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08화 (108/300)

EP.108 갓-고미님의 정체

알약을 먹기 무섭게 눈앞이 흐려지며 손끝이 저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 산신령의 독약 선물 세트(7)가 흡수됩니다. >

‘이, 이 망할 수달이!’

그렇다. 수다르가 나에게 준 것은······. 독약이었다.

아마 약마다 색이 다른 건, 성분이 다 다르다는 소리겠지.

‘마, 말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갑작스럽게 찾아온 중독 증상으로 인해 나는 해변에 털썩 주저앉은 채 헛구역질을 해댔다.

공복에 먹으라는 건 뭔데, 독을 제대로 느껴보라는 의미?

< 간 때문입니다 (C)가 활성화됩니다. >

< 해독이 시작됩니다. >

그렇게 뜻밖의 선물에 무릎을 꿇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어? 저 사람 왜 저러지?”

“왜?”

“혼자 걸어가다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더니 헛구역질하는데?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에이, 숙취겠지.”

“그런가?”

“으, 아침부터 바닷가에서 뭐 하는 짓이야? 지금 토하려고 저러는 건가?”

“피해가자.”

이른 아침부터 산책을 나온 부지런한 커플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수, 수치사 할 것 같다.’

머릿속에 아기곰 한 마리와 수달 한 마리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독약을 제조하는 장면이 스쳐 지났다.

‘이, 이 악당들.’

어째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 좋은 거 주고, 나한테는 독약 세트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는데, 친구들은 죄다 멋진 변신 로봇이고, 내 것만 악당 피규어인 느낌이야.

물론, 왜 이런 걸 줬는지 짐작은 간다.

얼마 전 있었던 ‘독침 자해 사건’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고미가 나를 안전하게 만독불침에 이르게 하려고 수다르에게 부탁을 했겠지.

‘그, 그래도 독약이라고 말은 좀 해주지 그랬냐.’

그렇게 속으로 원망 아닌 원망을 늘어놓고 있는 사이, 서서히 중독 증상이 사라지며 눈앞이 맑아졌다.

“으으······.”

그러나 산신령의 깜짝 선물의 효과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으니,

“응?”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온몸 구석구석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다.

‘곰기 청정기’로 변한 고미 옆에서 축기라는 걸 할 때 느껴졌던, 바로 그 기운!

시작은 독약이지만, 중독 증상이 끝나면 영약으로 바뀌는 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 웅신입기혈(A)이 활성화됩니다. >

그러자, 사지에서 느껴지던 미약한 맑은 기운이 전신을 돌아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역시······.’

그때, 또다시 아까 전 그 커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갑자기 앉아서 명상하는데?”

“저 사람 진짜 좀 이상한 거 아니야?”

“뭐야, 몸에서 이상한 빛 같은 게 나오는데?”

“뭐, 뭐지? 헌터인가?”

“오빠, 저 사람 진짜 좀 이상하다. 우리 얼른 가자.”

음, 엿듣고 싶은 건 아닌데, 너무 잘 들린다. 그래도 자기들 딴에는 조심한다고 작게 말하는 것 같은데······.

기공술 레벨을 A까지 올려서 그런 건가? 굳이 감각 강화를 활성화하지 않아도 꽤 잘 들리네.

‘에이, 됐다. 운기에나 집중하자.’

그렇게 귓가에 들려오던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에 실려 오던 짠 내마저 느끼지 못하고 정신을 집중하기를 한참······.

[ 후훗! 수하! 어떠냐! 효과가 좀 있느냐!? ]

고미의 보드라운 젤리가 나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응?”

눈을 떠보자, 얌전히 내 앞에 앉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고 있는 갈색 솜뭉치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왔어?”

[ 후후, 얼마 되지 않았느니라! 아침부터 수련에 매진이라니, 훌륭하구나! 하지만 조금 더 천천히 강해져도 된다! 너에게는 위대한 이 몸이 있으니 말이다! ]

고미의 손에 들린 초코바는 이미 반 이상 줄어들어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느긋하게 핥다가 야금야금, 아니, 야곰야곰 깨물어 먹으니, 보통 초코바 하나 먹는데 한 시간은 걸리는 게 고미다.

