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0 삼룡어멈VS허수아비
“무슨 제안이요?”
한유진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표정만 봐도 이강혁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간다.
‘뭐,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
이강혁의 표현을 빌자면, 한유진은 ‘독자 노선’을 걷는 사람이다.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는다.
아니, 누구도 믿지 않으니까 누구와도 손을 잡지 않는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려나.
어찌 보면, 참으로 합리적인 결정이다.
스스로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있고, 믿을 사람은 적으니, 굳이 누군가와 손을 잡아 뒤통수를 맞을 리스크를 만들 이유가 없다.
문제는 앞으로 닥쳐올 재앙이 그녀 혼자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 그건 사도가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고미가 이미 이강혁을 친구로 인정한 마당에, 두 사람이 계속 껄끄럽게 지내서야 마음 놓고 놀지도 못할 거다.
괜한 오해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서 눈치 보고 싶지도 않고.
“동맹 제안이라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뻔한 제안이라면 말도 안 꺼냈을 거다.
“내기를 해보죠.”
“내기요?”
내기라는 말에 한유진은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뭘 걸고요?”
“음······. 저랑 고미를 세트로 영입할 수 있는 기회?”
“그거 흥미롭네요.”
성공. 일단 테이블에는 앉혔네.
“그래서, 승리 조건은요?”
“별거 아니에요. 고미가 마음에 들어 하는 쪽이 승리. 제가 심판이면 못 믿으실 것 같아서.”
“뭐로 승부를 낼 건데요?”
“글쎄요. 구체적인 건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단, 직접적인 싸움은 제외. 가능하면 생산적이고, 고미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거로 하죠. 재미있는 곳 데려가기, 맛있는 요리 해주기, 던전 돌기, 게이트 파괴하기, 뭐든지요.”
“꽤 재미있는 내기네요. 그런데, 이강혁이 하려고 하겠어요?”
한유진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자신 있겠지.
테이머스의 수장으로 지내면서 ‘집사 레벨’도 꽤 올랐을 테니까.
“뭐, 안 한다고 하면 한유진 씨가 이긴 거로 하죠.”
“승부 횟수나 방식은요?”
“글쎄요, 그건 이강혁 씨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정하죠.”
“좀 수상한데요. 제가 이 제안을 거절하면요?”
“저희는 저스티스로 갑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한유진 씨하고 만날 일은 줄어들겠죠. 동이님 하고는 대화로 잘 풀어보세요.”
그렇게 딱 잘라 말하자,
“김수하 씨, 은근히 얄미운 스타일이네요. 그래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에요. 콜.”
음, 얄미운가······. 그래도 면전에 대놓고 그렇게 말하다니, 조금 상처군. 나도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라고.
어쨌든, 이것도 예상대로다. 동이의 사도인데, 고미를 잘 모시라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게다가 이 대결에서 이기면 고미를 확실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제르보나나 유찬이, 알틴을 동원해도 되는 거죠?”
“종목에 따라 다르겠죠. 그것도 나중에 정하죠. 최대한 형평성에 맞게요.”
나는 그렇게 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전음으로 장작을 좀 넣어줬다.
[ 아, 이건 비밀인데요. 참고로 고미는 이강혁 씨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요. 한유진 씨는 아직이고요. ]
그리고는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유진을 뒤로한 채 고미와 함께 대문을 나섰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 수하, 허수아비와 삼룡 어멈을 친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느냐? ]
고미가 동이에게 받은 꿀 색 스카프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 응, 그렇지. ]
[ 그런데 저렇게 하면 둘이 친해지기는커녕 싸움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
고미의 지적은 일견 타당했다.
호감은 없고, 불신만 가득한 둘을 다짜고짜 붙여 놓는다고 친해질 리가 없지.
물론 이강혁이 회귀자라는 걸 밝히고, 그가 본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것도 제법 그럴싸한 방법이다.
보다 정확히는 ‘그럴싸해 보이기만 하는’ 방법이지.
하지만 지금 이강혁은 태양초 열매 하나 구워달라고 하는 것도 부탁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의심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고 말한들 달라질 게 없다. 진실을 말한다 해도 한유진은 나처럼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확인할 능력이 없으니까.
게다가 진정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한시적 이익공동체 정도를 유지하는 게 고작일 거다.
그런 얄팍한 관계는 진짜 위기가 왔을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모처럼 생긴 고미의 친구들끼리 그런 사이로 지내는 걸 보고 싶지도 않고.
[ 걱정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두 사람 다 좋은 사람이잖아. 약간 오해가 있을 뿐이지. 이럴 때는 억지로 화해를 시키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나아. ]
[ 흐음······. 뭐,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이런 쪽으로는 제법 쓸만하니 말이다. ]
음, 이렇게까지 믿어주니 좀 부담스럽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그럼 고미의 새 친구들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게 힘 좀 내볼까?
* * *
집으로 돌아가자, 봉식이와 부모님에 더해 이강혁이 고미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이강혁 씨?”
“허수아비!”
고미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이강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하하······. 어머니께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하셔서요.”
“아니 혼자 산다고, 저녁은 매일 대충 때우거나 밖에서 사 먹는다잖니. 힘든 일 하는 사람이 밥이라도 잘 먹어야지. 몸 상해요.”
음, 마침 잘 됐네. 얘기할 것도 있었는데.
“젊을 때 그러고 다니면 몸 상해요. 가게 오픈하면, 한 번씩 들러서 저녁도 먹고 가고 그래요. 아니면, 한 번씩 우리집 와서 밥 먹고 가도 좋고.”
“감사합니다.”
음, 어머니의 전용 스킬 ‘밥 먹이기’가 발동한 건가.
전에도 말했다시피, 어머니는 잔정이 많다.
