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7 원조 약집은 다르다
선물이라는 말에 이강혁 씨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천도환 덕분에 세 번의 삶에서 처음으로 S급이 되었으니, 그 누구보다 수다르의 약에 대한 기대가 크겠지.
그리고 수다르의 첫 번째 선물은, 그 기대에 부응하듯, 이강혁 씨를 위한 것이었다.
“천도환을 드신 이후 기를 많이 쓰면 갑자기 허탈감이 느껴지시지요?”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릇은 커졌지만, 그 안에 차 있는 것이 부족해 일어나는 증상입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단약을 드시면 빠른 속도로 해결될 것 입니다.”
이강혁 씨에게 백자로 된 고급스러운 약병을 건넨 수다르는 이어서 청자로 된 약병을 꺼내 한유진 씨에게 내밀었다.
“허허, 마력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약을 드시고 마법을 사용하시면, 한 달 이내로 큰 성과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괴, 굉장하군. 두 사람에게 딱 맞는 약이야.
“봉식 님을 위해서는 광기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는 약을 준비했습니다. 본바탕이 워낙 훌륭하시니, 아마도 이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음, 역시 저 괴물은 다른 사람들과 평가부터 다르고만.
“혹 광기에 지배 당할 것 같다면, 가족들과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십시오. 가족들에 대한 사랑은 봉식 님을 광기에 빠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봉식 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수다르의 말에 봉식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식, 뭔가 나한테 말 안 한 게 있는 모양인데······?
“마지막으로, 수하님.”
수다르가 나의 이름을 부르자,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강혁 씨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약 맛을 좀 봤으니까.
“수하님을 위해서는 아주 특별한 단약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하루에 한 알, 반드시 하루에 한 알입니다. 절대로 과욕을 부리셔서는 안 됩니다.”
응? 내껀 왜 약효를 말 안 해주는 거야?
“저는 무슨 약을 주신 건지······.”
“허허, 드셔보면 아실 것입니다. 단, 반드시 공복에 드셔야 합니다.”
뭐지······. 대체 무슨 약이길래.
뚜껑을 열어보자, 손톱만한 형형색색의 단약이 병안을 굴러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거 전부 다른 약 같은데······.’
내가 약의 정체를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가만히 선물 증정식을 지켜보고 있던 고미가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 이제 다 되었구나! 어떠냐? 이 몸이 부탁한 선물이 마음에 드느냐!?”
어쩐지, 우리야 그렇다 치고 한유진 씨한테도 딱 맞는 선물이 준비되어 있길래 좀 의아하다 싶었는데, 고미가 뭔가 언질을 준 거였구나.
항상 아무 생각없는 것 같으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긴단 말이지.
“허허,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선물이 남았는데··· 선물을 드리기 전에 진맥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각자에게 맞는 약을 나눠준 수다르가 한유진 씨의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알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틴을요?”
그러고 보니, 알틴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칼국수 집에서도, 낚시를 갔을 때도, 오늘도, 평소라면 ‘삐이이-’하면서 고미와 어울릴 텐데, 계속 죽은 것처럼 잠만 자고 있으니······.
혹시 어디가 아픈 건가?
“그 아이를 본떠 아웅 님과 다웅 님을 만든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네. 그런데 그건 왜······.”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알틴이라는 그 아기용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만든 생명 같군요. 하지만 연단술을 연구하시는 분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제 추측이 맞는지요?”
수다르가 알틴의 정체를 한눈에 꿰뚫어 보자, 한유진 씨의 눈이 둥그렇게 변했다.
“네! 어쩜 그렇게 잘 아세요?”
그렇구나. 동이님은 연단술 쪽은 잘 모르는 건가.
하긴, 기본적으로는 마법사들과 계약을 맺는 초월자니까, 내고 보기에는 그게 그거 같지만, 세부 전공에는 차이가 있는 거겠지.
“흐음······. 혹 큰 힘을 쓰고 나면 지금처럼 한동안은 마력을 회복해야 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닌지요?”
족집게처럼 딱딱 알틴의 상태를 짚어내는 수다르의 말에 한유진 씨는 용한 점집에 간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스로 마력을 회복할 수 있기는 한데, 출력에 비해서 충전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해야 하나······.”
“허허, 그럼 제가 그에 맞는 약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바로 그때,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르보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산신령님, 죄송하지만 알틴을 만드는 데 들어간 포션은 엘릭시르입니다. 그 이상의 영약을 만드는 것은······.”
