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7 오라는 시련이 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 드래곤이다!”
“뭐, 뭐야! 주변에 게이트라도 열렸나?”
“저거 한유진이 데리고 다니는 드래곤 아니야?”
거대한 블랙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살피며 뒷걸음질을 쳐댔고, 이유찬 씨를 알고 있는 몇몇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댔다.
‘서핑곰’만으로도 충분히 특종감인데, 블랙 드래곤까지 보태면 어쩌자는 거야.
그보다 당신이 그 상태로 무슨 짓을 할지 너무 불안하다고!
“이, 이유찬 씨! 너무 눈에 띄잖아요!”
나의 지적에 이유찬 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주위에 있는 인간이라고 해봐야 백 명도 되지 않습니다.”
으으, 수십 명도 충분히 많은 거 아닌가?
하지만 저렇게 신이 난 고미에게 보는 눈이 많다고 무작정 하지 말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때, 하늘이 어두워지며 갑자기 가느다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폭풍으로도 모자라서 비까지?
[ 고, 고미! 이건 좀 심하잖아! ]
당황한 내가 전음을 보내자, 고미가 억울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 이, 이 몸이 아니다! ]
[ 그럼 누구야? ]
고미와 내가 전음을 주고받고 있을 때, 한유진 씨가 우산을 꺼내 들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으휴, 덮어놓고 변신 좀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저런 건 또 언제 챙기셨대.
어? 잠깐.
“설마 이거 한유진 씨가 한 거예요?”
“비 오면 알아서들 들어가지 않겠어요?”
아니, 휴양지에서 이런 횡포를 부려도 되는 거야!?
그리고, 언제부터 이런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사도가 되면서? 아니면 그전부터?
“날씨도 바꿀 수 있어요?”
“아뇨, 그 정도로 대단한 능력은 없어요. 그냥 마법으로 어차피 올 비를 약간 당겨쓰는 거라고 해야 하나. 가만히 뒀어도 한 두시간 지나면 비 왔을 거예요.”
한유진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것도 충분히 대단한 능력 아닌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비를 뿌리시면 어떻게 해요.”
“어차피 언제 게이트가 열릴지도 모르는데, 게이트 열리고 나서 부랴부랴 사람들 대피시키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겠어요?”
비바람이 몰아치자, 사람들은 하나둘 해변을 떠났고, 이를 바라보던 한유진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제가 많이 해봐서 알아요. 던전이나 게이트 열리면 꼭 도망 안가고 카메라 들이대는 인간들 있어요. 배짱이 좋은 건지, 약 먹을 시간을 깜빡한 건지, 인간들 몇 남아있으면 얼마나 정신없는 줄 알아요? 지금도 봐요. 눈앞에 갑자기 드래곤 나타났는데 카메라부터 꺼내는 인간들 있잖아요. 보통은 도망갈 생각부터 해야 정상 아니에요?”
한유진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는 듯 밝은 갈색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몬스터들 사이에 사람 몇 껴있으면 브레스도 못 뿜고, 마법도 함부로 못 쓰고, 그렇다고 죽게 둘 수도 없고. 얼마나 일이 복잡해 지는데요. 차라리 이렇게 미리 쫓아버리는 게 나아요.”
그건 그렇네. 생각해보니 너튜브 같은 곳에 게이트 근처에서 촬영한 영상들이 올라오는 걸 본 기억이 있다. 볼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찍은 거구나.
그렇게 한유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이유찬 씨가 손잡이가 달린 밧줄 같은 것을 꺼냈다.
“응? 저거 뭐 하는 거예요?”
“보면 아실 거예요. 고미님이랑 놀아준다고 특수 제작한 전천후 컨트롤 바라나 뭐라나······.”
이유찬 씨가 자신의 꼬리에 밧줄을 동여매자, 고미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며 질문을 던졌다.
[ 호오······. 검은콩, 그 끈은 무엇이냐? ]
“후후, 제가 이것을 묶고 날아오르면, 고미 님께서 붙잡고 서핑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카이트 서핑이라고 부르지요.”
고미보다 수십 배는 커다란 블랙 드래곤이 밧줄의 손잡이 부분을 건네며 말했다.
카이트 서핑? 그건 패러글라이더 같은 거 띄워놓고 하는 거 아니었어?
지금 그 ‘연’ 역할을 자기가 하겠다는 거야!?
