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7 흑룡무쌍, 이유찬의 진정한 실력
“무슨 제안이죠?”
나의 질문에 한유진은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강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강혁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걸요?”
“뭔지는 몰라도, 미리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리죠.”
이강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이자, 한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꼭 한국에 4대 길드가 필요하냐. 패왕과 저스티스는 어차피 비슷한 계열의 헌터로 채워져 있는데, 3대 길드면 충분하지 않겠냐. 문경준이 나에게 한 말이에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이강혁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저스티스와 패왕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길드의 성격이 정반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이득이 맞물려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패왕은 김춘식이나 문경준처럼 과격하고 양아치 같은 사람이 모여있고, 저스티스는 이강혁과 비슷한 류의 헌터들이 모여있다.
이렇게 가치관이 정반대인데, 길드원들의 능력은 양쪽 모두 기공이나 물리 계열이다보니, 스카우트부터 시작해 필요한 아이템까지, 파이가 너무 겹치는 것이다.
“언젠가 올 일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움직임이 빠르군요.”
이강혁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정보에 대해서는 충분히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사례를 하겠다고 덧붙이자, 뜻밖에도 한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제 선물이라고 하죠. 어찌 보면 고미 님하고 인연을 맺게 된 건 그쪽 덕분이니까요.”
음, 태양초 굽기가 이렇게 연결이 될 줄이야.
사람 앞일 모른다더니, 고미와 나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군.
“후후후, 보기 좋구나. 역시 친구들은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
고미가 꿀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뭐, 이번에도 수하 씨 계략이 통했네요.”
한유진의 칭찬에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줄은 몰랐다.
내 계산은 그냥 용왕이 더 강해졌다는 인상을 주면, 패왕이든 블랙 메이지든 뭔가 좀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정도였으니까.
그게 동맹 제안이든, 공격이든, 혹은 자기들끼리 손을 잡는 것이든 말이다.
설마하니 이렇게 곧바로 저스티스를 밟으려 들 줄은 몰랐다.
“그 아저씨하고는 전생이나 지금이나 별로 궁합이 안 맞는구만. 어쩔 거야 강혁이 형?”
봉식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전생이요?”
“아, 전생에 그 인간하고 저하고 치고받고 했다던데, 이번 생에도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네요.”
봉식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간략하게 답하자,
“그쪽이 문경준하고 붙을 정도로 강하다고요?”
한유진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놀람과 의심이 뒤섞인 눈초리로 되물었다.
뭐, 한국의 물리 계열 헌터 중에는 최강이라는 평을 듣는 게 문경준이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지.
“네, 봉식이는 전생에 만수왕의 사도였거든요. 아쉽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1대1로는 문경준에게 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번 생에는 아직······.”
“흥! 이 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이번 생에는 그 덩치만 큰 멧돼지 같은 놈을 아주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수왕 이야기가 나오자, 흥분한 고미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외쳤다.
“당연합니다. 만수왕의 사도가 되는 것보다, 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 편이 백배는 나을 것입니다.”
역시 고미에 대한 믿음은 이강혁이 제일이군.
뭐, 내 생각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고미한테 얻어터진 놈의 사도가 돼서 뭐 하겠어.”
봉식이까지 자신을 띄워주자, 신이 난 고미의 꼬리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후후후, 기다려라. 봉식이! 조만간 너에게도 이 몸이 특훈을 시켜주마!”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이유찬이 커다란 바비큐 그릴과 흰색 천으로 덮인 이동식 조리대를 가지고 정원에 나타났다.
메뉴는 바비큐인가 보네. 근데 바비큐를 요리라고 할 수 있나?
뭐, 맛이야 있겠지만.
“호오, 저것은 무엇이냐? 처음 보는 물건이구나.”
새로운 조리도구의 등장에 고미는 귀를 쫑긋 세우며 흥미를 보였다.
“저기에 고기를 굽는 거야. 부모님 깨어나셨던 날 먹었던 소고기 기억나?”
“흐음······. 그렇구나. 생긴 것만 다르지 똑같이 고기를 굽는 것이란 말이지?”
“그래도 역시 바비큐는 바비큐만의 맛이 있지.”
봉식이의 말에 고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유찬과 드럼통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나를 만족시킬 수 있겠느냐?’하고 묻는 듯한 눈빛이군.
