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2 웅림픽 중단
마트에는 없고, 시장에는 있는 것.
바로 다양한 군것질거리다.
물론 마트에도 시식 코너가 있긴 하지만, 역시 시장에서 사 먹는 군것질거리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
떡볶이, 순대, 호떡, 옛날 통닭, 닭강정, 족발, 기타 등등······.
즉, 고미에게 있어 시장은 ‘보물섬’이나 마찬가지.
시장에 들어온 시점부터 냄새를 맡았을 테니, 진작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했을 거다.
두 번째 대결의 내용은, 바로 ‘간식 배틀’이었다.
룰은 간단했다.
고미가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간식을 대접한 사람이 승리.
이에 더해 첫 번째 대결에서 무승부가 나면 다음 메뉴로 넘어가는 방식을 취하기로 했다.
“두 분 다 자신감이 넘치네요.”
내가 슬쩍 옆구리를 찌르자,
“지난번에 저랑 디저트 먹어 보셨잖아요. 저 간식 마니아예요. 이런 건조한 아저씨랑은 내공부터가 다르다고요.”
한유진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자신의 강함(?)을 어필했다.
“그래도 시장이랑은 분야가 좀 다르지 않아요?”
“하, 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고생이었거든요? 여고생 하면 분식, 분식하면 시장. 아니에요?”
뭔가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듯 하면서도 꽤 설득력 있는 문장의 배열이군.
“글쎄요. 저는 간식에는 그다지 조예가 없지만, 곰 선생님을 알고 지낸 기간은 제가 더 깁니다. 게다가 처음 만난 날 이후로 줄곧 곰 선생님의 간식을 담당해 왔으니, 곰 선생님의 입맛은 제가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강혁 역시 지지 않고 간식 셔틀이자 원조 호구라는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자부심을 뽐냈다.
음, 이 자리에 정상인은 나뿐인가.
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겠군. 까딱하면 ‘고미와 얼간이들’ 같은 이름이 어울리는 한팀이 되겠어.
“흥, 우정이란 함께 한 시간과는 관계가 없다는 걸 증명해 드리죠.”
한유진이 입을 비죽이며 쏘아붙이자,
“투피스 보십니까?”
이강혁이 불의의 일격을 날렸다.
“흠, 흠. 다 큰 아저씨가 만화책도 봐요?”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왠지 한심한 대화인데, 이걸 유도한 사람이 나니까 할 말이 없군. 그래도 의외의 지점에서 공통 분모를 발견했으니, 소귀의 성과를 거뒀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강혁과 한유진이 투피스를 봤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두 사람 다 그런 것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이는 스타일인데.
[ 투피스가 무엇이냐? ]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음, 꽤 유명한 만화야. 다음에 같이 볼까? ]
생각해 보니, 고미에게는 영화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더 취향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우정, 노력, 승리라는 소년 만화의 3대 원칙도 왠지 고미 취향에 맞을 듯하고.
[ 만화는 무엇이냐? ]
문제는 고미가 만화를 모른다는 건데······.
웅림픽의 다음 종목으로 재미있는 만화 추천해주기 같은 걸 채택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고미도 좋아할 테고, 두 사람 다 투피스를 봤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만화를 주제로 하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친해질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나도 만화는 꽤 좋아한다.
대학원에 들어간 후로는 웹툰 볼 시간조차 없어서 내가 만화를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지만······.
잠잘 시간도 모자란데 취미가 남아있을 리가 없지.
[ 음, 그림이랑 소설이 결합한 거라고 해야 하나? ]
[ 제법 흥미롭구나. 알겠다, 조만간 함께 보자꾸나. ]
그렇게 고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이강혁이 자신의 추천 메뉴를 공개했다.
“제가 곰 선생님에게 추천하는 간식은 바로 꿀호떡입니다.”
시작부터 초강수. 하지만 제법 현명한 판단이다.
시장의 대표 간식이자, 단맛 중독자인 고미에게 딱 맞는 메뉴랄까.
뻔하지만 정석적이고, 그래서 더 강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꿀호떡!? ]
게다가 ‘꿀’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만으로도 고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유혹일 터.
“쳇, 뺏겼네.”