바쁜 날에는 초코바 먹는 걸 잊고 가만히 손에 들고 있기도 하고.

즉, 대략 30분은 가만히 앉아 내 곁을 지켰다는 소리.

“이 약, 뭔지 알고 있었어?”

[ 그렇다! 하지만 수다르가 말해주지 않는 편이 더 기뻐할 거라고 말하여 가만히 있었느니라!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

음, 이 수달 영감이······. 순진한 아기곰을 속이고 나에게 몰래 독약을 먹였다는 거고만.

그래도 뭐, 효과는 좋으니까 됐지. 진짜로 죽을 것도 아니고. 감사합니다.

“응, 마음에 들어.”

[ 후훗, 그것을 다 먹을 때쯤이면 만독불침은 아니어도 천독불침에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 갑자나 되는 기를 단번에 쌓을 수 있지! ]

음, 한 갑자면 60년인데, 어째 너무 양심 없이 날로 먹는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횟집 아들이 날로 먹는 걸 거절하면 안 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돌아갈까?”

내가 그렇게 묻자,

[ 우웅··· 이 몸과 오랜만에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느냐? ]

고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녀석의 꼬리는 축 처져 있었고, 귀도 힘없이 살짝 누워있었다. 게다가 시선을 불안한 듯 살짝 아래를 보고 있었다.

‘뭐지?’

어제까지 잘 놀고, 잘 자고, 잘 먹은 것 같은데.

왜 아침부터 기운이 없는 거지.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초코바 떨어졌어?”

[ 아, 아니다. 아직 열 개는 남았느니라! ]

초코바도 남아있고, 그럼 기운이 없을 이유가 없는데.

“음, 알았어. 이리 와, 산책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미를 어깨 위에 올려주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목말을 태워주었음에도 녀석의 반응이 어째 조금 시원치 않았다.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싶은 생각에 돌아가기 아쉬워 그런 것이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이 녀석이 이렇게 기운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

항상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기심과 에너지가 넘치던 녀석이 갑자기 이러니, 괜히 나까지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다.

“고미, 왜 그래? 기분이 엄청 안 좋은 것 같은데?”

나의 질문에 고미는 또다시 답지 않게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수하,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몸은 너의 가족이라고 하였지? ]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그럼, 당연하지.”

그 순간, 수다르가 해주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 그리고, 조금 더 용기를 내셔도 좋을 듯합니다. 」

딱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고미가 그런 질문을 한 이유가 자신의 정체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느꼈을 뿐이다.

“고미,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야?”

또다시 정적이 흐르고, 고미가 입을 열었다.

[ 그, 그냥 묻는 것이다! 고, 곰과 인간이 가족이라는 것이, 조,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 물론 엄마도 아빠도, 너도, 봉식이도, 모두 이 몸에게 잘해주지만······. ]

아닌 것 같은데.

좋아, 기왕 말 나온 김에 한번 물어나 보자.

“네 정체 때문에 그런 거야?”

자신의 정체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어깨 위에 앉아있는 고미의 사지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잖아. 네가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안 해도 괜찮아. 하지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는 건, 너도 말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느낀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 고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에 대해 조금 서운한 마음도 있고, 대체 왜 이렇게 말을 해주지 않는 걸까 궁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미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억지로 그것을 캐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고미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억지로 들춰내 얄팍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는,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듯, 소중한 사람에게 고민이 있다면 그것을 함께 나누고, 힘이 되어주고 싶은 것뿐이었다.

“괜찮아. 말해서 더 힘들 것 같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말하지 않아서 더 괴롭다면 말해도 되고. 너도 내가 널 속인 걸 용서해 줬잖아. 그러니까 혹시 내가 화를 낼까 봐 그러는 거면, 편하게 말해도 돼.”

