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갓-고미님의 불꽃같은 장인 정신(Feat. 흑염룡)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 어떤 일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으며, 아무리 후회하고 애를 써도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디 지금이라도 이유찬이 저 결정을 되돌리기를 바란다.
“저기······.”
“고미님의 권능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저의 뿔 역시 전사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 터······. 부디 제 뿔에게 고미님과 수하님의 무기가 되어 싸울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십시오.”
안 돼, 글렀어······. 이 사람의 열정을 막을 수가 없다.
뭐가 이렇게 열혈이야.
“흐음······.”
조용히 이유찬을 내려다보는 고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
통했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통해버렸어.
마음이 맞아버렸다고.
“검은콩. 그것이 정녕 너의 뜻이냐?”
고미가 진중한 표정으로 되묻자,
“드래곤에게 있어 뿔은 긍지와 자존심의 상징, 저의 뿔이 수하님의 무기가 된다면, 그 긍지는 절대 부러지지 않는 불굴의 칼날이 되어 두 분의 앞을 가로막는 적을 모조리 베어버리리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장엄해. 비장해. 쓸데없이 웅장하다고.
일단 베는 거 자체가 불가능해.
당신의 신념이 얼마나 단단한지는 모르겠는데, 베는 데 쓰이지는 못한다고.
“좋다. 특별히 이 몸이 만들 위대한 신검에 너의 긍지를 녹이는 것을 허락하마. 위대한 이 몸의 권능이 다시는 너의 자존심과 긍지가 부러지지 않도록 해줄 터이니, 수하의 검이 되어 싸우거라.”
안 돼! 감화되지 마! 같은 말투를 쓰지 말라고!
“감사합니다!”
아아, 안 돼······.
‘조물조물’을 본 적이 없는 제르보나와 한유진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알틴 역시 금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삐이이!’하고 목소리를 높여 울어댔다.
반면 이강혁과 봉식이는 애도를 표하듯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차마 이유찬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드래곤의 뿔은 심장 다음으로 많은 마력이 모이는 곳이다.
당연히 강력한 드래곤일수록 그 뿔에도 강한 마력이 깃들며, 원체 자존심이 강한 생물이다 보니 자신의 힘이 담긴 뿔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뿔이 조물조물에 의해 고물이 되어버린다면······. 음······. 엄청 충격받으실 것 같은데.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고미가 몸을 풀기 시작했으니까.
“후훗, 좋다. 배불리 먹었으니 소화를 시키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수하, 마정석을 꺼내라.”
고미의 말에 나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번에 던전을 돌며 얻은 A급 마정석 10여 개를 꺼내 들었다.
마침 나도 실험해보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다만 이유찬 씨의 뿔을 가지고, 그것도 본인 앞에서 실험을 하는 잔혹한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고미가 만드는 아이템은 모두 훌륭한 옵션을 가지고 있지만, ‘검의 달인’ 스킬과는 궁합이 좋지 않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핵빠따만 해도 이강혁 씨의 ‘커팅’ 덕분에 간신히 검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이강혁 씨, 블랙 드래곤 뿔, 자를 수 있어요?”
나의 질문에 이강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수 없지만, 드래곤의 뿔을 넣어 강화한 무기라면 제 실력으로는 자를 수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시. 이강혁이 자를 수 없다면, 귀한 블랙 드래곤의 뿔을 넣은 무기가 검이 아니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럼 검의 달인 스킬에 투자한 의미가 없어.’
그렇다고 고미의 젤리 용광로로 녹인 쇳물에 내가 손을 댈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쉽게 물러날 수는 없지.
“고미, 이유찬 씨의 뿔을 심지 삼아서 그 위에 녹인 마정석을 덧씌워 보는 건 어때?”
드래곤의 뿔은 불에 강하다.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정석보다 내열성이 강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러니 그것을 토대로 모양을 잡아간다면, 고미의 손재주로도 어떻게든 모양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호오, 그것도 재미있는 생각이구나. 검은콩의 혼이 담긴 무기라는 느낌도 더욱 살 것 같고 말이다.”
고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룡의 뿔이 코뿔소의 뿔처럼 살짝 곡선으로 휘어 있다는 게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이런 형태의 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까.
