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79화 (79/300)

EP.79 식전 운동은 음식의 맛을 더해준다

우리는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던전을 나갔다.

차단막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던전 클리어를 알리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고미님, 고생하셨습니다. 나머지 분들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제르보나가 판타지 영화에서 본 중세의 기사처럼 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대체 저런 예법은 어디서 배운 걸까.

“흥, 이 몸에게 그 정도 괴수 따위는 식전 운동도 되지 않느니라.”

보자기를 뒤집어 쓴 고미가 가볍게 손을 들며 거만하게 말했다.

꼬르륵-

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녀석의 뱃속에서 맛있는 것을 달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 흐흠.”

고미는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먼 산을 바라봤다.

음, 몸과 입이 따로 노는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유진은 귀엽다는 듯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제르보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제르보나, 엄마네 분식집 알지? 이분들 다 태우고 거기로 가자.”

“알겠어.”

“우웅? 저 시장이라는 곳에서 떡튀순을 먹는 것이 아니었느냐?”

고미가 보자기를 뒤집어쓴 채 시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방금 S급 던전을 클리어했잖아요. 한 시간 만에 S급 던전을 클리어한 건 한국 최초니까, 아마 곧 기자들이 몰려올 거예요.”

“우웅? 기자라는 것이 무엇이냐? 몇 놈이 몰려오더라도 이 몸의 상대가 될 수는 없느니라! 그러니 안심하고 떡튀순이라는 것을 먹으러 가면 된다!”

고미의 반응에 한유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무언가 설명을 하려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기자라는 게 그런 게 아니라······.”

역시, 신종 호구는 고미를 다루는 법을 전혀 모르는군.

“고미, 기자들이 몰려오면 어떻게 그렇게 빨리 S급 던전을 클리어했는지 물어볼 거고,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너를 찾아올 거야.”

“흠, 이 몸의 위대함을 알게 되면 모두가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고미가 잔뜩 거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다가 매일 매일 집에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할 거고, 나중에는 엄마 아빠에게도 찾아올걸? 그럼 맛있는 것도 못 먹고, 놀러 가지도 못할 텐데?”

“이, 이럴 수가! 기자라는 것이 그리 귀찮은 놈들이었단 말이냐!?”

보자기 귀신이 된 고미가 잽싸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제르보나에게 다가갔다.

“딸기! 어서 도마뱀으로 변신하거라! 서둘러 자리를 피해야겠다!”

“따, 딸기요···?”

상당히 앙증맞은 별명에 제르보나는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느냐?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러나 고미 앞에서 차마 맘에 안 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닙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 별명입니다.”

“큭큭, 딸기라니. 아주 귀여운 별명이군. 천하의 제르보나가 말이야.”

제르날이 웃으며 자신을 놀려대자,

“넌 검둥이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지?”

제르보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뭐? 언제부터?”

“너 기절했을 때 고미님이 붙여준 별명이야. 당연히 너도 불만 같은 건 없겠지?”

“엣헴, 그 녀석은 더 이상 검둥이가 아니다.”

그때, 고미가 점잖은 목소리로 제르보나의 말을 끊었다.

“네?”

“수하가 알려주더구나. 검둥이는 나쁜 말이라고, 해서 이제부터는 너를 검은콩이라고 부를 예정이다.”

대체 그 말을 왜 그렇게 진지하게 하는 거냐.

검둥이나 검은콩이나 그게 그거잖아 사실.

듣는 용 입장도 생각을 좀 해주라고.

“가, 감사합니다.”

제르날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고마워하지 마. 지난번에는 호기롭게 고미 초코바까지 불태워놓고. 패기를 좀 보여달라고.

“자자, 얼른 가자. 기자들 몰려오겠다.”

한유진이 알틴을 안은 채 제르날의 등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제르보나, 가자.”

* * *

드래곤들의 등에 올라타 도착한 곳은 여고 근처의 소담한 분식집이었다.

생각해보니 학창 시절에 갔던 분식집들은 죄다 저렇게 작았지. 그때는 작다는 것도 몰랐는데.

요즘은 프렌차이즈 분식점이 많아졌지만, 역시 진짜 맛집은 학교 앞이나 작은 골목에 있는 저런 작은 분식집인 것 같다.

“흐음, 어째 크기가 너무 작은 것이 아니냐?”