엘릭시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예의 바른 제르보나가 굳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굉장한 물건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게다가 삼룡이 패밀리 중에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니까, 그 판단은 꽤 정확하겠지.
“허허허, 제르보나 님이라고 하셨지요? 저 역시 그 약의 기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다르의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표정, 좀 낯이 익은데······.
아! 내가 신기한 연구 결과를 가져갔을 때 교수님이 짓던, 그 표정이군.
‘그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단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표정.
역시 원조 약집(?)은 다르다 이건가.
“서양의 연금술사들은 이것을 연금약액, 현자의 돌이라고도 부르지요. 하지만 이것은 미완성입니다. 이전보다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진정한 연금약액을 만들어 내지는 못 했군요.”
수다르의 말에 고미를 제외한 모두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현자의 돌이라니······. 그거 전설에나 나오는 보물 아닌가.
그런 게 진짜 있다고?
“산신령님, 설마 알틴의 몸에 들어간 엘릭시르에 대해 알고 계신 겁니까?”
제르보나가 경외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수다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허허, 모를 수가 없지요. 지금 알틴의 몸에 있는 것은 저희 가문의 선조이신 수다르 4세께서 연구하시던 불로초를 훔쳐 개량한 것이니 말입니다.”
마, 말도 안돼!
약 잘하는 건 알았지만, 불로초를 만들 정도로 굉장한 약쟁이였단 말이야?
게다가 초월자가 훔쳐갈 정도로 뛰어난 불로초를?
“그자는 아직도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생을 추구하고 있군요. 이는 섭리를 벗어난 일이요, 부질없는 욕심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한 것을······.”
수다르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설마, 백색 화원의 주인을 알고 계신 겁니까?”
단박에 약의 기원은 물론이고 제조자까지 맞추자, 제르보나의 무뚝뚝한 얼굴에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또렷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허, 이제는 그런 이명을 사용하며 초월적인 존재의 흉내까지 내고 있나 보군요.”
‘잠깐······. 이야기의 스케일이 너무 크잖아.’
백색 화원의 주인은 오직 포션이나 영약 제조자들과 계약을 맺는 초월자로, 전투 능력이 있는 헌터들과는 전혀 계약을 맺는 일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연금, 연단의 극치.
그럼 알틴은 드래곤 로드에 맞먹는 존재의 마력과, 초월자급 연금술사의 합작품이라는 소리인가······.?
‘그런 초월자가 탐낼 영약을 만들어 낼 정도면······’
수다르의 실력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모양이었다.
“어찌 됐든, 그 아기 용의 맥을 짚어보면 모든 게 확실해지겠지요.”
수다르의 말에 한유진 씨는 마른 침을 삼키며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아기용을 내밀었고,
“으으음······.”
수다르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아기용의 목덜미와 손목을 짚었다.
“제가 조만간 처방전을 하나 써드릴 터이니, 필요한 재료를 모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 알틴 님과 아웅이, 다웅이 님을 위한 약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수다르는 곧장 낡은 한지에 멋들어진 필체로 빼곡하게 무언가를 적어 나에게 내밀었다.
그때, 참돔 코스 요리의 대미를 장식할 참돔 지리(맑은 매운탕)와 초밥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허허허, 그럼 이제 아버님이 준비한 요리의 마지막 코스를 맛볼 차례가 된 것 같군요.”
시원한 참돔 지리의 향기에 이미 회와 주먹밥, 도미 머릿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 입안에 잔뜩 침이 고였다.
“자, 초밥을 안 드시는 분들은 밥도 있으니까 참돔 지리에 그냥 밥 드셔도 되고, 초밥 드셔도 되고.”
마침내 요리를 마친 아버지가 자리에 앉아 숟가락을 들며 말하셨다.
“아버님, 정말 맛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먹어본 도미 회와 머리 구이 중 최고였습니다.”
“하하, 시식평은 조금 뒤에! 코스 요리는 마지막까지 맛봐야 완성되는 거니까.”
이강혁의 극찬에 아버지는 겸연쩍은 듯 웃음을 지었다.
“호오, 초밥은 유시모리 뿐 아니라 야키시모까지 있군요. 실로 훌륭합니다.”
