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9 모여봐요, 트롤의 숲
띠링.
응, 안 봐.
띠링.
응, 엿.
띠링.
응, 혼자 메시지 많이 보내세요. 전 파업했음요.
할 말 있으면 직접 만나서 하든지.
꿀태창은 계속해서 깜빡이며 자신을 봐달라고 아우성을 쳐댔지만, 나는 철저하게 그 메시지를 무시했다.
고미를 잘 키우고 행복하게 해주라고 뭘 계속 주는 줄 알았더니, 결국 대균열인지 지랄인지로 돌려보내겠다 이거잖아.
뭐야 그게, 지상에 있는 동안이라도 재밌게 지내라는 같잖은 배려?
그딴 건 엿이나 먹어.
아동 학대, 동물 학대, 둘 다 용서할 수 없는 범죄다.
그런데 아동 학대+동물 학대를 수천 년을 해?
이런 악랄한 범죄자 새끼, 내가 정의의 철퇴를 내려주마.
날 빨리 강하게 만들어서 상황을 정리하고 싶으셨나 본데, 사람 잘못 봤어. 내가 진짜 트롤이 뭔지 보여주지.
[ 수하……. ]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고미가 잔뜩 풀 죽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고미, 이것만 말해. 대균열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 그,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그곳에는 맛있는 것도 없고, 서핑도, 낚시도, 영화도 없다! 무엇보다 친구도, 가족도 없지 않느냐! 그, 그런 것은… 견딜 수 없다……. ]
“그럼 됐어.”
[ 하, 하지만 위대한 이 몸이 괴수 놈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인간들이……. ]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고미의 그런 예쁜 마음이, 시스템에 대한 나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수천 년을 굴려도, 여전히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생각하는, 이런 순수한 아기곰을…….
“고미, 됐다고. 나만 믿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단호한 태도에 고미는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입을 벙긋거렸다.
[ 수, 수하……. 지금 너에게서 엄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
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슈퍼 먼치킨이라도 두려움을 느낄만한 기백, 단호함, 뭐 그런 게 느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좋아. 나의 결기가 전해진 모양이군.
[ 하, 하지만 이 몸이 계속 남아 있으면 이계의 우두머리 놈들이 이 몸의 친구들을……. ]
“그중에 너보다 센 놈 있어?”
[ 뭣이!? 지금 위대한 이 몸을 그런 송사리들과 비교한 것이냐!? 모두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애송이 놈들이다! ]
“그럼 됐어. 나만 믿어. 대균열로 돌아가지 않게 해줄게.”
[ 저, 정말이냐!? ]
“응.”
고미를 진정시킨 후, 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상대는 시스템이다. 당연히 단순한 파업, 결사 항쟁 같은 걸로 이길 수 있을 만큼 만만할 리가 없지.
하지만 약점이 없는 상대는 없다.
유일한 예외는…….
‘고미지.’
어떤 악랄한 계략에 빠져도 꿀 주먹 하나로 헤쳐나올 것 같은 압도적인 힘.
초월자의 군대를 단신으로 돌파해서, 만수왕을 애꾸로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무력.
S급 보스 몬스터를 꿀 주먹 한 방으로 무로 돌려보내는 힘.
그 어떤 함정을 판다 해도, 고미를 죽일 수는 없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이건 아주 이상한 일이다.
‘그런 힘을 가진 게, 왜 고미일까? 아니, 왜 이런 존재가 필요한 거지?’
시스템이 ‘전지전능한’ 무언가라면, 왜 번거롭게 대균열의 수호자를 따로 두는 걸까? 그것도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진.
신은 너무 공사다망해서, 대신 번거로운 일을 처리할 존재가 필요해서?
고미를 언제든지 없애버릴 수 있을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라면, 자기가 직접 대균열을 관리하는 게 더 속 편할 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애를 수호자로 두는 것 보다는 직접 관리하는 게 리스크도 줄일 수 있고, 혹시 모를 반역이나 대형사고도 예방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고미를 던전에서 데리고 나갈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도, 나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도, 너무 번거로운 설정이야.’