고미가 미심쩍은 눈으로 ‘엄마네 분식’이라고 쓰여있는 간판을 바라보며 물었다.

“게다가 왠지 좋으면서도 무서운 느낌이 든다.”

음, 고미에게 ‘엄마’는 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걱정 마 고미, 분식집은 원래 작을수록 맛있는 거야.”

“좋다. 삼룡 어멈이 자신 있게 데리고 온 곳이니, 맛은 믿어도 되겠지. 지난번 그 디저트 카페라는 곳도 아주 흡족했으니 말이다.”

제르보나의 등에서 내린 고미가 나의 어깨 위에 폴짝 뛰어오르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유진의 뒤를 따라 ‘엄마네 분식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하교 시간이 되지 않아서인지, 분식집 안은 제법 한적했다.

“어머! 우리 공주님 오셨네! 이게 얼마 만이야?”

분식집 아주머니는 한유진을 보자마자 만면에 웃음을 띠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의외네. 이런 소박한 분식집 아주머니하고 친하게 지낼 줄이야.

“응, 우리 이모 보고 싶어서 왔지!”

호칭도 정겹군.

그런데, 왜 식당 사장님이나 종업원분들을 부르는 호칭은 ‘고모’가 아니라 ‘이모’일까? 뜬금없지만 궁금하다.

“어머, 제르보나랑 유찬이 말고도 새 손님이 있네? 이게 웬일이야?”

이모님의 반응을 보니, 드래곤들하고도 친한 모양이다.

이게 웬일이야? 라는 말은, 그동안 드래곤 외에는 그 누구하고도 함께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의미겠지.

삼룡 어멈이 얼마나 삭막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것도 잘생긴 총각이 둘이나! 어느 쪽이 우리 유진이 남자친구에요?”

이모님의 호들갑에 한유진은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너 헌터 되고 나서 남자들 데리고 여기 온 거 처음이잖아! 이거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아이, 이모도 참! 얼른 떡볶이나 줘요! 장사 안 할 거에요?!”

“그건 안되지! 기다려, 이모가 맛있게 해줄게.”

말을 마친 이모님은 불판에 떡볶이를 넣고 휘휘 젓기 시작했고, 이내 매콤하고도 달콤한 떡볶이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냄새만 맡아도 알겠다. 이 집 맛집이네.

[ 호오오······. 냄새가, 아주 훌륭하구나. ]

심지어 매운 냄새가 느껴지는데도 고미의 코가 벌써부터 반응을 보인다.

그렇게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이내 떡볶이와 튀김, 순대가 잔뜩 담긴 그릇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양이 좀······. 심하게 많은 것 같은데.

용 세 마리에 곰 하나, 사람이 셋.

머릿수가 좀 되기는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10인분은 될 것 같다.

“우리 유진이가 용들 말고 사람을 데리고 온 건 처음이라, 내가 너무 반가워서 서비스 많이 드렸으니까 맛있게 먹고 가요.”

이모님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한유진에 대한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고마워요 이모. 내가 책임지고 다 먹고 갈게요.”

말을 마친 한유진은 곧바로 꼬치를 들어 떡볶이 하나를 콕 찍더니, 그것을 고미에게 내밀었다.

“고미님, 얼른 드세요.”

[ 삼룡 어멈, 제법 예의를 아는구나. 이 몸이 아주 맛있게 먹어주겠다. ]

고미는 그렇게 말하며 앙증맞은 입을 왕, 하고 벌려 떡볶이를 집어삼켰다.

그리고는······.

[ 으으음······. ]

한참을 말없이 입을 오물거리며 그 맛을 음미했다.

“고미, 자, 이것도 먹어 봐.”

순대를 떡볶이 국물에 찍어 입에 넣어주자,

[ 호오, 이것은 또 새로운 방식이구나. ]

고미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낼름 집어삼켰다.

[ 괴, 굉장하구나. 이 떡볶이라는 음식은 양념의 역할도 하는 것이냐? ]

음, 듣고 보니 그렇군.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떡볶이 국물은 그 자체로 양념이기도 하구나.

마지막으로 이강혁이 떡볶이 국물에 찍은 튀김을 입에 넣어주었고, 고미는 천하제일의 진미를 맛보는 미식가처럼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한참이나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그 맛을 음미했다.