야키시모는 유시모리처럼 껍질이 붙어있지만, 뜨거운 물이 아니라 불로 직접 익힌 것을 말았다.
평범한 도미회를 올린 초밥에 유시모리, 야키시모 초밥까지······.
정말 준비를 많이 하셨군.
개업 전에 솜씨가 녹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겠다고 말씀하신 게 빈말이 아니었어.
“으음······. 이 희한하게 생긴 밥은 무엇이냐?”
고미가 접시 위에 담긴 초밥을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초밥이라고 해서, 간을 한 밥에다가 와사비를 넣고 회를 올려서 만든 음식이야.”
나의 설명에 고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다가 꼬리를 바짝 세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뭔가 이 몸이 만든 주먹밥과 비슷한 음식이구나.”
······.
그런가······. 주먹으로 쥐어서 만든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것 같은데.
이런 말은 좀 미안하지만, 고미 네가 만든 것하고는 더더욱 공통점이 없어 보이고.
“후후, 좋다. 아빠가 만든 주먹밥이라면, 위대한 이 몸이 만든 것과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맛이겠지.”
‘응?’
그렇게 살짝 양심이 결여된 것 같은 발언을 한 고미는 곧장 첫 번째 초밥을 입으로 가져갔고,
“으으으······!”
예상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초밥에 들어간 와사비는 간장에 들어간 와사비보다는 조금 더 맛이 강할 테니까.
“으음, 참으로 오묘하구나. 먹으면 코가 찡한데, 그렇다고 빠지면 너무 심심할 것 같기도 하고······.”
이후 고미는 금세 초밥의 맛에 적응한 듯 빠르게 두 번째, 세 번째 초밥을 입안에 넣더니,
“음······. 아주 조금이지만, 이 몸의 주먹밥보다 더 맛이 좋은 것 같구나. 역시 위대한 이 몸의 아빠가 만든 요리다운 훌륭한 맛이니라.”
자신에게 아직 한떨기 양심이 남아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으음, 초대리의 맛도, 와사비의 양도 절묘합니다. 초밥의 양과 회의 크기 역시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훌륭한 초밥의 표본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맛이군요.”
그 사이, 초밥을 맛본 수다르는 곧장 참돔 지리의 국물을 한 숟갈 떠 넣고는 감격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양한 회에, 고소한 참돔 머리 구이, 그리고 정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 가지 도미 초밥에, 마무리로 개운한 지리라······. 허허, 도미의 담백한 맛이라는 테마를 일관성 있게 유지하면서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훌륭한 변주를 이끌어 내셨군요. 최고의 재즈밴드의 스탠더드 앨범을 들은 듯한 느낌입니다.”
뭐, 뭐가 이렇게 거창해. 게다가 수달이 재즈는 왜 알고 있는 건데······.
“흠······. 좋아. 개업 준비는 차질이 없겠군.”
여하튼, 그 알 듯 모를듯한 시식평을 들은 아버지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저걸 알아들은 건가?
“스승님, 회부터 지리까지, 모두 완벽한 맛이었습니다. 앞으로 종종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이어서 이유찬 씨 역시 감격한 표정으로 간단한 시식평을 마쳤고,
“하하, 그래요. 내가 양식 쪽은 좀 약해서, 나도 유찬씨한테 이것저것 좀 배워야겠네. 지난 번 얘기하는 걸 보니 요리 지식이 아주 풍부하시던데!”
그렇게 새로운 콤비가 결성되는 것으로 참돔 코스 요리 시식이 끝났다.
참돔 시식회가 끝난 후, 이강혁 씨와 삼룡이 패밀리는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고, 수다르 역시 동굴로 돌아갔다.
나와 봉식이, 고미는 부모님을 도와 뒷정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새벽같이 눈을 떠서 아직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가족들을 놔둔 채 홀로 숙소를 나섰다.
아웅이, 다웅이를 위한 재료 준비에, 노인국 씨와의 거래, 초월자들과의 싸움, 새로운 방패 제작까지······.
할 일이 태산이라, 산책이라도 하면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기도 했고, 가장 큰 목적은, 수다르가 준 영약의 효과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하루에 한 알이라고 했지?’
손에 쥔 새하얀 약병의 뚜껑을 열자, 은은한 약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진한 녹색의 알약에서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독특한 향기가 배어 나왔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이, 이 수달이!”
낯선 맛에 이어, 익숙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