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1 첫 번째 대결의 승자는
어제저녁.
“아들, 내일 고미랑 봉식이랑 같이 시장 갈까?”
“시장?”
“후훗, 장을 보러 간다 하였느냐?! 이 몸은 준비가 되어있다! 보아라!”
고미가 목에 두르고 있던 꿀 스카프를 활짝 펼쳐 커다란 망토로 바꾸며 외쳤다.
“어떠하냐? 짐이 얼마나 많든, 모두 이 안에 싸서 가지고 올 수 있다! 대단하지 않느냐!?”
“우리 고미는 어디서 그런 신기한 보따리를 가져 왔을까아?”
어머니가 맞장구를 쳐주자, 한껏 흥이 오른 고미는 꿀 스카프를 더욱 크게 만들며 신이 나서 자랑을 해댔다.
“후훗, 게다가 이 몸은 드리프트도 할 줄 아느니라! 내일 엄마에게도 이 몸의 드리프트 솜씨를 보여주마!”
뭔가 또 미묘하게 대화가 산으로 가는 것 같기는 한데, 원래 어린애의 대화법이라는 건 저런 거니까, 패스.
“시장은 왜?”
“응, 가게 열기 전에 그릇이나 이런저런 필요한 것들 좀 사야지.”
생각해 보니 고미와 놀아준 지도 좀 오래된 것 같군.
내일은 할 일도 없고 하니, 같이 시장이나 가볼까.
“알았어.”
“그런데 드리프트는 무슨 소리니?”
“아아, 아니야 그런 게 있어.”
나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답한 뒤, 고미에게 다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고미, 시장에는 카트가 없어.”
“뭐, 뭣이!? 어째서 카트가 없는 것이냐!”
한껏 들떠 있던 고미가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괜찮아. 대신 마트에는 없는 재밌는 게 많으니까.”
“저, 정말이냐?”
“그럼. 먹을 것도 많고, 재밌는 것도 많지.”
내 생각이지만, 고미에게는 마트보다 시장이 더 맞을 거다.
이 녀석은 깔끔하고 조용한 곳보다는 뭔가 복작거리는 곳을 좋아하니까. 마트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시장 같은 느낌이 나지는 않지.
“그럼 내일은 우리 고미가 엄마 장 보는 거 도와주는 거예요?”
엄마의 질문에 고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엄마는 이 몸만 믿거라!”
좋아, 평화롭군. 평화로워.
이후 어머니는 내일 사야 할 물품들의 목록을 길게 적어 내려갔고,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던 고미는 갑자기 깊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생각보다 살 것이 많구나······. ]
기공술로 나르면 안 되느냐? 하고 묻는 듯한 표정.
‘응, 당연히 안 되지.’ 하고 눈빛으로 답해주자,
“으음······.”
잠시 후, 한참을 고민하던 고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치며 입을 열었다.
“수하! 허수아비와 삼룡 어멈을 부르는 것은 어떻겠느냐!?”
“응?”
“두 사람에게 시합을 시키기로 하지 않았느냐? 엄마를 더 잘 도와주는 녀석에게 상을 주는 것이다!”
······.
음, 그러니까, 국내 최고의 헌터 둘을 데려다가 심부름꾼 겸 짐꾼을 시키겠다, 이런 얘기인가.
과연, 고미만이 할 수 있는 과감하고도 무차별적인 발상이군.
그렇게 고미의 아이디어로, ‘웅림픽’의 첫 번째 종목은 ‘장보기 대결’로 정해졌다.
* * *
└ 위대하신 고미님 : 오늘, 우리는 장을 볼 것이다.
└ 삼룡어멈 : 장이요? 시장할 때 그 장 맞죠?
└ 허수아비 : 알겠습니다.
└ 삼룡어멈 : 대체 대결 내용이 뭐죠?
└ 위대하신 고미님 : 자세한 것은 너희가 도착하면 알려줄 것이다. 참, 삼룡이들은 대결에 참여할 수 없느니라!
그렇게 고미답다면 고미다운, 참으로 일방적인 통보였지만, 한유진과 이강혁은 약속 시간이 되기도 전에 시장 입구에 도착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음, 둘이 진짜 사이 안 좋구나.’
생판 남처럼 어색하게 서 있는 모습에 나는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했다.
횡단보도에 행인 1, 2가 서 있어도 저렇게 보이지 않는 장막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않을 거다.
저건 헤어진 연인이 우연히 횡단보도에서 만났을 때, 인사를 하기도 뭐하고 안 하기도 뭐하고, 사실은 상대를 신경 쓰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딱 그런 모양새가 아닌가.
