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90화 (90/300)

EP.90 고미는 바다가 가고 싶다

노인국을 데려오라는 고미의 말에 장내에는 잠시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4대 길드의 수장 중 하나인데, 그렇게 쉽게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으니까.

불러와도 문제다. 그 할아버지 생긴 거로 봐서는 고미한테 맞으면 바로 요단강 뱃사공 만나실 것 같으니까······. 그건 안되지.

“고미, 뭔가 아는 게 있는 거야?”

“내 짐작이 맞다면, 흑암의 지배자라는 이름은 가짜이니라. 이전에는 어둠의 군주라는 이름을 썼었지.”

흑암의 지배자나 어둠의 군주나, 둘 다 조금 중2병의 냄새가 나는 네이밍이군.

독에 저주, 네크로맨시, 능력도 영 꺼림칙한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

“위험한 녀석이야?”

“성가신 놈이다.”

역시, 위험하다고는 안 하는군. 이놈도 한주먹 감이다 이건가.

“그 자벌레 같은 영감이 평소에는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느냐?”

자, 자벌레······. 그, 그렇지. 워낙에 마르셨으니까······.

듣고 보니 제법 잘 어울리는 별명이기는 한데, 삼룡 어멈 이상으로 충격적인 네이밍이군.

“네, 그렇습니다.”

이강혁의 대답에 고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자벌레 영감은 이미 그놈의 꼭두각시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네?”

“네?”

이강혁과 한유진이 동시에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그놈은 예전부터 그런 식이었느니라. 힘을 준다며 현혹하고, 온갖 부정한 수단으로 타락시켜 먹잇감이 된 인간을 제멋대로 조종했지.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자극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는 놈이다.”

“그럼 네가 확인하고 싶다는 게······.”

“자벌레 영감이 완전히 타락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그놈에게 저항하고 있는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다. 전생에 그 영감은 어땠느냐?”

고미의 말에 이강혁은 무언가 짚이는 게 있다는 듯 지난 회차에서 노인국의 행적에 대해 밝혔다.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했습니다. 초월자들과의 전쟁에서 그는 가만히 앉아 죽음을 맞이했으니까요. 차라리 적극적으로 그쪽에 붙었다면 모를까, 너무 석연치 않은 대응이었습니다.”

이강혁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완전히 타락했다면, 인간의 적이 됐을 거다. 반대라면, 맞서 싸웠을 거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고미, 혹시 흑암의 지배자에게 걸려든 사람들이 미친다거나 자살을 하기도 했어?”

“그렇다. 어찌 알았느냐?”

“마음속의 어둠을 자극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야?”

“그놈은 환술과 흑마법을 이용해 분노나 슬픔, 공포 같은 것을 자극하여 인간을 천천히 어둠으로 빠뜨린다. 때로는 협박을 하고, 때로는 사랑하는 이를 돌려주겠다고 말하고, 때로는 원수를 갚아주겠다며 현혹하지. 그놈의 꼭두각시가 된 자는 대체로 끝이 좋지 않다.”

역시······.

블랙 메이지가 왜 단체로 히키코모리가 됐는지 알 것 같군.

불안, 공포, 우울 같은 부정적인 정서가 강해졌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이 바로 대인기피증과 무기력증이다.

분노가 더 컸다면 문경준처럼 됐겠지. 앞뒤 안 가리고 맘에 안 들면 때려 부수고······. 하지만 가만히 집에 틀어박혀 있다는 건 우울이나 불안, 공황장애를 앓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자벌······. 아니, 노인국 씨가 자벌레 같은 생김새를 하게 된 것도 우울증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저체중은 우울증의 대표 증상 중 하나니까.’

지난번에 봤을 때는 꽤 신경질적이고 의심이 많은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정신을 공격당해 편집 증상까지 생긴 건가.

‘황당하네. 초월자로 인해 단체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길드라니.’

그래도 자벌레 할아버지가 단순히 악랄하고 음험한 악당이라는 쪽보다는 희망이 보인다.

“고미, 이 문제, 나한테 맡겨줄 수 있어?”

고미한테 맡기면 꿀 주먹으로 숙면, 아니 영면에 들게 할지도 모른다.

