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0 진짜 미친 사람은 자기가 미친걸 모른다
“죄송합니다······.”
이강혁 씨의 첫마디에 고미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곰 선생님을 돌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완전히 손을 놔버리면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테고··· 뭔가 다른 방법을 찾을 수는 없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도 목숨을 걸고 곰 선생님을 지키겠습니다.”
‘양쪽 다 포기할 수 없다’라, 딱 이강혁 씨가 할 법한 대답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답이기도 하고.
나도 고미를 구하겠다고 세상을 멸망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그건 지금껏 홀로 열심히 세상을 지켜온 고미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니까.
“저도 사람들이 다치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아니에요.”
“그렇다! 위대한 이 몸이 그런 결정을 내릴 리가 없지 않느냐!”
우리 둘의 대답에 이강혁 씨의 얼굴에는 곧장 화색이 돌았다.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조금 전에는······.”
“고미를 안 보내기 위해 시위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멸망하게 둘 수야 없죠.”
“음,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궁금하네요.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저희가 뭘 도와드리면 되죠?”
이강혁에 이어 한유진이 나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음, 설마 거기까지 생각도 안 해보고 일단 화부터 낸 거란 말이야?
좀 감동적이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진짜 성격 장난 아니시구나······.
무섭다, 무서워. 이 사람, 확실히 이상해.
“게이트는 파괴해야죠. 저희가 안 해도 누군가는 할 테니까, 게이트 놓고 시위하는 건 의미도 없어요. 오히려 반대로 갈 예정입니다.”
“반대로?”
봉식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강혁 씨가 가진 정보와 곰 레이더를 활용해서, 최대한 빨리 부술 거야. 어차피 누군가는 부숴야 할 거, 우리가 부숴서 마정석이랑 아이템 챙기고, 길드 홍보도 하고.”
게다가 이렇게 하면 다른 효과도 거둘 수 있을거다.
“그럼 던전은요? 결국 헌터들이 제일 민감한 건 이쪽일 텐데.”
한유진의 말대로, 헌터들이 가장 민감하게 구는 것은 던전과 관련된 수익이었다.
게이트는 시스템에서 제공하는 별도의 클리어 보상도 없고, 정부에서 나오는 보상금이라고 해봐야 그리 대단하지도 않으니까.
던전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지.
“개방형 던전은 전부 클리어하지 않습니다. 보상이 뭐가 됐든요.”
헌터들의 주 수입원이 개방형 던전이라고는 해도, 모든 개방형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아니다.
클리어하지 않는 것의 이득이 더 클 때, 그리고 주기적으로 정리해주는 수고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이득이 될 때, 이 두 가지 경우에 한해 개방형 던전을 클리어하지 않고 유지하는 거니까.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남겨두는 거니, 수익성이 떨어지거나 위험도가 너무 높은 던전은 없애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앞으로는 개방형 던전은 ‘모두’ 남겨둘 거다.
내 목적은 트롤이니까. 최대한 많은 던전을 남겨두는 거지.
“확실히 그건 소유권이 있을 때만 결정이 가능한 사안이군요. 그럼 저희가 더 많은 던전을 소유해야 할 텐데······. 이건 제가 힘을 써보겠습니다.”
이강혁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폐쇄형 던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한유진 씨의 질문.
“엉곰엉곰이 있으면 폐쇄형 던전이나 개방형 던전이나 다를 게 없잖아요. 고미와 제가 폐쇄형 던전을 주기적으로 정리할게요.”
“그렇다! 이 몸과 수하만 있어도 충분하느니라!”
고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솜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외쳤다.
그때, 봉식이가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지적했다.
“그렇게 하면 헌터들 수익 떨어질 거고, 다른 길드로 이적하는 놈들 늘어날걸. 그렇다고 길드원들에게 왜 이런 조치를 취하는 건지 설명해줄 수는 없잖아?”
당연히, 이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결책이 있다.