“시장에서 대체 무슨 대결을 펼치는 거죠?”
내가 보이자, 한유진이 잽싸게 달려와 질문을 던졌다.
많이 어색하셨구나.
“어머, 아들. 이 예쁜 아가씨는 누구야?”
옆에 있던 어머니가 환히 웃으며 질문을 던지자,
“앗, 수하 씨 어머니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는 한유진이라고 합니다.”
한유진은 양갓집 규수처럼 조신하게 인사를 했다.
‘음, 이 사람한테 이런 면도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들. 아빠는 언제나 네가 자랑스러웠다.”
미안해 아빠, 난 지금 아빠가 조금 창피해. 부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어줘.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곧바로 ‘웅림픽’의 첫 번째 대결, 장보기 대결의 룰을 설명해 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 뒀다가는 아버지 입에서 또 무슨 소리가 나올지 무섭거든. 빨리 시작해 버려야지.
“자, 첫 번째 라운드는 필요한 물건을 누가 더 정확하게, 싼 가격에, 빨리 사 오느냐 하는 거예요.”
설명을 들은 한유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네? 그게 무슨 대결이에요?”
반면 이강혁은 질문 한마디 없이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리스트를 작성할 준비를 마쳤다.
“고미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할 수 없죠. 제가 말했잖아요. 대결 방식이랑 날짜, 횟수는 고미가 정할 거라고.”
[ 그렇다! 이 몸이 정한 대결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다니! 삼룡 어멈, 설마 위대한 이 몸이 준비한 상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이냐?! ]
나의 말에 이어 고미가 전음으로 불호령을 내리자, 한유진도 더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얌전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상이 뭐예요?”
그 와중에 상품을 궁금해하다니, 가만 보면 이 사람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뭐, 나름대로 다 준비된 게 있죠. 기왕 대결을 하는 거면 상품도 있고, 벌칙도 있고, 뭐 그런 게 좋지 않겠어요?”
“좋아요. 의욕이 생기네요. 그럼 빨리 불러줘요.”
한유진의 두 눈은 이미 승부욕으로 불타고 있었고,
“곰 선생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니, 그게 무엇이든 양보하고 싶지 않군요.”
이강혁의 얼굴에는 굉장히 구체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설마, 부메랑 같은 거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거 아무 효과 없다니까, 내가 써야 의미가 있다고요, 내가 써야.
“자, 그럼 부릅니다. 전부 샘플로 하나씩만 사 오면 됩니다. 초장병, 간장병, 초장 간장 담을 그릇, 집게, 가위······.”
목록에 쓰여있는 물품들은 대체로 부모님이 직접 고르지 않아도 큰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냄비나 그릇처럼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직접 골라야 하니까.
그렇게 장보기 리스트에 적힌 물품들을 모두 발표한 뒤에는 두 사람의 지갑과 카드, 현금을 모두 수거하고, 만 원짜리 다섯 장을 지급했다.
공정하게 잔돈이 얼마 남았나 체크하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으니까. 손맛(?)도 있고.
“자, 그럼 시작.”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은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잰걸음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우리 아들이 능력이 좋아. 훌륭해, 대단해, 자랑스러워. 저런 예쁜 처자도 막 불러다가 심부름 시키고.”
한유진이 사라지자, 아버지는 흐뭇한 얼굴로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고,
“주책 그만 떨고 얼른 와요!”
언제나처럼 어머니의 핀잔이 이어졌다.
이후 고미와 나는 느긋하게 시장 입구에서 두 사람을 기다렸고, 부모님과 봉식이는 직접 골라야 할 물품을 사러 갔다.
[ 후후후, 참으로 즐겁구나. 시장이라는 곳에 들어갈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폴짝폴짝 뛰는구나. 한데, 정말 이걸로 괜찮겠느냐? ]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시장 안쪽을 둘러보던 고미가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겠지.
[ 저 두 사람이 왜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아? ]
[ 으음, 서로 이 몸의 애정을 독차지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더냐? ]
잠시 고민하던 고미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왜 고미에게 이런 질문을 했을까.
그래, 이건 내 잘못이다.