그러자, 이유찬이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이동식 조리대를 덮고 있던 천을 휙, 하고 들어 올렸다.
‘뭐야, 연출이 너무 숙련됐는데··· 진짜로 요리에 내공이 있어 보이잖아.’
천이 걷히며 조리대 위에 있던 재료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반신반의하던 고미의 눈에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검은콩, 일단은 합격이라고 해주마.”
“감사합니다 고미님!”
대화의 흐름이 왜 이 모양이냐···고 살짝 딴지를 걸어보고 싶지만, 내가 보기에도 비주얼은 합격이네.
이유찬이 준비한 것은, 바로 ‘꼬치 바비큐’였다.
“고미님께서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 하니, 아직 이 꼬치 바비큐를 맛본 적은 없으실 것 같아 준비해 보았습니다.”
“좋다. 아직 이런 종류의 음식은 본 적이 없구나. 네 도전을 받아주마.”
“도전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이것은 그저 고미님을 흠모하는 마음에서 나온 미천한 성의에 불과합니다.”
······.
대화 흐름 예술이네. 뭐가 이래.
“후후,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너도 제법 괜찮은 녀석이었구나. 허락하마. 한번 네 실력을 마음껏 뽐내보거라.”
고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유찬은 곧바로 입에서 불을 뿜어 드럼통에 담긴 숯에 불을 지폈다.
드래곤 브레스로 만든 바비큐라, 어디 가서 절대 못 먹어볼 음식이긴 하네.
게다가 둘의 기묘하면서도 죽이 척척 맞는 것 같은 묘한 대화에 정신이 팔려서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저 꼬치 바비큐, 그냥 꼬치가 아닌 것 같다.
고기에 양념이 된 건 물론이고, 꽂혀있는 과일이나 버섯 같은 것에서도 본래의 향 외에 무언가 비전의 양념이 가미된 듯, 독특하면서도 맛깔스러운 냄새를 뿜어내고 있다.
“이유찬 씨 요리 잘하는 것 같네요.”
나의 말에 제르보나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저 얼간이는 일이 없을 때면 온종일 요리 프로만 보니까요. 유진이와 안면이 있는 요리사들 쫓아다니면서 직접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요. 게다가 우리 식사는 매일 저 녀석이 만들거든요. 식문화에는 인류 문화의 정수가 담겨있다나 뭐라나.”
“흥, 제르보나. 매일 내가 만든 요리를 먹는 주제에 말이 많군.”
이유찬은 그렇게 쏘아붙이며 그릴 위에 정성스럽게 꼬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손놀림에 표정도 프로 요리인들 못지않게 진중하다. 이렇게까지 요리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열혈 블랙 드래곤이라니, 참 희한한 캐릭터가 나타났군.
치이이익-
그릴 위에 꼬치가 올라가는 순간, 이유찬의 요리에 숨겨진 또 하나의 마법이 발휘됐다.
‘이 냄새······. 뭐지?’
후각이 강화된 나와 고미뿐 아니라 이강혁과 봉식이마저 코를 킁킁거리며 그 향기에 도취됐다.
“호오, 검은콩! 굉장하구나!”
고미가 손뼉을 치며 감탄하자, 이유찬이 팔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예를 갖추며 말했다.
“인간계에 온 이래로 요리에 적합한 불꽃을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물이 고미님을 기쁘게 만들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이런 미친···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향이다.
불꽃에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미칠듯한 향기가 나는 거지?
과일의 단 냄새는 몇 배나 강해졌고, 거기에 양념이 스며들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하고도 깊은 냄새가 흘러나온다.
고기에서는 위장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강렬한 향기가 폭발했고, 버섯에서도 기름 냄새와 소금 냄새에 더해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진동한다.
그야말로 향기의 축제, 코와 위장에 가해지는 무차별 폭격. 식욕을 돋우는 것을 넘어, 강제로 식욕을 폭발시키는, 가히 폭력적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인 향기다.
“와, 이런 냄새 처음 맡아봐.”
“굉장하군요. 정말 엄청난 향기입니다.”
이강혁과 봉식이 역시 그 향기에 취한 듯, 아니 홀린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꼬치가 노릇하게 익자,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흑룡의 불꽃으로 만들어진 마법의 바비큐 꼬치를 집어 들었다.