한유진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한유진도 첫 번째는 꿀호떡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선공권을 잡은 이상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지금 누구 약 올려요?”
이강혁의 정중한 사과에 더욱 약이 오른 듯, 한유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제가 조금 찾아봤는데, 마침 이 동네에 상당히 유명한 호떡집이 있더군요.”
이강혁이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뭐야, 설마 오늘 대결 내용 미리 알고 있었던 건 아니죠?”
한유진이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렇게 묻자, 이강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결과 무관하게, 저는 언제나 곰 선생님에게 맛있는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장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어떤 것을 사드릴지 고민하고 있었죠.”
오, 역시 원조 호구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저 모습을 보라.
실로 신종 호구에게 모범이 되는 호구계의 선배라고 할 수 있겠다.
[ 후후, 그렇지. 역시 너는 신의를 아는 녀석이구나 허수아비! ]
고미 역시 이강혁의 충정을 느꼈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허수아비, 스마트폰은 왜 자꾸 보는 것이냐? ]
“아, 길 찾기 기능을 이용하면 원하는 곳의 위치를 지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가르쳐 드리죠.”
[ 호오······. 이 녀석에게 그런 기능이 있단 말이냐? ]
고미가 자신의 ‘꿀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 길도 찾을 수 있고, 영화랑 만화도 볼 수 있어. 나중에 다 알려줄게. ]
애초에 스마트폰을 사줄 때부터 이런 걸 알려주려고 했던 건데, 그 후로 너무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이어져서 가르쳐 줄 틈이 없었다.
이제 좀 한가해졌으니 첨단기술의 달콤함을 알려줘야지.
[ 이 녀석이 생각보다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
고미는 놀랍다는 듯 귀를 쫑긋 세우며 자신의 꿀폰을 쓰다듬었다.
- 치이익
바로 그때, 기름 위에 반죽이 올라가는 아름다운 소리가 우리의 귀를 잡아끌었다.
호떡 가게 가까이 다가가자, 간만에 제 발로 걸어 다니던 고미가 폴짝폴짝 뛰며 도움을 청했다.
[ 수하, 이 몸도, 이 몸도 보고 싶다! 어서 이 몸을 올려다오! ]
호떡 가판대의 반도 미치지 못하는 키로 폴짝폴짝 뛰는 녀석의 귀여운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지어졌다.
녀석을 번쩍 들어 어깨 위에 올려주자,
[ 헤에······. ]
마침내 호떡을 만드는 것을 구경할 수 있게 된 고미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반죽을 펴고, 그 안에 설탕 소를 넣는 아주머니의 동작에서는 깊은 세월의 흔적과 내공이 느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건 틀림없이 맛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려한 달인의 움직임.
달덩이처럼 동그랗게 빚어진 반죽이 기름을 두른 철판 위로 몸을 던지는 순간,
“와아······.”
[ 괴, 굉장하구나······. ]
고미와 한유진의 입에서 나란히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고미의 목소리에서는 순수한 감탄과 기대가 묻어나는 반면, 한유진의 목소리에는 진한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역시, 호떡을 놓친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자신을 찾은 사람들을 위해 뜨거운 불판 위에 스스로 몸을 불사르는 반죽 위에, 아주머니의 누르개가 더해진다.
- 치이익······.
맛깔스러운 소리가 다시 한번 귀를 유혹하고, 누르개에 깔린 찹쌀 반죽은 그 무게를 오롯이 받아들이며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듯,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먹음직스러운 찹쌀 반죽이 기름과 열기를 머금고 노릇한 호떡으로 거듭나는 그 모습에 우리 넷은 약속이나 한 듯 군침을 집어삼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경쟁도, 고미의 환심을 사겠다는 목표도 잊고, 우리는 하나가 되어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불판 위에 스스로 몸을 굴린 찹쌀 반죽의 숭고한 희생이 만들어 준 유대일지도 모르겠다.
“씨앗 호떡 네 개요.”
경외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값을 치른 이강혁은 조심스럽게 나와 고미, 한유진에게 각각 하나씩 호떡을 나누어 주었다.
‘음, 분위기가 왜 이렇게 경건한 걸까.’ 하는 의문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 우웃!? ]
“음······.”
