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6 고미는 요리사(2) 구원은 믿음에서 오나니
대체로 모든 비극이 그렇듯이, 우리에게는 이 비극을 막을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 ‘곰손’의 존재를 미리 알려주었다면,
이유찬 씨의 입을 막아버렸다면,
어머니가 고미에게 요리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절대 안 된다고 외쳤더라면······.
우리는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누구도 흥이 오를 대로 올라버린 고미를 막을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인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스템 창에 눈을 돌리는 순간,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히든 퀘스트 : 고미는 요리사 >
- 고미는 아주 오랜 세월 자신이 만든 요리를 누군가에게 맛보여 주고 싶어 했지만, 한 번도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 ‘외로운 고미’가 정성을 다해 만든 요리를 함께 즐겨주세요.
······.
이게 그 감성팔이인가 뭔가 하는 거냐?
게다가 마지막 줄, 뭐야! 왜 그렇게 강조하는데!
지금 이런 게 나에게 먹힐 거라고······. 에이씨!
‘그래, 시스템, 당신이 이겼다······.’
이런 문구를 보고도 고미의 요리를 거절할 만큼 모질지 못한 나를 탓해야지.
만에 하나, 만에 하나 말인데, 시스템을 관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강해져서 꼭 복수할 거다.
아니, 사람이 아니어도 복수할 테니까, 기다려라.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시스템 창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이걸 지금 깨라고 만들어 놓은 거냐?’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욕지기가 올라왔다.
< 달성 조건 >
1. 다섯 명 이상이 고미의 요리를 맛볼 것
2. 그중 절반 이상이 진심으로 ‘괜찮다’고 느낄 것.
비고 : 고미가 요리의 완성에 절반 이상 기여해야 합니다.
< 달성 보상 >
1. 능력치 강화 (+10)
2. 스킬 강화 (+3)
퀘스트를 완수하려면 최소한 다섯 명은 희생되겠군.
잔혹하고, 클리어할 수도 없는 퀘스트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맛있다’가 아니라 ‘괜찮다’라고 써놨군.
‘됐다, 포기.’
그냥 나만 죽고 말련다.
게다가 더 많은 사람들이 맛을 볼수록 고미도 더 상처받을 테니까.
‘어쨌든 재료가 정상인데 왕유보다 맛이 없기야 하겠어?’
왕유는 장군 말벌을 재료로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그리고 고미는 던전에서 나오는 모든 식자재가 구역질 나는 맛이라 아무것도 먹지 않다 보니 벽곡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래, 어쩌면, 고미의 조리법이 아니라 재료가 문제일 수도 있지.’
그런 같잖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시스템 창에서 눈을 뗐을 때,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호오, 참돔 머리 구이라니, 정말 훌륭하군요.”
가만히 식탁에 앉아 그 고소한 향기를 음미하던 수다르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설마······. 고미가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칼이 위험하다고 요리를 못하게 하신 어머니가 불을 다루는 걸 고미에게 시킬 리가 없지.
“메뉴가 상당히 다양하군요. 회도 저 같은 초짜가 뜬 거랑은 차원이 다르고요. 가능하다면 앞으로는 낚시를 갈 때마다 아버님과 함께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고소하고 진한 참돔구이의 향기를 맡은 이강혁이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감탄하듯 말했다.
하지만 나의 신경은 오로지 고미와 어머니가 무엇을 만드는지에 쏠려 있었다.
“자, 딱 여기에 꽉 차게 따르면 돼요.”
어머니의 첫 마디에 나는 약간의 희망을 느꼈다.
그래! 계량이 정확하면 간은 망하지 않을 거야.
조물조물과는 다르지! 요리는 계량이 가능해!
음식의 반은 간이니까, 먹을만한 게 나올지도······.
“어떨 것 같아?”
한유진 씨가 테이블로 돌아온 이유찬 씨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고미가 자신의 ‘특급 요리’를 완성할 때까지 누구도 구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망이 보입니다.”
“정말?”
이유찬 씨의 대답에 제르보나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캐릭터상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이쪽도 꽤나 공포에 떨고 있었던 모양이군.
“일단 불도, 칼도 못 쓰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군.