[ 으으음······. 실로 훌륭하다. 약간의 매운맛이 단맛과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구나. 내 수다르에게 단맵단맵의 오묘한 이치를 전해 듣고, 치킨이라는 음식을 통해 그 정수를 이미 깨달았다 생각했거늘, 단맵단맵의 묘리가 한 음식 안에 담길 수 있다니······. ]

이어서 고미는 스스로 떡을 한 번 집어먹고, 순대와 튀김을 번갈아 양념에 찍어 먹으며 폭풍 먹방을 시전했다.

이렇게 잘 먹는 건 처음 보네. 식전 운동을 거하게 해서 그런가.

고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확인한 이강혁은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정말 맛있군요. 분식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순대도 잡내가 전혀 없고, 튀김도 정말 바삭하고, 느끼한 맛이 하나도 없네요. 떡볶이도 완벽하고요.”

이강혁의 시식 평에 기분이 좋아진 한유진은 여고생처럼 신이 나서 자신의 ‘분식 탐방’ 썰을 늘어놓았다.

“그쵸? 티비에 나온 분식집들도 다 가보고, 서울 몇 대 떡볶이다 하는 곳들도 다 가봤는데, 여기보다 맛있는 곳이 없더라고요.”

[ 으음, 승부는 취소되었지만, 이 떡튀순과 붙었다면 허수아비 너의 패배로 끝났겠구나. ]

고미가 튀김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강혁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좋다. 이 몸이 오늘 아주 기분이 좋구나. 삼룡 어멈, 너에게 상을 주겠노라. ]

떡튀순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고미는 무려 '오징어 튀김'을 떡볶이 국물에 찍어 한유진에게 건네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오징어 튀김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다 준거나 다름없지.

고미의 묵직한 한방(?)에 한유진은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오징어 튀김을 베어물었다.

이걸로 비공식적이지만, 웅림픽의 승자는 정해진 건가.

“이건 사실상 제 패배군요.”

이강혁이 패배를 시인하자, 한유진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후후, 다행인 줄 아세요.”

그렇게 우리는 순식간에 10인분도 넘는 분식을 먹어 치웠고,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에는 배가 불러 움직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평소에 절대 과식을 하지 않는 나이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던전에 가서 운동을 하고 와서 그런 건지 뭔지는 몰라도, 정말이지, 끝내주는 한 끼였다.

[ 후훗, 정말 흡족하구나. 아주 좋은 식사였다. 다음에도 또 왔으면 좋겠구나. ]

테이블에서 내려온 고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음에도 또 오자니, 처음 듣는 말이다. 그렇게나 만족스러웠던 걸까?

“이모, 오늘도 잘 먹고 가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다음에 또 오고, 항상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친구분들도 우리 유진이 잘 부탁할게요. 아, 그리고 이건 서비스. 가면서 먹어요.”

이모님의 정겨운 인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떡꼬치 하나씩을 손에 든 채 아직 수업 중인 고등학교 특유의 조용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이제 일 얘기로 들어가 볼까요? 우선 가장 중요한 정보는, 노인국이 흑암의 지배자의 사도 후보라는 거예요.”

“네?”

이분은 항상 깜빡이가 없이 들어오는구나. 자기가 아는 정보를 공유하겠다고 말하더니, 이렇게 바로 치고 들어오나.

시원시원해서 좋긴 하네.

어찌 됐든, 노인국이 사도 후보라는 건,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도 후보가 되면 그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게 보통인데, 이런 것마저 히키코모리답게 처리하는 건가.

“제가 아는 정보와 일치하는군요. 그리고, 절대 손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노인국입니다.”

이강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왜죠?”

“이번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까지는 늘 인간이 아니라 이계의 존재들과 손을 잡는 걸 택했던 인간이니까요. 그리고 흑암의 지배자는 명백하게 인류의 멸망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씨, 이제 막 밥 먹고 나왔는데, 얹히겠네 얹히겠어.

조금 더 평화로운 분위기로 갈 수는 없는 거냐.

“이강혁 씨도 알고 있던 정보군요. 혹시, 초월자들이 동맹을 맺은 것도 알고 있나요?”

이어지는 한유진의 말에 나도, 이강혁도, 모두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때,

< 축하합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완료 되었습니다. >

< 축하합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완료 되었습니다. >

< 축하합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완료 되었습니다. >

연달아 세 개의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알틴과 함께 흡족한 표정으로 떡꼬치를 할짝 거리고 있는 고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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