[ 오오! 굉장하구나! 그렇다면 엄청난 속도로 서핑을 즐길 수 있는 것이냐!? ]
이, 이런 미친······!
지금 바다에는 2미터도 넘는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는 데다가,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어부들도 이런 날씨에는 배 안 띄우는데, 저 바다 위에서 드래곤에 줄을 달아 놓고 서핑을 즐기겠다고?
[ 검은콩······. 너는 정말이지 훌륭하구나. 나의 초코바를 불태운 일은 이것으로 완전히 용서하도록 하겠다! 자, 가자! 모험의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
안 돼! 의기투합 하지 마! 이런 극한의 익스트림 스포츠로 하나가 되지 말라고!
“고미! 안 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아무리 고미가 슈퍼 먼치킨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카이트, 아니, 드래곤 서핑이라니!
“그리고 바다도 원래대로 돌려놔, 바다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들은 파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큰일 난단 말이야.”
[ 후훗, 걱정하지 말거라. 나약한 인간들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서 바람을 불렀느니라! ]
으음······. 그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겼군. 대견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는건가.
[ 그리고, 이 몸이 파도를 넘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느니라. 만일 이 몸이 저 판목을 타고 파도를 넘지 못한다해도 검은콩이 준 밧줄을 잡고 바다를 벗어나면 되지 않느냐. ]
······.
할 말이 없군. 너무 논리정연해.
확실히 고미의 능력이라면 파도를 넘지 못한다 해도 컨트롤 바를 놓칠 일 따위는 없을 거다.
하아······. 그런데, 어째서 먹는 것과 노는 것에 관련해서만 이렇게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거냐.
[ 그럼 이제 바다로 나가도 되는 것이겠지? ]
답을 마친 고미는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컨트롤 바의 손잡이를 꾹 움켜쥐었다.
“아, 알았어.”
걱정은 되지만, 더이상 고미를 말릴 명분이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말린다고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차라리 뒷수습을 할 방법을 생각하는게 효율적이지.
[ 후후후후! 가자 검은콩! 이 몸에게 그 카이트 서핑이라는 것을 맛보여다오! ]
고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유찬은 스노우보드처럼 생긴 황금색 보드 하나를 꺼내 들었다.
[ 우웅? 이것은 무엇이냐? ]
“후후, 카이트 서핑용 보드입니다.”
그리고는 고미의 도톰한 발을 카이트 보드에 연결한 뒤,
“그럼, 가겠습니다!”
천천히 날개를 펄럭여 격랑이 몰아치는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으으, 불안하다 불안해. 진짜 괜찮은 건가?’
하지만 나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이 증명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쏴아아아-
2미터에 달하는 파도가 자신을 덮치는 순간, 고미는 곧바로 통통한 궁둥이를 씰룩이며 방향을 틀었고,
[ 이것이다! 이것이야! 이 몸에게는 이런 시련이 필요했느니! ]
스릴에 미쳐버린 아기곰 한 마리는 거대한 파도를 넘고, 넘고, 또 넘었다.
연달아 몰아치는 파도도, 거친 비바람도, 몰아치는 파도에 의해 생기는 작은 소용돌이도, 고미를 물속에 빠뜨리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신들린’ 서핑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테크닉.
“괴, 굉장해.”
“엄청하네요.”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나와 한유진 씨, 봉식이는 완전히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검은콩! 속도를 더 높여라! 이 몸은 더 빠른 것을 원한다! ]
여, 여기서 속도를 더 높인다고?
지금 고미는 말이 좋아 카이트 서핑이지, 거의 제트스키를 타는 것이나 다름없는 속도로 앞으로 파도를 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속도를 더 올리라니?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완전히 정신을 놓고 광란의 드래곤 서핑을 바라보던 우리 세 사람은 문득 무언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런데, 너무 멀리 가는 거 아니냐?”
봉식이의 말마따나, 고미는 이미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수십 미터에 달하는 블랙 드래곤마저 머리통만 한 크기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
그래도 저녁 먹을 때까지는 돌아오겠지?
└ 갓고미님 : 수하, 저쪽에 게이트가 나타날 것 같다! 우리는 이대로 게이트로 진격하겠다!
뭐? 이렇게 갑자기?