“걱정 마. 수익성 높은 개방형 던전 독식해서 최대한 돌리고, 폐쇄형 길드에서 나오는 아이템이나 부산물 전부 길드원들이랑 공유하면 돼.”
“하지만 아무리 등급 높은 던전이라고 해도 그 수익을 전부 N분의 1 해버리면 결국 코 묻은 돈 수준이 될 텐데요······.”
내 대답을 들은 한유진 씨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 묻어났다.
역시 국내 최대 길드를 운영하는 입장인만큼 이런 조치를 취했을 때 생길 현실적인 문제들을 누구보다 잘 알겠지.
“어차피 폐쇄형 던전도 입장 제한 있잖아요. 6인이다, 하면, 저와 고미 제외하고 들어갈 수 있는 네 명 추려서 그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 주는 거죠. 세상에 공돈 싫어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거기에 저나 이강혁 씨를 빼면, 세 명에게만 나눠줘도 되지 않을까요?”
“아뇨, 최대한 많은 헌터들에게 보상을 제공할 거예요. 저와 고미 몫은 최대한 줄일 거구요. 그래야 길드를 더 키우고, 던전 점유율도 올릴 수 있을 테니까요.”
나의 대답에 두 사람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고미 님과 수하 님이 너무 피곤하실 텐데······.”
“상관없어요. 던전 한번 돌아서 500만 남겨 먹어도 한 달에 천만 원 이상은 벌 텐데, 그 정도면 충분히 부자죠. 저 대학원 때는 무급이었고, 병원 다닐 때는 120 받고 주7 했어요.”
120만 원 받고 주7이라는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의 눈빛에 측은함이 가득해졌다.
음, 그러지들 말아라. 다 지난 일이다. 지난 일.
“그거에 비하면 수익이 몇 배인데, 그리고 저 원래 돈 욕심 없어요. 부모님 가게도 이강혁 씨가 해결해줬고, 모아둔 돈 털고 대출 약간 보태면 집도 살 수 있으니까, 그 외에는 큰돈 들어갈 일 없잖아요.”
무엇보다, 얼마를 준다고 해도 불쌍한 아기곰을 수백 년 동안 외롭게 두는 대가는 되지 못한다.
그 작은 아기곰이, 내 가족이라면 더욱.
수천 억, 아니, 나를 세계 최고의 부자로 만들어 준다고 해도, 고미를 대균열로 돌려보낼 마음은 없다.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그거 아껴두세요.”
그때, 한유진이 제르보나가 내온 커피를 홀짝이며 입을 열었다.
“고미 님과 수하 씨 덕분에 사도도 됐고, 오랜만에 믿을만한 친구도 사귀었고. 뭐, 방금 전에 살짝 열 받게 굴기는 했지만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이강혁 씨를 흘깃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수다르 할아버지 덕분에 알틴도 더 건강해질 수 있게 됐잖아요. 뭘로 보답할까 했는데, 집 한 채 정도면 약간은 보상이 되겠죠?”
이, 이 갑부가······. 또다시 신종 호구 병이 도져버린 건가!
“몰랐네요. 이강혁 씨가 가게도 해줬다니. S급 만들어 준 대가가 그 정도면, 저도 집 정도는 해줘야 꿀리지 않죠.”
“집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묵묵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르보나가 핸드폰을 꺼내 들며 말했다.
“아, 아니, 그래도 집은······.”
“저 돈 많아요. 김수하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아요. 그리고 얘기 듣다 보니까, 앞으로 더 큰 돈 벌 방법도 떠올랐고요.”
한유진이 나의 말허리를 자르며 피식 웃음을 짓자,
“그렇다면 큰 집으로 사다오! 위대한 이 몸에게는 큰 집이 어울리느니라!”
고미는 뻔뻔하게도 큰 집을 요구했다.
아무리 경제관념이 없는 녀석이라고는 해도, 더 큰 집을 내놓으라니,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것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럼요. 걱정 마세요. 큰 집으로 해드릴게요.”
“음······.”