그런 제약이 없다면 얼마든지 편하게 일을 진행할 텐데, 왜?
게다가 이강혁 씨는 두 번이나 세상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신이 전능한 존재고, 인간, 혹은 내가 사는 이 차원을 특별히 아끼거나 보호하고 있다면, 상황이 그렇게 될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었을 리가 없다.
결론은 간단했다.
수많은 신화에서 신들의 왕과 투신은 별개의 존재였다. 역사 속에서도 최강의 무장이 곧 왕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시스템이라 해도 ‘무력’이라는 면에서는 고미보다 못한 게 분명하다.
최강은, 고미다.
‘그리고, 전지하지도 않아.’
만에 하나 모든 걸 안다면 내 행동도 시스템의 계획 안에 들어있을 테니, 난 파업을 계속할 거고.
그게 아니라면, 무서울 이유가 없으니 파업이다.
요약.
댁이 뭐든, 전지전능하든 아니든, 난 파업할 거다.
무조건 파업! 절대 파업! 결코 파업!
내 트롤 짓을 잘 지켜보고,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으면 연락하고.
* * *
이후 나는 내 전략과 가설을 확인하기 위한 몇 개의 간단한 사실들을 확인한 뒤 숙소로 돌아갔다.
[ 우웅, 수하……. 그런데, 그런 것들을 안다고 그 시스템이라는 자에게 저항할 수 있겠느냐? ]
“그럼.”
부족한 정보는 얼마든지 메꿀 수 있고, 힘도 키울 수 있다.
시스템은 내 능력을 빼앗아 가지 못했으니까.
예상대로, 내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걸로 시스템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가설은 확인됐다.
처음 만난 날, 고미는 ‘요즘 이능자들은 왜 시스템 창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냐?’하고 물었다.
예전에는 그런 게 없어도 잘만 썼다고.
즉, 시스템 창은 단순히 이능의 사용이나 습득을 보조하는 도구지, 그 자체로 권능을 부여하거나 뺏을 수 있는 무언가는 아니다.
‘아니면 파업 선언한 내 이능을 그대로 남겨둘 이유가 없지.’
호텔로 돌아가자, 가족들은 이미 일어나 짐을 꾸리고 있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니까.
“우리 고미랑 수하랑 산책갔다 왔어요?”
짐을 꾸리던 어머니가 고미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이제 집에 가야 하는데, 우리 고미 재밌게 잘 놀았어요?”
“후후후! 그렇다! 아주 즐거웠느니라! 다음에는 산으로 놀러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산은 이 몸이 아주 잘 알고 있느니라!”
엄마를 보자마자 환히 웃으며 꼬리를 흔드는 고미의 모습에 시스템을 만나 뺨이라도 한 대 갈겨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때까지 열심히 운동도 하고 수련도 해서 강해져야지.
기다려라, 평생 잊지 못할 꿀 주먹을 맛보여 줄 테니까.
“그래요, 다음에 또 어디든지 같이 놀러 가자.”
이후 우리는 호텔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봉식이의 차에 몸을 실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휴게소에 들러 고미가 좋아하는 간식을 잔뜩 사서, 언제나처럼 산신령의 동굴로 보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보내도 되나?’
고미의 초코바나 젤리 같은 간식들은 모두 수다르의 항아리에 보관하고 있다.
비상용으로 내가 몇 개 갖고 다니기는 하지만, 항아리에 넣어두면 맛이 더 깊어지니까.
맛이 궁금해서 항아리에 넣어둔 초코바를 살짝 먹어본 적이 있는데, 단순히 숙성이 됐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진하고 깊은 단맛이라 조금 놀랐다.