└ 갓고미님 : 너희가 있는 곳에도 곧 게이트가 나타날 것이다. 남쪽으로 쭉 달려가거라.
농담이 아니군.
└ 허수아비 : 저도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게이트가 열린다는 말에 볼일이 있다며 숙소에 남았던 이강혁 씨도 곧바로 답을 보내왔다.
“봉식아. 가자.”
이어서 해상을 감시하고 있던 레드 드래곤이 날아와 한유진 씨를 태워 번개처럼 날아올랐고,
“그럼 저는 해상 게이트로 갈게요!”
S급이 된 이강혁 씨가 엄청난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뛰어난 검술에 비해 능력치는 평범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지금 그의 속도는 문경준과 비교해도 빠르면 빨랐지, 느리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어디입니까!”
이강혁 씨와 합류한 나는 봉식이와 함께 빗속을 뚫고 남쪽을 향해 내달렸다.
그렇게 5분쯤 달려갔을까?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생겨난 검은색 균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균열 주위에는 이미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와 있었다.
해변에 생긴 게이트답게, 몬스터의 생김새는 주로 반인반어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챙-
날카로운 검명이 울리고, 한줄기 검은 선이 된 이강혁 씨가 그대로 빗줄기를 뚫고 몬스터 무리로 뛰어들었다.
- 크르륵!
“와······.”
가느다란 빗줄기 사이로 띠처럼 이어지는 새하얀 검광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고미의 조언에 따라 ‘검의 달인’ 스킬을 C급까지 올려둔 덕일까. 새삼 이강혁 씨의 검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이 났다.
어느 방향으로 휘두르든 칼끝이 흔들리는 법이 없고, 무엇을 베든 칼날이 막히는 법이 없다.
그의 검은 스스로 나아갈 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고, 열 수 뒤를 읽고 움직이는 사람처럼 한 치의 어긋남도, 낭비도 없이 지극히 효율적으로 몬스터들을 베어나가고 있었다.
‘이강혁 씨가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뭐해! 가자!”
내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봉식이가 거대한 집게발을 가진 몬스터의 갑각을 맨주먹으로 때려 부수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나도 가볼까.’
< 고미류 기공술-곰기(C)가 활성화됩니다. >
< 특수스킬 ‘타오르는 정열’이 활성화됩니다. >
곰기를 발동시키는 순간, 라면의 면발처럼 구불구불한 쇠막대에서 시커먼 화염이 피어오르며 빗방울을 증발시켰다.
‘허곰답보’를 사용해 몬스터들 사이로 뛰어들어 흑염대웅···, 아니, 라면 모양의 몽둥이를 휘두르자,
- 키에에에!
불꽃에 닿은 몬스터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닿기만 해도 이렇게 되는 건가?’
불이 붙은 몽둥이를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들이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고, 확실하게 베인 놈은 순식간에 재로 변해 버렸다.
‘음, 깊게 베면 숯덩이로 만들어 버리고, 그게 아니라도 불꽃에 데미지를 입는 건가.’
이거, 덤앤더머 콤비가 엄청난 걸 만들어내긴 했네.
빨리 마정석 모아서 방패도 만들어 달라고 할까······.
A급 게이트라고는 해도, S급이 된 이강혁 씨에 S급인 새 무기까지 있으니 솔직히 말해 긴장감이 없었다.
게다가 생선(?)들은 불에 약하고, 나는 횟집 아들이니, 상성도 압도적으로 유리하고.
‘이 정도면 5분 내로 정리가 되겠는데?’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든 몬스터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 ···♩
어디선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오며 잠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 계열 스킬?’
< 용신의 가호(SS)가 발동합니다. >
< 세이렌의 노래(A)의 효과가 무효화됩니다. >
그 순간, 동이님이 준 스킬이 활성화되며 금세 정신이 돌아왔다.
“왜 여기서 세이렌이!”
고개를 돌려보자, 당황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는 이강혁 씨가 보였다.
물처럼 부드럽고 제비처럼 빠르던 그의 검놀림이 둔중하게 변하며 빠른 속도로 몬스터에게 포위를 당하기 시작했다.
이강혁 씨는 그나마 나았다. 정신계열 스킬을 방어할 수단이 없는 봉식이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춰버렸으니까.
‘내가 세이렌을 잡아야 해!’
나는 정신을 집중해 빠르게 노래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놈들은······. 내 칼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