려는 건지 괴롭히는 건지 모르겠군.
고미의 캐릭터상 나쁜 의도가 없는 건 분명한데, 어째 방식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열심히 달리자, 독기가 퍼지며 술에 취한 것처럼 속이 메슥거리고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몇 분이나 달렸을까, 서서히 독기가 가라앉고,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 됐다! 이제 웅기조식을 시작하거라! ]
이어서 ‘곰기 청정기’로 변한 고미가 주위의 공기를 정화해 주었고, 운기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는 훤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띠링-
시스템에서 또다시 알림음이 울렸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 메시지를 무시했다.
해독 스킬이 강화됐는지는 굳이 시스템 창을 보지 않아도 확인할 방법이 있으니까.
운기를 마친 나는 오늘 새벽, 수다르에게 따로 받아온 약한 독성을 지닌 단약을 삼켰다.
'하루 한 알'이라는 건강 보조식품 같은 문구가 붙은 독약 선물세트 외에 추가로 섭취해도 충분히 안전한 수준의, 미약한 독성을 지닌 물건이었다.
‘일, 이, 삼, 사······.’
해독에 걸린 시간은 16초.
시간이 짧아지거나 중독 증상이 약해진다면, 해독 스킬 레벨이 올라갔다는 소리겠지.
앞으로는 매일 이걸로 스킬 등급을 체크할 예정이다.
아침을 먹고 점심에는 곰 선생님과 함께 하는 체력 단련과 검술 훈련이 이어졌다.
방식은 간단했다.
기공술을 이용해 몸무게를 늘린 고미를 업고 달린다거나, 팔굽혀 펴기를 한다거나, 녀석을 어깨에 올린 채 기마 자세를 한다던가.
뭐 그런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인 트레이닝.
그리고 마지막은 최진웅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한 ‘특별 훈련’이었다.
‘최고의 진짜 곰’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둘이 힘을 합쳐야 했으니까.
저녁에는 이강혁 씨와 한유진 씨를 만나 노인국의 스킬이라든지, 여러가지 습관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이제부터 나는 그의 친구가 되어야 하니까.
그렇게 매일 똑같은 훈련을 반복하기를 일주일······.
마침내 그 날이 왔다.
* * *
노인국을 만나기로 한 것은 기력의 수정석이 나오는 춘천 인근의 B급 던전.
나는 한유진 씨와 제르보나, 그리고 살곰살곰으로 모습을 감춘 고미를 대동한 채 그를 만났다.
“반갑네. 실물로 보니 훨씬 더 체격이 좋군.”
“인사치레는 됐어, 계약서는 가져왔나.”
나의 무례한 말투에 노인국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계약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내 조건은 간단하다. 아이템 두 개에 더해, 던전 세 번만 같이 돌지. 거기서 얻은 부산물들은 모두 공평하게 나누고.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조건을 제시하는 동안 노인국의 상태를 천천히 훑어봤다.
눈 밑이 꼭 판다처럼 시커멓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얼굴이 피곤함에 찌들어있다.
시장 앞에서 봤을 때보다 체중도 꽤 감소한 것 같고.
게다가 눈 맞춤도 잘 안 되고, 옷도 낡은 데다가 신발에는 때가 잔뜩 껴있다.
사대 길드의 길드장 씩이나 되는 사람이 돈이 없어서 낡은 옷을 입고 더러운 신발을 신는 건 아닐 테고······.
‘역시, 이 사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우울증에 걸렸을 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증상은 표정이나 체중 변화다. 그리고 눈 맞춤이 안 되거나, 위생 상태가 나빠진다.
“어떤 던전이냐에 따라 다르지.”
“S급 한 개, A급 두 개.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노인국은 동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점을 치려는 거겠지.
여기가 승부처다. 여기서 ‘흉’이 나온다면, 내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
노인국의 점술이 어디까지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의 결과를 대충은 예측할 수 있다고 들었다.
히드라 던전 일로 미루어보아, 그 정확도는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원하던 S급 아이템이 있는데도 그 안에 고미가 들어가 있으니 결과는 ‘흉’이 나왔으니까.
우리의 진짜 목적은 흑암의 지배자를 불러내는 것.
만일 노인국과 흑암의 지배자가 ‘같은 편’이라면 이 만남은 ‘흉’이 될 거다.
그는 후원자를 잃게 될 테니까.
반대로 길이 나온다면, 흑암의 지배자를 떼어 내준다는 결정이 그에게 좋은 일이라는 의미.
‘그럼 내 생각대로 노인국은 흑암의 지배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거겠지.’
노인국이 동전을 튕기는 사이, 모습을 감춘 고미는 뒤에서 솜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이상한 주문(?)을 외치고 있었다.
[ 흥! 불러내라! 불러내! 이 몸이 혼쭐을 내주마! ]
[ 우오옷! 나오너라 이놈! 이 몸이 너를 기다리고 있느니라! ]
음, 그냥 속으로 생각만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 뭐······. 확실하게 해서 나쁜 건 없지.
[ 어떠냐 수하!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
과해, 언제나 그렇지만, 너무 의욕이 넘쳐.
그래도 귀여우니까 넘어가자.
[ 좋아, 고미! 최고야! ]
나의 전음을 들은 고미는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초코바를 할짝이기 시작했다.
저렇게 눈에 띄게 행동하는 데 보이질 않는다니, 몇 번을 봐도 굉장하군.
[ 그럼 안에 들어가면 연습한 대로 하는 거야 알았지? ]
[ 걱정하지 말거라! 일주일간 충분히 합을 맞춰보지 않았더냐! ]
그렇게 최종 점검까지 마쳤을 때, 노인국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뭐지? 설마 흉이 나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