봉식이도 매일 혼자 밥 먹는 게 안쓰럽다고 자꾸 불러서 밥 먹이다가 사실상 입양(?)이 된 거고.
아마 가게 관련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잡담으로 빠졌을 거고, 그러다 보니 정들고, 그랬겠지. 너무 익숙해서 이 저녁 식사가 어떻게 성사됐을지 안 봐도 눈에 그려진다.
“흠! 좋다! 이 몸이 특별히 허락할 테니, 너도 엄마의 요리를 맛보거라!”
고미가 화장실로 쪼르륵 달려가며 외쳤다.
“아 참, 밥을 먹기 전에는 늘 손발을 씻어야 한다! 너도 어서 씻거라!”
“알겠습니다, 곰 선생님.”
손발을 씻으라고 명령을 하는 고미도 고미지만, 또 그걸 제꺽 따라가는 이강혁도 참······.
“약속대로 손발을 깨끗이 씻었느니라! 오늘 이 몸이 맛볼 음식은 무엇이냐!”
금세 손발을 씻고 돌아온 고미가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외쳤다.
“우리 고미가 매운 것도 잘 먹는 것 같아서 김치찌개를 만들어 봤지!”
어머니가 커다란 냄비에 가득 담긴 찌개를 내려놓자, 고미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후훗, 이 몸은 이미 간파했다! 김치볶음밥과 비슷한 음식이구나!”
음, 뭐 비슷하긴 하지만······. 아니지, 그게 비슷한 건가?
김치가 들어갔다는 점에서는 대충 비슷하다고 퉁 치자.
“정말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이강혁은 머쓱하게 웃음을 지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스읍, 하아.”
바로 그때, 상당히 익숙한 사운드가 귓가에 들려왔다.
‘역시, 맵구나.’
김치볶음밥에는 설탕도 넣고, 치즈도 들어갔으니 그렇다 쳐도, 김치찌개에 그런 걸 넣을 수는 없으니까.
설탕이라는 눈속임이 통하지 않는, 매운맛과의 정면승부.
사실 김치찌개가 그리 매운 음식은 아니지만, 고미의 입맛을 고려하면, 제법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머, 우리 고미한테는 너무 맵니? 어떻게 하지?”
어머니의 반응에 고미는 절대 아니라는 듯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이래야 고미지.
“흥! 절대 아니다! 조금 더 맵게 만들어도 스읍, 좋았을 것, 이다!”
언제나처럼 허세를 부리지만, 눈은 물잔에 고정되어 있다.
뭐냐 이거,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 한다’의 예시 같은 건가.
“자, 이거 먹어 봐 고미.”
콧물을 훌쩍이며 매운 것을 참고 있는 고미를 위해, 나는 식탁에 있던 계란말이 하나를 녀석의 밥공기 위에 올려주었다.
“우웅? 이것은 무엇이냐? 빛깔이······. 제법 마음에 드는구나.”
“계란말이라는 거야.”
“호오······.”
새로운 메뉴를 접한 고미는 흥미롭다는 듯 계란말이를 들어 이리저리 훑어보고는, 조심스럽게 한입을 베어 물었다.
“이것도 제법 맛이 훌륭하구나!”
심사(?)를 마친 고미는 잽싸게 계란말이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며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나고, 나는 고미와 이강혁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편한대로 하시죠. 그 문제에 대해서는 수하 씨에게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강혁은 너무나도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조금은 화를 내거나 서운해할 법도 한데,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아주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전력을 생각하면 수하 씨와 곰 선생님이 용왕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멸망하는 걸 막으려면 용왕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으니까요.”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기는 하지만, 너무 쿨하니까 괜히 미안해지네.
“걱정 마세요. 전 용왕으로 갈 마음 없으니까. 약속은 지켜야죠.”
나의 말에 이강혁은 빙긋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보다, 한유진이 초월자의 사도라니······. 여태까지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군요.”
“지난번 회차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나요?”
“네, 아마 곰 선생님이 세상에 나오면서 무언가가 크게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내 생각도 이강혁과 같았다.
고미의 등장은 우리 가족과 봉식이, 이강혁의 미래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일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아주 중대한 사건이 분명했다.
“후훗, 위대한 이 몸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느니라!”
정말로 자신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고 있는지 아는 것 같지는 않지만, 고미 역시 우리의 생각에 동의를 표했다.
“어쨌든, 용왕과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 협조 부탁드릴게요.”
“저는 그저 곰 선생님과 수하 씨를 믿고 갈 뿐입니다.”
으음, 너무 믿어주니 좀 부담스럽네.
“그렇게 쉽게 믿어도 되는 거예요?”
농담 반 진담 반 던진 질문에, 이강혁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글쎄요, 근거 없는 믿음은 아닙니다. 사실 제가 곰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자칫 원수가 될 뻔 했던 봉식이와 이렇게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수하씨 덕분이니까요.”
“그렇다! 수하 네가 아니었다면 나도 허수아비가 이런 좋은 녀석이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두 사람의 칭찬에 왠지 모르게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특급 화해 요원’같은 별명이 붙어야 할 것 같은 평가군.
“그거야 고미도 착하고, 이강혁 씨도 좋은 사람이니까요.”
“한유진 씨는요?”
“음······.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럼 걱정 없겠군요. 이 일에 대해서는 편한 대로 진행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대화를 마친 이강혁은 언제나 그랬듯 홀연히 사라졌다.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 허수아비 님이 들어왔습니다.
└ 삼룡어멈 님이 들어왔습니다.
└ 위대하신 고미님 : 엣헴, 위대한 이 몸이시다! 그럼 너희에게 첫 번째 임무를 내리겠노라.
단톡방을 통해 숲속 친구들의 화합과 평화의 장이 되어줄 ‘웅림픽’의 첫 번째 종목이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