어린이 요리 교실에서 만드는 요리 같은 건가?
어머니다운 선택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정말 현명한 판단이고.
“그럼 일단 요리가 타거나 할 일은 없겠군요.”
한유진 씨가 안도한 듯 웃으며 말하자,
“초밥? 설마 고미님이 초밥을 만드는 건가요?”
이강혁 씨가 메뉴에 대한 추측을 내놓았다.
이 사람, 정말 요리 모르는구나.
“아닙니다. 초밥은 보기에는 간단해 보여도 쥐는 법부터 쥐는 횟수, 회의 크기, 와사비의 양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 지극히 많은 아주 섬세한 요리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식 수달, 수다르 옹은 즉각 그 추측을 부정했다.
초밥은 꽤 섬세한 요리다.
아버지 성격상 아무리 고미라도 참돔 코스 요리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메뉴를 맡겼을 리도 없고.
그럼 사이드 메뉴라는 소리인데······.
“자, 그럼 이제 됐으니까, 동글동글 굴려볼까?”
그 순간, 우리는 고미가 만들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주먹밥이군요.”
“주먹밥이네.”
수다르와 봉식이가 동시에 말했다.
“굉장하네요. 탁월한 선택입니다.”
이어서 제르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무슨 주먹밥인지는 몰라도, 주먹밥이라면 불도 필요 없고, 칼도 필요 없다.
복잡하고 섬세한 조리법도 필요하지 않고, 그냥 적당한 비율로 재료를 넣고 뭉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음식.
재료의 비율은 어머니가 곁에 있으니 문제가 없을 거고.
“고미, 그렇게 꾹꾹 누르면 안 돼요. 힘주지 말고, 살살, 그냥 굴리면 돼요.”
음, 그나마 굴리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해서 참사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순조롭게 완성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화.
그리고 잠시 후, 맛깔스러운 냄새를 풍기는 도미 머리 구이와 함께 고미가 만든 ‘날치알 주먹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훌륭하네요.”
“잘 만들었네.”
“그러게요.”
고미가 제대로 된 걸 만들 수 있다니, 이걸 ‘기적’ 외에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까.
심지어 겉모습도 합격이다.
물론, 고미 수준에서 합격이라는 소리기는 하지만······.
너무 힘을 줘서 밥알이 으깨져 떡이 된 부분이 있고, ‘동그랗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찌그러진 주먹밥이지만, 그래도 이게 주먹밥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다.
“후후, 어떠냐? 이런 요리는 처음 만들어 보는 것이라 이 몸의 솜씨를 한껏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제법 괜찮은 것이 나온 것 같구나.”
숲속 친구들의 긍정적인 평가에 잔뜩 우쭐해진 고미가 비닐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도미 머리 구이랑 같이 먹어봐요.”
고미의 ‘불치병’을 치료한 ‘신의’ 고옥분 여사께서는 겸손한 표정으로 날치알 주먹밥과 도미 머리 구이를 우리 앞에 내려놓으셨다.
훌륭한 메뉴 구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고미가 제멋대로 만든 요리가 곁들여졌다면 이미 메뉴 구성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거다.
고미가 제대로 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숲속 친구들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런 귀한 것을 맛보게 될 줄이야. 그럼 제가 먼저 맛을 봐도 되겠습니까?”
수다르가 가장 먼저 고미의 날치알 주먹밥을 집어 들었다.
정말이지, 언제, 어느 때라도 절대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사람, 아니 산신령이군. 훌륭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롤모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군.
“후훗, 좋다. 하지만 재료가 떨어졌으니, 더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쓰지는 말거라.”
수다르의 말에 더욱 기가 산 고미의 콧대는 하늘을 뚫을 듯 높아졌고,
“으음······. 훌륭하군요. 간도 적당하고, 기본에 충실한 주먹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뭐든지 기본을 지키기가 가장 어려운 법이지요. 게다가 단무지가 조금만 더 들어가거나 간이 조금만 강했어도 도미구이의 맛이 떨어졌을 텐데, 아버님이 만든 요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굳이 고미님의 솜씨를 완전히 발휘하지는 않은 섬세한 배려가 느껴지는군요.”