“와, 맛있네요.”
고미에 이어 이강혁, 한유진까지 나란히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 사람의 뒤를 이어 호떡을 한입 베어 물자, 따끈하고 바삭한 반죽 사이에 수줍게 숨어 있던 설탕물이 혀끝을 휘감으며 입안 가득 달콤한 맛이 퍼져나갔다.
중간중간 씹히는 견과류의 맛이 설탕의 단맛을 적당히 잡아주고, 씹는 맛을 더해준다.
‘이건 이강혁 씨가 이기겠는데?’
호떡을 반쯤 먹었을 때, 나는 이강혁의 승리를 확신했다.
고미가 좋아하는 단맛에, 완전히 새로운 음식이다.
거기에 고미가 흥미를 느낄만한 적당한 퍼포먼스까지.
한유진이 뭘 내놓든, 이미 판세는 이강혁에게 기울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고미의 시식평은 우리의 생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니,
[ 훌륭하구나. 적당히 바삭하고 기름기가 흐르는 반죽에 달콤한 맛까지······. 다만 두 가지 문제가 있느니라. ]
고미의 지적에 반쯤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이강혁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고, 한유진의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 우선, 이 몸은 순수한 단맛을 좋아한다. 반죽을 씹을 때 느껴지는 쫄깃함과 안에 든 갈색 설탕물의 단맛, 이 조합은 훌륭했으나, 사이에 들어 있는 것들이 단맛을 느끼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
아······.
그제야 나와 이강혁은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깨달았다.
우리처럼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단맛을 적당히 잡아주는 견과류가 들어가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고미 같은 단맛 중독자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맛을 해치는 요소로 작용했던 것이다.
[ 둘째, 이름에 문제가 있다. ]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 꿀호떡인데, 어째서 꿀이 아니라 설탕이 들어가는 것이냐? 이것은 이 몸을 기만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왜 꿀‘호’떡인 것이냐. ]
음, 설마 '호'자가 호랑이를 연상시켜서 기분이 나빠진 건가?
호떡의 호가 그 호는 아닐 텐데······.
[ 이리 맛있는 음식에 ‘호’ 자가 들어가다니, 조금 기분이 좋지 않구나. ]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고미의 기분이 상한 것은 사실이다.
나라면 한번 따져 보기라도 하겠지만, 고미가 죽으라면 죽으라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죽을 기세인 원조 호구가 저 말에 반박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과연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거봐라.
여하간,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강혁의 회심의 한 수는 생각보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한유진의 날카로운 반격이 이어졌다.
[ 삼룡 어멈, 너는 이 몸에게 어떤 음식을 맛보여 줄 것이냐? ]
“떡. 튀. 순. 입니다.”
떡! 튀! 순!
이것도 만만치 않군.
하지만 세트 메뉴를 내미는 건 반칙 아닌가?
“이봐요 한유진 씨, 메뉴는 한 번에 하나 아니었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강혁이 득달같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럼 당신도 씨앗 호떡, 단팥 호떡, 잡채 호떡 세 개 해요. 종류별로 파는구만 뭘.”
순 억지군.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럼 이강혁 씨는 분식집 가면 떡볶이만 먹어요?”
음, 여전히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왠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사실이야.
“아니면, 고미님에게 분식의 참맛을 알려주는 것보다 나한테 이기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건가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궤변, 그러나 이강혁은 그 말에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 그건······.”
“그래도 내 나름대로 양심 챙긴다고 오뎅은 뺀 거예요. 정 억울하면 떡, 튀, 순 다 먹고 이강혁 씨도 다른 메뉴 두 개 보태서 총점으로 승부를 보든지요.”
역시, 한유진. 괜히 저 나이에 4대 길드의 길드장 자리에 오른 게 아니다. 판단력이 보통이 아니야.
그렇게 한유진의 악랄한 계략(?)에 당한 이강혁이 손도 발도 써보지 못하고 분식집으로 끌려가려던 찰나, 고미가 우뚝 멈춰서며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 잠깐, 모두 멈추거라. ]
그렇게, 뜻밖의 사태에 의해 웅림픽 2차전이 중단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