이유찬 씨도 한방에 꿈나라로 보내주는 고미의 사랑의 맴매를 자벌레 같은 몸으로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흑암의 지배자인지 뭔지 하는 중2병 걸린 초월자는 참교육이 좀 필요해 보이지만, 노인국은 조금 더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다.

“흠, 뭔가 생각이 있는 것이냐?”

“응.”

고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너에게 맡기겠다. 단, 자벌레 영감의 뒤에 있는 그 독사 같은 놈은 이 몸이 버릇을 고쳐줄 것이니라.”

“좋아. 그럼 한유진 씨, 히드라의 독주머니 건은 생각해 본다고 전해주세요. 승낙도 거절도 아니고 애매하게. 아직 그쪽의 의도를 모르니까요.”

“알겠어요.”

그렇게 길드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정리가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아웅이와 다웅이 문제였다.

“제르보나 씨, 제가 전에 알틴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어보신 거 기억나시죠?”

“네, 시험해보고 싶다던 건 잘 끝나셨는지요?”

“아뇨, 그게 작은 문제가 좀 있어서······.”

이후 나는 아웅이와 다웅이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서, 설마, 고미님만큼 귀여운 아이들이 둘이나 더 생겨났다는 건가요!?”

그러자, 곁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유진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꺅꺅거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그런데 말씀드렸다시피 문제가 좀 있어서······.”

“걱정 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답을 받아 놓을게요!”

한유진은 고미를 처음 봤을 때 만큼이나 잔뜩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으음, 나보다도 더 열성적이군.’

그럼 이 문제는 한유진 씨에게 맡기고 그만 돌아갈까.

시간도 이미 너무 늦었고, 전에는 낮에 들어갔다가 해질 때가 다되어서야 나왔으니까, 지금 들어가면 날이 샐 게 분명하다.

“고미, 어떻게 할까?”

“일단은 돌아가자꾸나. 시간이 너무 늦었다. 동이를 만나고 돌아가면 엄마가 화를 낼 것이다.”

역시, 고미도 나와 같은 생각이군.

“그럼 한유진 씨, 그 건도 잘 좀 부탁드릴게요.”

* * *

대화를 마친 후, 우리는 이강혁과 함께 부모님의 가게로 향했다.

원래는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전화를 해보니 부모님은 개업 준비 때문에 늦게 들어온다고 하셨고, 그 얘기를 들은 고미가 가게에 가보고 싶다고 떼(?)를 썼거든.

“흠흠, 위대한 이 몸 없이도 가게가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걱정이구나.”

뒷좌석에 앉은 고미가 초코바를 꺼내 우물거리며 말했다.

몇 시간 전에 그렇게 먹어놓고, 또 초코바가 들어가는 건가······. 이러다 체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다.

“고미, 그렇게 먹어도 되겠어?”

“이 몸이 현세에 나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고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뭔데?”

“간식이 들어가는 배는 따로 있더구나.”

······.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인 것 같은데, 왜 이런 건 안 가르쳐줘도 알아서 배우는 걸까.

가게에 도착하니 안쪽에서는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었고, 아버지는 인부들과 함께 직접 수족관을 설치하고 계셨다.

횟집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것이 수족관이다 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나도 어깨너머로 배운 거지만, 산소 공급도 원활해야 하고, 규칙적으로 물도 갈아줘야 하고, 수온이 2, 3도만 올라가거나 떨어져도 고기가 전부 죽어버리니 위치부터 시작해 신경 쓸 게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특히 여름철이면 수온 관리 때문에 일이 있어도 가게를 오래 비우지도 못할 정도니까,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다.

“어, 아들들 왔네!”

차에서 내리자, 아버지가 환히 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손을 흔들었다.

표정을 보니 새 가게를 연다는 사실에 어지간히 설레시는 모양이다.

“기다려, 이제 다 끝났으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수족관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고미가 성화라서 오기는 왔지만, 딱히 도울 수 있는 일이 없기는 하다.

[ 수하, 저 커다란 상자는 무엇이냐? ]

그때, 언제나처럼 나의 어깨에 올라타고 있던 고미가 수족관을 가리키며 물었다.