“검은콩! 앞으로 너에게 정기적으로 이 몸에게 요리를 대접할 영광을 주마!”
꼬치의 맨 위에 끼워진 고기를 맛본 고미가 정신없이 입을 움직이며 외쳤다.
고기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나 역시 고미의 말에 절절하게 공감했다.
진하지만 불쾌하지 않은 후추향, 그 위에 덧씌워진 짭조름한 소금의 맛과 고기의 풍미를 100%, 아니 200% 이상 끌어올려 주는 양념까지.
대체 고기에 무슨 양념을 하면 이런 깊은 풍미가 나는 걸까?
요리라기보다 차라리 마법에 가까운 맛이다.
구운 토마토는 단 음식을 싫어하는 나조차 홀딱 반해버릴 정도로 상큼하고 깔끔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단맛을 자랑했고, 독특한 향기와 쫄깃한 식감이 어우러진 버섯 역시 어디서도 맛본 적 없는 진미였다.
“저, 저기······. 아직 노인국이 무슨 거래를 하자고 했는지 얘기 안 했는데······.”
이 맛의 폭풍에 날아가지 않고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한유진 한 사람뿐이었다.
“에잇, 그것이 뭐가 중요하느냐! 문제가 생기면 이 몸이 나서서 혼을 내주겠다! 방해하지 말거라!”
고미가 불도저처럼 꼬치의 다음, 다음으로 진격하며 외쳤다. 심지어 평소라면 입에도 대지 않을 대파 구이마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있다.
평소라면 딴지를 걸었겠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고미와 같은 마음이다.
이런 요리 앞에서 일 얘기 따위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싶다.
“한유진 씨 매일 이런 거 먹어요?”
“뭐, 매일은 아닌데 자주 먹어요.”
“부럽다!”
“부럽구나!”
“부럽네요!”
한유진의 대답에 봉식이와 고미, 이강혁이 약속이나 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하나, 또 하나, 꼬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릴 위에 올라갔고, 결국 우리 모두의 위장이 더이상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광란의 식사가 끝났다.
“으으, 더이상은 들어가지 않느니라······.”
평소보다 배가 두 배는 부풀어 오른 고미가 괴로운 표정으로 그릴을 바라보며 가장 먼저 항복을 선언했고,
“우욱······. 더는 못 먹겠다.”
“저, 저도 이 이상은······.”
봉식이와 이강혁도 아쉬운 목소리로 패배를 시인했다.
나는 거의 토하기 직전까지 먹은 상태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과식을 해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유찬의 음식은 그 정도로 대단했다.
우리 넷의 위장과 혀를 일방적으로 굴복시키고, 맛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그야말로 ‘천하무쌍’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맛.
“다들 맛있게 드셔주시니 기분이 좋군요.”
이유찬은 배가 터질 때까지 음식을 욱여넣은 우리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빠르게 뒷정리에 들어갔다.
이, 인정. 단순한 괴짜 열혈 드래곤이 아니었어.
당신은 진짜 참 요리인이다.
던전 안 돌고 음식점 차려도 헌터 일 하는 것만큼 벌거야.
이유찬이 뒷정리를 하는 사이, 정원 안에는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너무 배가 불러서 말을 할 수가 없었거든.
그렇게 의자 위에 반쯤 드러누워 쉬고 있을 때, 정리를 마친 이유찬이 다가와 돌연 고미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우웅, 왜 그러느냐······. 이 몸은 이미 너를 용서했느니라.”
고미의 목소리는 나른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 고미님에게 한가지 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좋다, 말해보거라.”
허락을 받은 이유찬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고미님께서 수하님의 무기를 만들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음, 한유진이 벌써 그런 얘기까지 했나. 하긴, 그 여자도 명실상부한 곰빠니까, 핵빠따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어 댔을지도······.
“그렇지. 그것은 왜 묻느냐?”
“수하님의 새 무기를 만드는데 제 뿔을 사용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유찬의 부탁 아닌 부탁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당신 뿔이 아직 내 손에 있긴 한데······. 으, 이걸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하지만 이어지는 이유찬의 말에, 나의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락해 주신다면, 감히 수하님의 새 무기를 만드는 것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제 뿔에 드래곤의 마력이 녹아든다면, 틀림없이 쓸만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조물조물에, 드래곤의 뿔과 마력이 보태진다면...대체 어떤 무기가 나오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