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9 속이야 아무도 모르는거지
< 초월자의 강력한 마력이 깃듭니다. >
< 새로운 스킬이 추가됩니다. >
< 용신의 가호 (S) >
- 드래곤은 강력한 정신력과 마력을 타고났으며, 용신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입니다. 용신의 가호를 받은 자는 S급 이하의 모든 정신 계열 스킬을 무효화 할 수 있습니다.
S급 스킬!? 이런 걸 선물로 그냥 준다고?
덩치만 큰 게 아니라 통도 크시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동이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부디 요긴하게 쓰시기를.“
말을 마친 동이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더니, 손가락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자,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웅, 하지만 이 몸은 너와 조금 더 놀고 싶다······. 이리 오랜만에 만났거늘, 벌써 헤어지는 것이냐?”
잔뜩 풀이 죽은 고미의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하하, 너무 서운해 마시지요. 각성을 했다고는 하나, 평범한 인간들이 이곳에 오래 머물러 좋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조만간 유진을 통해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다음에는 이 몸이 맛있는 것을 잔뜩 들고 올 테니 기대하고 있거라!”
알틴의 뒤를 따라 이공간을 벗어나는 동안, 고미는 몇 번이나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았다.
* * *
한유진의 집으로 돌아오자, 시스템 창에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 축하합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 보상이 지급됩니다. >
- 약점 간파 D->C
- 호랑이와는 다르다 E->D
- 개보다 낫다 C->B
- 살곰살곰 E->D
······.
전 스킬 등급 향상이라니, 늘 그렇지만, 퀘스트 난이도에 비해 보상이 지나치게 후하다.
동네 편의점으로 심부름 한번 갔다왔더니 백만 원짜리 수표를 쥐여주는 느낌이랄까.
심지어 방금 얻은 용신의 가호는 S급에서 SS급으로 향상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정신 계열 스킬에 당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기쁨보다 큰 것은 ‘의아함’이었다.
흐름으로 보아, 시스템은 분명히 고미가 만나려 하는 것이 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설마 동이가 나에게 이런 스킬을 주리라는 것도 알았을까?’
단순히 ‘편애’라고 말하기에는 도를 지나친 애정, 치맛바람이 허리케인 수준이다.
그리고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은 일련의 퀘스트와 보상들······.
대체 시스템은 뭘 원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한유진의 저택을 뒤덮고 있던 흑곰 덫도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한두 시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초월자의 이공간은 인간계와는 시간의 흐름이 다릅니다. 그곳에 오래 머무르셨다면 이미 며칠이 지난 상태였을 것입니다.”
제르보나가 공손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음, 그래서 그곳에 오래 머무르면 좋을 게 없다고 한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려보니, 반인반룡 상태로 석고대죄를 하는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분은 또 왜 저러고 있대, 부담스럽게······.
“응? 검둥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이냐? 생각보다 더 허약한 녀석이구나.”
이유찬을 발견한 고미가 수제 초콜릿 하나를 입안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음, 참교육이 제대로 효과를 본 모양이군.
“주제넘게 고미님의 권능을 시험하려 한 점, 이 몸의 뿔을 꺾어 사죄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유찬은 말릴 새도 없이 자신의 오른쪽 뿔을 꺾어 부러뜨렸다.
“으, 으아아! 왜 이러세요!”
“으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르보나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고,
“죄송해요. 매번 뭔가 잘 해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성질이 저래 놔서. 그래도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니까 용서해 주세요.”
한유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이유찬의 편을 들어주었다.
“흥, 그래도 나름대로 기개가 있는 녀석이구나.”
고미는 그대로 이유찬을 지나쳐 바닥에 쌓여있는 디저트 언덕으로 총총 걸음을 옮겼다.
“용서해 주실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음, 열혈 캐릭터였군.
김춘식을 날려버리는 거 보고 성깔 좀 있으신 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시끄럽다. 네 녀석의 브레스는 전기 장판만도 못 했느니라. 용서고 뭐고 할 것도 없으니 그만 일어나거라.”
음, 그래도 전기장판하고 비교하는 건 좀······. 우리 애가 은근히 허세가 있군.
“감사합니다!”
고미의 한마디에 이유찬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오른쪽 이마에서는 푸른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의 뿔에는 용족의 마력이 깃들어있으니,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사용해 주십시오.”
이유찬이 흘러내리는 피를 닦지도 않고 내 손에 뿔을 쥐여주며 말했다.
‘으으, 뭐 하는 짓이야 무섭게.’
물론 드래곤의 뿔이 엄청나게 비싼 아이템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서 자해 쇼를 펼치면서 그 결과물을 손에 턱 쥐여주는데, ‘와, 돈이다. 돈! 아이템이다!’ 하면서 받을 수 있겠냐고.
“혹시 아직 화가 덜 풀리신 것입니까?”
자신의 뿔을 손에 든 채 어찌할 줄 몰라 하자, 이유찬은 다른 뿔마저 바치겠다는 기세로 반인반룡의 형상으로 변했다.
“아, 아니에요! 화 다 풀렸어요!”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언젠가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중세의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진지한 말투로 맹세까지.