잘은 모르지만, 영화에서 기마민족이나 중동 지방의 검들이 이렇게 이상하게 휘어있는 것을 자주 봤다.
“좋다. 그럼 제작에 들어가 보자꾸나.”
말을 마치기 무섭게 분홍빛 젤리가 용광로처럼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간닷, 고미류 제작술. 조물! 조물!”
음, 관중들이 많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기합이 잔뜩 들어갔군. 힘이 들어가면 모양이 더 망가질 텐데······.
치이익-
검은색의 마정석이 액체에 가까운 상태로 변하는 순간, 나는 곧바로 고미에게 흑룡의 뿔을 넘겼고,
“고미! 굴려!”
“알겠다!”
고미는 떡에 고물을 묻히듯 녹아내린 마정석 위에 흑룡의 뿔을 굴려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안정적이야.’
안에 심지가 있기 때문일까? 검의 형태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 안정적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게 뭔지 알아볼 수는 있을 정도.
이강혁과 봉식이 역시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삼룡이 패밀리는 다른 의미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엉망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고작 이 정도로 놀라기는. 이래뵈도 이게 여태까지 만든 것 중에 가장 훌륭한 거라고.
날이 없기야 매한가지지만, 고미의 손재주로 이 정도······.
‘자, 잠깐.’
하지만 흑룡의 뿔이 한 바퀴, 한 바퀴, 바닥을 구를 때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코팅이 두꺼워질수록 잔뜩 기합이 들어간 고미의 젤리에 의해 검신 전체에 울퉁불퉁하게 요철이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 왜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는 거냐!’
게다가 뿔의 크기가 50센티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다 보니, 심지가 없는 곳은 점점 더 기괴한 형태로 휘어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냥 굴리기만 하는 데 저렇게 휠 수가 있냐고!
“고, 고미! 자, 잠깐만!”
이대로 가다가는······.
“검은콩! 지금이다! 네 모든 힘을 불어넣어 이 몸에게 브레스를 뿜거라!”
뭐!?
“어서! 너의 뜨거운 영혼을 이 검에 불어넣는 것이다!”
아,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영혼을 그 따위 방식으로 불어 넣어! 그것도 이런 상태로!
“하지만 고미님께서!”
“이 몸은 걱정하지 말아라! 자! 어서! 이미 마정석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 크르르······.
고미의 호통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이유찬이 곧바로 입을 벌려 검붉은 브레스를 뿜어냈고,
“더! 아직도 부족하다! 너의 마음은 이리도 미지근했단 말이냐!”
갈색의 솜뭉치는 화염 속에서 열심히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문자 그대로 ‘불꽃 작업’을 이어나갔다.
음······. 그냥 내가 검을 포기하는 게 낫겠군.
이 덤앤더머 콤비의 넘치는 열정을 막을 도리가 없어.
그렇게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구불구불한 쇳덩이를 손에 든 고미가 검붉은 화염을 뚫고 걸어 나왔다.
“수하, 완성이다. 검은콩의 뜨거운 마음이 제대로 깃들었구나.”
망했군.
심지가 들어간 부분은 살짝 휘어서 그렇지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간부터는 검신 전체가 물결치듯 휘어져 있어서 검이라는 판정을 받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충격적인 작업 방식 이상으로 충격적인 검의 외형에 삼룡이 패밀리는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고,
“이, 이럴 수가······.”
구겨진 자신의 영혼과 긍지를 확인한 이유찬은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는 가장 잘 만든 겁니다.
고미도 저도 최선을 다했으니까 너무 좌절하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고미는 흡족한 표정으로 나에게 ‘신검’을 건네주었다.
“이 검의 이름은 흠······. 흑염대웅신검이 좋겠구나.”
그리고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걸작(?)에 이름까지 붙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유찬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쩌겠나 하는 마음으로 검을 받아드는 순간,
< 검의 달인(C)이 활성화됩니다. >
······.
장난이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나는 검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한번 집어 들었다.
< 검의 달인(C)이 활성화됩니다. >
왜? 어째서? 이 꼬부라진 쇠막대기가 왜 검이야?
시스템 씨, 지금 공정하게 측정하고 있는 거 맞아?