[ 저기에 전에 먹었던 물고기가 담기는 거야. ]

[ 호오······. 그것참 신기하구나. 그럼 저 안에는 바닷물이 담기는 것이냐? ]

[ 응, 그렇지. ]

[ 그럼 바닷물을 직접 날라오는 것이냐? ]

[ 응. ]

[ 흐음······. ]

이것저것 물어대던 고미는 갑자기 물끄러미 수족관을 바라보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 왜 그래? ]

[ 이 몸도 그 바다라는 곳에 가보고 싶구나. ]

아, 생각해 보니 고미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겠구나.

해양 지형을 가지고 있는 던전도 있지만, 아무래도 바깥세상의 바다와는 다르겠지.

말이 좋아 바다지, 사방이 몬스터로 가득한 곳이니까.

해수욕은커녕 일광욕도 불가능할 거다.

극한의 익스트림 스포츠로 바다에서 몬스터 잡기라도 즐기고 싶은 게 아니라면 휴양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지.

순간 고미를 데리고 바다에 가려면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지금뿐인가.’

부모님도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하면 한동안은 가게를 비우기 어려우실 거다.

개업하자마자 휴무를 걸고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 적어도 몇 달은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시겠지.

사실 우리 가족은 근 10년간 가족 여행이라는 걸 가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장사하느라 바쁘고, 나도 나대로 바빠서 시간을 맞춰 여행을 간다는 건 꿈도 못 꿨으니까.

‘생각해 보니 고미랑 제대로 놀아준 적도 거의 없네.’

지리산에서 내려온 이후로 이강혁 씨부터 시작해서 한유진 씨 문제에, 초월자니 뭐니 하는 머리 아픈 문제가 쉴 새 없이 터져대는 통에 고미와 제대로 놀아준 것은 실상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좋아, 이런 건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거지.

내 성격상 이 자리에서 결정 못 내리면 또 이런저런 일에 발목 잡혀서 평생 고미한테 바다 구경 못 시켜줄 거다.

[ 그럼 우리 바다 갈까? ]

[ 우웃! 바다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것이냐? ]

[ 조금 멀기는 하지만,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지. ]

[ 좋다! 언제 갈 것이냐? 이 몸은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다! ]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최대한 빨리 가보자. ]

* * *

이후 우리는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곧바로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아빠, 우리 여행이나 갈까?”

가족 여행에 매번 실패해봐서 안다.

다음에, 다음에, 하다 보면 평생 못 가는 게 여행이다.

우리 가족만 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미루다 10년 가까이 여행은커녕 가까운 곳으로 하루 놀러 가는 것도 못 했으니까.

“갑자기?”

“고미가 바다 보고 싶대. 엄마 아빠도 2년이나 병원에만 누워있었잖아. 이번 기회에 바람이라도 쐬자. 가게 개업하면 당분간 여행은 꿈도 못 꿀 거잖아.”

“그렇다! 이 몸은 바다가 가고 싶다!”

잔뜩 신이 난 고미가 솜방망이를 붕붕 흔들어대자, 두 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랬어요? 그럼 다같이 바다 구경 갈까?”

어머니가 부드럽게 고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역시, 막내가 가고 싶다면 내가 말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는 건가.

조금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부모님도 고미를 아껴준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이 더 크다.

“으음······. 어차피 중요한 공사는 대충 끝났고, 업자분들도 믿을만한 것 같으니까 가족 여행 한번 가지 뭐.”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도 동의를 표했다.

“그럼 결정이네. 내일 아침에 준비해서 바로 출발하자.”

봉식이 역시 모처럼 떠나는 가족 여행에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고,

“후후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

고미의 꼬리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격렬하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이거 잘하면 그대로 하늘로 날아갈지도 모르겠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격렬한 움직임.

음······. 그런데 어디로 갈지, 숙소는 어떻게 할지, 준비된 게 하나도 없네.

너무 충동적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며칠만 지나도 노인국 문제에 발목을 잡힐 게 뻔하니 최대한 빨리 갔다 오는 게 좋을 것 같다.

역시 이럴 때는 숲속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지?

└ 한유진 씨, 혹시 바다 근처에 당장 예약 가능한 숙소가 있나요? 고미가 같이 묵을 수 있는 곳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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