한유진 씨의 통 큰 선물에 이강혁 씨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라이벌(?)은 곧바로 고미 편을 들었는데, 자기는 조금 망설이기도 했고, 거기에 신종 호구가 집까지 해준다고 하니 원조 호구의 지위가 위태로워질까 걱정하는 건가?
이상한 대목에서 웅림픽을 재개하려 드는군······. 적당히 끊어주지 않으면 건물이라도 해줄 기세야.
“저······.”
“음, 그럼 이 문제는 이 정도로 하고, 혹시 동이님을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초월자까지 끌어들이면 판을 더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이어지는 말에 한유진 씨와 이강혁 씨는 물론이고 고미를 제외한 모두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왜요? 어려운가요?”
“아, 아뇨······. 수하 씨,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성격이 극단적이네요. 솔직히 성격이 너무 부드러워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나 좀 걱정했거든요.”
한유진 씨가 커피를 마시는 것조차 잊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저도 좀 놀랐습니다.”
“너 한 번씩 똘끼 폭발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건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는 이강혁 씨에 이어, 봉식이마저 못 당하겠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왜 이러지.
당연히 트롤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우리 팀에 그렇게 엄청난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꼬장도 제대로 부릴 수 있을 거고.
그때, 고미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훗, 너희는 모두 나만큼 수하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구나. 이 몸은 이미 이 녀석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 자식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이 녀석과 처음 만났던 날, 이 몸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주기 위해 격산타웅으로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S급 괴수를 한 방에 처리했느니라! 그런데 이 녀석이 어떻게 반응했는 줄 아느냐?”
뭐야, 그날 나를 때린 이유가 그런 거였어!?
“누구세요? 하고 묻더니,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면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대답을 하더구나!”
고미가 말을 마치자, 장내에 잠시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안 되겠어, 본론으로 돌아가자.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잖아.
“어······. 문제가 있나요? 동이님에게 물어보면 여러 가지 정보도 얻을 수 있을거고, 시스템도 곤란할 정도로 큰 문제를 일으키기 쉬울 것 같은데. 아는 초월자도 동이님 밖에······.”
이어지는 설명에 한유진 씨는 어디가 이상한지 설명하기를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이 문제가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니에요, 됐어요······. 일단 지금은 알틴의 마력이 부족해서 게이트를 열 수가 없으니까, 마력이 충전되는 대로 동, 아니 마일로스트님을 만나러 가보죠.”
한유진 씨의 말에 자연스럽게 아웅이 다웅이, 그리고 알틴에 관한 문제로 화제가 옮겨갔다.
“아, 필요한 재료가······.”
내가 수다르의 처방전을 읊어주자, 숲속 친구들은 빠르게 현재 조달 가능한 재료의 목록을 체크했다.
부족한 재료는 총 세 가지.
아이템의 등급도 크게 높지 않아 이 정도면 금세 조달이 가능할 것 같았다.
“하나는 제가 문경준 그 인간한테 돈 주고 사면 될 것 같네요.”
“나머지 두 개는 블랙 메이지의 도움이 없으면 얻을 수 없는 아이템들입니다.”
“아, 잘됐네요. 노인국 씨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현재 나는 노인국 씨가 흑암의 지배자에게 지배당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심리치료도 좀 해주고, 숲속 친구로 만들려고 생각했던 거고.
하지만 지금은 ‘약간’ 생각이 달라졌다.
뭐, 노인국 씨를 친구로 만들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다음 지점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흑암의 지배자가 그렇게 위험한 초월자인가요?”
흑암의 지배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강혁 씨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깔렸다.
표정만 봐도 답을 듣지 않아도 될 정도.
“수하님, 흑암의 지배자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만큼은 절대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 자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세계의 멸망 뿐입니다.”
“들어서 알고는 있어요. 그래서 더 만나보고 싶은 거고요.”
노인국을 통해 흑암의 지배자를 만나려는 이유를 밝히자, 숲속 친구들은 물론이고 고미까지 나를 미친 사람처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