[ 음, 그래. 일단 나만 믿어. 고미 너는 그냥 재미있게 놀면 돼. ]
[ 호오,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좋다, 그럼 그 일은 너에게 맡기고 이 몸은 이 시장이라는 곳을 만끽하겠노라! 우선 엄마 아빠가 이 몸에게 내린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뒤에 말이다! ]
그 와중에 자기 노는 것보다 엄마 아빠를 돕는 게 우선이라니, 어디서 이렇게 귀엽고 착한 녀석이 떨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뭐, 실제로 심부름을 하고 있는 건 이강혁과 한유진이라는 건 차치하고 말이지.'
어찌 됐든, 나는 나름대로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일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진솔한 대화나 거래가 아니라, 가벼운 ‘접촉’이라는, 이론과 실습에 기반한 확신.
서로를 못 믿는 상태에서 진솔한 대화가 가능할 리가 없고, 이해관계가 걸린 거래는 불신을 더욱 키울 뿐이다.
이럴 때는 시답잖은 대결과 놀이로 최소한의 친밀감을 쌓는 게 우선이다.
천천히, 서서히,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사소한 대화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쌓인 친밀감은, 결국 신뢰로 가는 다리가 되어준다.
서두를 것도 없고, 서두른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물론 평상시라면 4대 길드의 두 수장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한가롭게 노는 건 꿈도 못 꾸지.’
하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고미’가 끼어있다.
물리적으로도, 귀여움으로도, 가히 슈퍼 먼치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촉매지.
일단은 이렇게 물꼬를 트고, 천천히 뜸을 들이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준비한 ‘결정타’를 날려 마무리를 하면 된다.
그렇게 고미와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검은색 비닐봉지를 든 이강혁과 준비해 온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온 한유진이 열심히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가 이렇게 빨라. 게다가 장바구니는 언제 챙겨 온 거야. 쓸데없이 준비성이 너무 좋아.’
먼저 도착한 것은 이강혁이었다.
“일단 도착 시간은 이강혁 씨가 빠르네요.”
나의 말에 약간 늦게 도착한 한유진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그래도 내가 더 싸게 잘 사 왔을 걸요?”
“저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는 두 사람이 내민 잔돈 꾸러미를 받아 잔돈을 헤아려 보았다.
그런데, 한유진이 이강혁보다 이상할 정도로 돈이 많이 남았다.
“한유진 씨, 전부 다 사온 거 맞아요?”
물품을 확인해 보니, 두 사람 모두 필요한 것을 빠짐없이 사 왔다.
그런데 한유진이 만 원 이상 더 남았으니,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혹시 아까 돈 꿍쳐놓은 거 아니에요?”
“저 현금 안 들고 왔어요. 속임수 같은 것도 안 썼고요. 사람을 뭐로 보고.”
표정을 살펴보니, 거짓말이 아니다.
‘그럼 대체 왜 이렇게 많이 남은 거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유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장님들이 예쁘고 젊은 처자가 밝고 싹싹하기까지 하다고, 싼 물건은 그냥 공짜로 주던데요?”
······.
그런 이유였냐······. 생각도 못한 변수네.
이런 외모지상주의의 수혜자 같으니.
“하아, 저도 좀 꾸미고 올 걸 그랬군요.”
이강혁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야, 당신도 꾸미면 공짜로 물건 받을 정도로 잘 생겼다는 소리?
그러자, 한유진이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안 꾸미고 왔어요. 본판의 힘이죠. 본판의 힘.”
음, 이 여자도 공주병이 심하군.
갑자기 두 사람에게 고미와 ‘비슷한 파장’이 느껴진다.
뭐 아무렴 어때, 조금이라도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으니, ‘장보기 대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치자.
[ 어찌 되었든, 첫 번째 대결은 무승부인 것 같구나. 둘 모두 훌륭하게 심부름을 마쳤지만, 허수아비가 빨랐고, 네가 더 저렴하게 사왔으니 말이다. ]
고미의 명판결(?)에 삼룡··· 아니, 한유진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말도 안돼······.”
4대 길드의 수장이, 심부름 대결 같은 걸로 이렇게 좌절하다니······.
오늘 참 보기 드문 구경을 하는군.
[ 후후, 걱정 말거라. 진짜 승부는 지금부터다. 이것은 몸풀기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
말을 마친 고미는 내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탐험가처럼 기대와 흥분이 가득한 발걸음으로 시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엄마 아빠 돕기는 무사히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놀아볼 심산에 벌써부터 신이 난 모양이다.
잠시 후, 고미가 짜리몽땅한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뱅글뱅글 돌려대며 '웅림픽'의 두 번째 종목을 발표하자,
“뭐야, 낙승이네요.”
“이건 저도 자신이 있습니다.”
두 사람 승리를 확신하는 표정으로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고 있는 고미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