“후후후, 역시 이 호두과자라는 녀석이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어찌 이리 달콤하고도 고소할꼬? 수다르의 항아리에 들어갔다 나오면 틀림없이 몇 배는 더 달아지겠지?”
고미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꼬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으, 언제봐도 굉장한 미각이군. 대체 얼마나 더 달아야 만족하는 걸까.
집으로 돌아간 우리 가족은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으며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다음에는 또 어디에 놀러 갈지, 고미와 무엇을 하고 놀지에 대해 이야기하다 잠자리에 들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시스템은 애절하게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나 김수하, 첫사랑과 헤어진 뒤에 새벽에 온 카톡마저 읽씹을 했던 남자다.
그렇게 쉽게 ‘그럼 얘기나 들어볼까요?’ 할 것 같으면, 파업은 시작도 안 했지.
* * *
다음 날, 나는 ‘모여봐요, 숲속 친구들’을 시전한 뒤 우리의 아지트가 된 한유진 씨의 저택으로 향했다.
시스템에게 조금 더 달콤하고 커다란 엿을 선사하기 위해서는 나와 고미만으로는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초월자 하나에, 초월자의 사도, 회귀자가 동료로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심지어 용왕과 저스티스 두 길드의 던전 점유율을 합산하면, 국내 던전의 6할에 육박한다.
‘즉, 한국 내에 존재하는 던전의 6할을 고의로 클리어하지 않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소리지.’
물론, 준비한 선물은 그걸로 끝이 아니니까, 기대해라.
네가 몇 년을 살아왔든, 앞으로 몇 년을 살든, 전무후무한 엿을 선물해주마.
“진짜 너무하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고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한유진은, 예상대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반면 이강혁 씨는 초월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보다도 심각한 표정이 되어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역시, 이강혁 씨는 이런 반응이네.’
같은 곰빠라고는 해도, 이 사람이 곰빠인 이유는 고미가 세상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파업 선언을 해버리면, 팬심이 흔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러나, 저스티스의 지원이 끊기면 이 파업은 성공할 수 없다.
“이강혁 씨, 어떻게 생각하세요?”
“…….”
“아니, 이걸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한유진은 나보다도 더 성을 내며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제 딴에는 목숨 걸고 S급 던전을 클리어 하고 있는데도 악플에 시달려왔고, 온갖 루머에 시달리던 사람이 한유진 씨다. 그걸로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니 수천 년간 세상을 지켜온 아기곰이 그렇게 좋아하는 초코바 하나 없는 세상에서 살아왔다는 이야기에 분노하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이강혁 씨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강혁이 형, 뭐라도 말 좀 해봐.”
이강혁 씨가 아무런 말이 없자, 봉식이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세상보다 가족이 더 중요해서 초월자의 사도가 되었던 봉식이에게, 이강혁 씨의 이런 반응은 그 자체로 배신이겠지.
“야, 이강혁, 이 새끼야!”
결국 분통이 터진 한유진 씨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자,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마침내 이강혁 씨가 입을 열었다.
또다시 이어지는 정적.
하지만 나는 이강혁 씨에게 우리를 도와달라고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강요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물론 설득할 방법은 가지고 있지만……. 쓰지 않을 생각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고미의 첫 번째 친구다.
내가 섣불리 조건을 걸고, 이강혁 씨가 그것에 응한다면, 고미는 정말로 상처를 받겠지.
그러니까, 지금은 믿고 기다리는 게 정답이다.
이 사람이 ‘정말로 옳은’ 결정을 내리기를.
이 사람이 고미를 단순히 세상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을 지킨다는 대의 아래에 고미 하나 정도는 희생시켜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허수아비, 괜찮다……. 이 몸은, 이 몸은…….”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이강혁 씨가 아니라 고미였다.
“너희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몸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느니라! 이, 이 몸은 신의를 아는 진정한 곰이니 말이다!”
그때,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강혁 씨가 돌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곰 선생님, 수하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