고미는 여전히 답이 없었고, 나는 손을 들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네 정체를 알든 모르든, 달라질 건 없어. 넌 그냥 우리 가족이야.”

나의 마지막 말을 들은 고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이 몸은······. 대균열의 수호자이니라. ]

······.

아, 드립칠 타이밍이 아니긴 한데······.

듣고도 모르겠다. 그게 뭐임?

“미, 미안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고미.”

전에 동이님이 고미를 만난 곳이 대균열이라고 하기는 했지.

수다르는 고미를 ‘위대한 수호자’라고 불렀고.

그러니까 ‘대균열의 수호자라 대균열에서 동이님을 만났다.’ 는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문제는, 대균열이 뭔지를 모르겠다는 거지. 그냥 큰 게이트 아닌가?

[ 뭐, 뭣이!? 이, 이 몸이 큰맘을 먹고 말했는데! ]

“미안······. 설명 좀 해줘······.”

고미의 설명에 따르면, ‘대균열’은 일종의 차원의 교차로라고 했다.

게이트나 던전처럼, 이세계로 통하는 통로.

문제는, 그게 ‘언제나 열려있는’ 통로라는 거지.

[ 그리고 수천 년에 한 번, 짧게는 수백 년에 한 번, 대균열이 붕괴되며 세계 곳곳에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통로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말하는 던전과 게이트이니라. 이 몸이 이렇게 오래 바깥세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기는 이때뿐이지. ]

이어서 고미는 이 시기에도 자신이 바깥세상에 남기 위해서는 ‘선택받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연히, 내가 그 선택받은 인간이고.

“그럼 평상시에는······.”

[ 그저 대균열 앞에 앉아 차원을 넘어오는 괴수들을 처리할 뿐이다. ]

고미의 말투는 한없이 담담하고, 쓸쓸했다.

그리고 수천 년, 수백 년에 한 번 이런 시기가 온다는 건······.

“그럼 넌 그동안 쭉 혼자였다는 거야? 동료들은 없어?”

[ 수호자는 오로지 한 명이니라. ]

그 짤막한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을 후벼팠다.

그럼 고미는 대체 몇 년을 홀로 대균열 앞에 앉아있었던 걸까?

“지금 같은 시기 외에는 밖으로 나올 방법이 전혀 없는 거야?”

[ 아주 가끔,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그 악당을 벌하기 위해 바깥 세상에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외에는 늘 대균열을 지켜야 한다. 이 몸이 대균열을 지키지 않으면 차원을 넘어온 괴수들이 바깥세상으로 나와 인간들을 괴롭히니 말이다. ]

······.

그제야 나는 고미가 스스로를 늘 ‘위대하다’고 말했던 진정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 작은 수호자 덕분에, 우리는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었구나.

용왕과 산신령 같은, 전설 속에나 나오는 사람들 외에는 존재조차 모르는, 이 작은 아기곰이, 홀로 그곳을 지켜줬기 때문에.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고도 아기 같고 단순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건······.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유아기적 퇴행.

인간의 정신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고미가 어린아이 같은 건······. 그것 때문이겠지.

쭉,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이 개 같은 새끼가······.’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신인지 시스템인지는 몰라도, 이건 너무 하잖아.

세상이 개판이 되면 밖에 나와서 정리하고, 세상이 평화로우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대균열을 지키라고?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어.

“그럼 게이트와 던전이 모두 사라지면······. 넌 어떻게 되는 거야?”

[ 게이트와 던전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대균열로 돌아가는 것이지. ]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게이트와 던전이 파괴되면, 나도 대균열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수호자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

‘이런 씨발······.’

하지만 나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신이든, 시스템이든, 초월자든, 이 불쌍하고, 위대하고, 사랑스러운 아기곰을, 외롭게 두지 않을 거다.

신이 듣고 있다면, 당당하게 말해주마.

파업이다, 개새끼야.

협상 전에는 게이트고 던전이고 초월자고 네가 알아서 해라.

그 순간, ‘꿀 태창’에서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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