“후후, 왜 그러느냐 수하? 너무 완벽한 걸작이라 말을 잃을 정도로 감동을 한 것이냐?”
고미가 잔뜩 고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이강혁 씨, 혹시 이렇게 꼬불꼬불한 검도 있어요?”
나의 질문에 이강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뭐, 꼬불꼬불한 검이 없는 건 아닙니다. 동남아의 도검인 크리스(Kris)나, 유럽의 플랑베르주는 본래 검신이 물결치듯 휘어 있으니까요.”
아······. 정말로 이런 검이 있긴 있구나.
이래서 문화적인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건가.
갑자기 유네스코에 감사 편지라도 보내고 싶어지네.
“후후, 수하! 어서, 어서 그 흑염대웅신검의 힘을 확인해 보거라!”
잔뜩 신이 난 고미는 꼬미를 뱅글뱅글 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어서 검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음, 그럼 해피곰 포인트를 써볼까.
지금 내 곰정사 스킬은 레벨이 낮아서 이 검의 옵션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
[ 고미, 그런데 내 스킬로 이 무기의 옵션을 확인하려면 해피 곰 포인트를 써야 하는데······. ]
[ 걱정 말거라! 오늘 이 몸은 엄청나게 기분이 좋으니 말이다! ]
그럼 고미의 허락도 받았으니 해피곰 포인트로 곰정사의 스킬 레벨을 올려볼까······.
< 해피 곰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
< 날카로운 곰정사의 눈 (C+)이 (A+)로 상승합니다. >
< 해피 곰 포인트가 100 차감되었습니다. 잔여 포인트 : 627 >
기분이 좋다더니, 확실히 해피 곰 포인트는 많이 쌓여있었군. 게다가 곰정사 스킬은 두 등급을 올리는데도 100포인트 밖에 들지 않았다.
‘뜻밖의 수확이네.’
중요한 아이템을 감정할 일이 있다면 그때마다 포인트를 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어차피 자주 쓰는 스킬도 아닌데, 여기에 아까운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는 건 비효율적이지.
‘스킬 포인트는 전투 스킬에 투자하고, 이런 스킬은 필요할 때만 해피 곰 포인트로 레벨을 올려서 쓰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정한 뒤 ‘곰정사’ 스킬을 발동하자,
< 감정에 실패했습니다. 아이템의 등급이 너무 높습니다. >
“어······.”
“왜 그러느냐?”
상상을 뛰어넘는 등급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고미를 바라봤다.
“이, 이거, S급 아이템 같은데?”
“정말이십니까!?”
나의 말에 좌절한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이유찬이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네, 저 감정 스킬 가지고 있는데······. 잠시만요.”
다시 한번 해피곰 포인트를 사용해 곰정사 스킬을 임시로 강화하자, 마침내 ‘흑염대웅신검’의 옵션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고미와 흑염룡의 뜨거운 영혼으로 벼려낸 신검 (S) >
- 위대한 고미 님과 흑룡의 열정과 혼이 어린 걸작 중의 걸작입니다. 검 안에 담긴 열정과 장인 정신은 모든 것을 녹일 만큼 뜨겁고, 뜨겁고, 뜨겁습니다.
- 힘(+15), 민첩(+10), 체력(+20), 마력(+10)
- 특수 옵션 (1) : 불굴의 투혼
흑룡의 마력으로 인해 검의 영혼이 된 뿔만 무사하다면 몇 번이고 부서진 검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검이 상했다면, 뜨거운 불꽃에 넣어보세요.
- 특수 옵션 (2) : 타오르는 정열
검안에 담긴 두 강력한 존재의 뜨거운 마음으로 적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검기를 불어넣으면, 흑룡의 기운이 담긴 불꽃으로 변화합니다.
- 특수 옵션 (3) : 불꽃 망토
진정으로 뜨거운 혼을 가진 자는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력을 소모해 S급 이하의 모든 불꽃을 차단하는 불꽃 망토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뭐, 뭐야 이거······. 뭐 이런 괴물 같은 아이템이 나왔어.’
너무나 강력한 옵션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 축하합니다. 불가능한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
< 새로운 칭호가 부여됩니다. >
< 새로운 스킬이 부여됩니다. >
또다시 시스템이 보상을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