주먹밥을 먹은 산신령님은 아주 교묘하게 돌려서 ‘그냥 평범한 주먹밥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먹어라. 고미를 실망시키지 말아라. 아마, 그런 뜻도 들어있겠지.
돌려 말하는 걸 알아듣지 못하는 고미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먹어도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는 저 화법.
과연 수다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군.
“오오, 수다르! 역시 너는 이 몸의 요리에 담긴 참뜻을 아는구나! 그렇지! 이 몸이 제대로 솜씨를 발휘한다면 애써 만든 아빠의 요리가 외면받지 않겠느냐!”
꿈보다 해몽이라는 느낌이 드는 시식평이었지만, 수다르의 완벽한 화술에 껌뻑 넘어간 고미의 꼬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실로 훌륭합니다. 도미 머리 구이와 곁들여 먹으면 더욱 맛이 사는군요. 다들 한번 드셔 보시지요.”
눈치를 살피며 도미 머릿살을 와사비 장에 찍어 먹던 한유진도 수다르의 시식평을 듣고는 곧장 고미표 주먹밥을 작게 쪼개 입안에 넣었다.
“어, 진짜 괜찮네요.”
이어지는 호평에 너도나도 고미의 주먹밥을 맛보았고,
< 축하합니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
시스템 창은 그들의 시식평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려왔다.
< 시식자 전원이 고미님의 요리를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 목표치 초과 달성으로 인해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
‘진짜? 정말로?’
의심을 내려놓고 주먹밥을 맛보는 순간,
“진짜 괜찮네.”
최악의 경우 혼자서 고미가 만든 요리를 모두 먹고 장렬하게 전사하려던 나의 결의가 무색하게, 주먹밥의 맛은 실로 평범했다.
굳이 따지자면 밥이 죽처럼 된 부분도 있고, 너무 싱겁거나 짠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그러려니 하고 먹을 수 있는 수준.
‘이게 어머니의 위대함인가.’
절대로 안 될 거라며 지레짐작하고 모든 걸 체념했던 우리와 달리, 어머니는 고미를 믿었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었으며, 정말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어머니의 위대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 불가능한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
< 칭호 효과가 강화됩니다. >
- 위대한 고미님의 첫 번째 조력자 (F) -> 위대한 고미님의 훌륭한 조력자 (A)
······.
장난하냐?
시스템마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소리잖아.
아니, 그보다, 애초에 불가능한 걸 왜 퀘스트로 주는 건데.
너네는 죽어도 되니까, 고미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그런 의지마저 느껴지는데?
“흑······.”
내가 시스템 창을 향해 속으로 저주를 퍼붓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소리가 나의 귀를 잡아끌었다.
“고미, 왜 울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당황한 어머니가 고미를 안아 녀석의 등을 토닥여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이 몸에게, 이 몸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고미의 눈물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이 몸이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고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물을 떨구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수다르도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고미 많이 외로웠어요? 그래도 울면 안 되지. 친구들이 이렇게 고미가 만든 음식이 맛있다고 하는데. 다음에 엄마랑 또 만들어서 친구들이랑 같이 먹을까?”
뒷말이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고미의 그런 반응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누군가에게 뭘 해주고 싶었으면 고작 자신이 만든 주먹밥을 나눠 먹는 친구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걸까.
“저, 정말이냐? 다음에도 또 이 몸이 만든 요리를 먹어줄 것이냐? 또 이 몸과 함께 여행을 와줄 것이냐?”
이어지는 고미의 물음에 우리는 모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에는 고미님이 만든 주먹밥에 제가 만든 샌드위치를 가지고 소풍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이유찬 씨가 웃으며 피크닉을 제안하자,
“후훗! 좋다! 이 몸이 더욱 굉장한 주먹밥을 만들어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더욱 굉장한 것이 나올 것이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고미는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솜방망이를 들어 주먹밥을 굴리는 흉내를 냈다.
그렇게 잠시 어색해졌던 분위기가 풀어질 무렵, 수다르가 입을 열었다.
“정말 좋은 분들이군요. 고미님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것을 보니 이 늙은이, 자꾸만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리고는,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답례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나, 이 늙은이가 이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 작은 선물을 드리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