으으, 일단 뿔은 챙겨야겠다. 계속 떨떠름한 표정으로 들고 있다간 나머지 뿔까지 잘라 줄 것 같아.
한편, 어느새 친해진 고미와 알틴은 정원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산만하다, 산만해. 이 집안, 원래 분위기가 이런 건가.
삐이이- 삐이이잇-
알틴이 금색 날개를 열심히 파닥여 달아나자,
“이리 오너라!”
고미가 폴짝 뛰어올라 알틴을 덥석 붙잡고는 신나게 바닥을 뒹굴었다.
그 평화로운 광경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지만 웃는 것도 잠시,
파직!
- 삐이이잇!
알틴의 몸에서 시퍼런 전광(電光)이 터져 나와 그대로 고미의 몸을 지져버렸다.
“헉!”
“으아아! 고미 괜찮아!?”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고미에게 달려갔지만,
“오오오옷!”
정작 번개에 맞은 고미는 즐겁다는 듯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오오! 동이의 마력을 이어받은 아이라더니, 벌써 제법 쓸만한 번개를 뿜을 줄 아는구나!”
-삐이잇!
온몸의 털이 빳빳하게 곤두선 고미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해주자,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알틴이 고미의 주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괴, 굉장하다.
이 엄청나고 소소하면서도 살벌한 듯 귀여운 놀이방식은 대체 뭐지······.
“휴, 놀래라. 그래도 알틴이 저희 말고 누굴 저렇게 따르는 건 처음 보네요.”
한유진이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저도 고미가 드래곤하고 놀아주는 장면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요. 그런데, 알틴은 동이님의 자식인 건가요?”
“아뇨, 설명하기는 조금 어려운데······. 마일로스트님의 마력에서 생겨난 생명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 동이님의 원래 이름이 마일로스트 인가요?”
“드래곤식 이름으로는 훨씬 길어요. 뭐라고 발음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제르보나도, 유찬이도, 본래 자기 이름은 엄청 긴데, 그냥 인간들이 부르기 쉬운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일종의 가명이죠.”
고미와 동이의 친분 덕에 한유진과 나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긴장감도 어느새 눈 녹듯 사라진 상태였다.
“뭐, 제르날 정도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인간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다면서 굳이 한국식 이름까지 만든 거예요. 제르날이라는 이름도 드래곤같다나 뭐라나, 어쨌든, 요리도 하고, 쇼핑도 하고, 최대한 인간처럼 지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죠. 노력은.”
한유진은 ‘노력은’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음, 왠지 저 사람 마음이 이해가 간다.
저 성격으로 인간 사회에 얼마나 잘 녹아드실지 조금 걱정이 되긴 하는군.
“의외네요. 전 제르보나 씨가 더 인간에게 관심이나 애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애정이 있어야 하는 문제는 아닙니다. 저에게 이 일은 긍지와 양심의 문제니까요. 진정한 강자는 약자를 짓밟지 않는 법. 인간들도 고양이나 개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을 죽이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제르보나의 논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물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는 게, 꼭 애정의 문제는 아니니까.
역시, 이쪽이 인간에 대한 이해는 훨씬 높아 보인다.
적응력도 높고, 교양도 있어 보이고.
“저 얼간이는 뭐든지 부딪혀보지 않으면 안 되는 체질이라, 주군께서 왜 인간을 지키려고 하는지 이해해 보겠다면서 저러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런 걸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제르보나는 그렇게 덧붙인 뒤 커피를 끓이겠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스카우트 문제는 어떻게 생각해요?”
한유진이 디저트 언덕에서 초콜릿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게 아직도 유효한 거예요?”
“마일로스트님과 고미··· 님이 동맹이면, 김수하 씨도 우리 길드에 들어오는 게 편하지 않겠어요? 그때 그 덩치 씨와 검술 능력자도 세트로 들어오면 더 좋고요. 둘 다 상당히 쓸만해 보이던데.”
“어······.”
난감하군. 이걸 어떻게 답해야 하나.
“설마, 이미 다른 길드에 가입했다던가, 그런 건 아니죠?”
네, 죄송합니다. 그렇습니다.
“뭐야, 진짜로? 그 사이에? 어딘데요?”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한유진은 황당하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스티스요.”
“저스티스? 잠깐, 그날 그 칼잡이, 설마 이강혁이에요?”
음, 이걸 내 맘대로 밝혀도 되는 건가 싶지만, 이미 걸린 것 같군.
“와, 황당해. 이강혁 실력은 왜 그렇게 늘었어요? 그거 고미님이 도와준 거죠? 맞죠?”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질문 공세.
“나한테는 가짜 상태창까지 보여주면서 거짓말해놓고, 이강혁이랑은 벌써 같은 편이에요?”
따지고 보면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거짓말하고 태양초 구워간 일을 떠올리니 양심에 찔리기도 하고······.
“그 인간 회귀자라고 의심받는 건 알고 있어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 줄 알고 그런 인간하고 어울린대? 내가 가서 위약금 다 물어줄 테니까 우리 길드로 와요.”
항상 느끼는 거지만, 왜 이렇게 저돌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걸까 이분은.
“제가 보기에는 이강혁 씨도 한유진 씨랑 비슷한 입장인 것 같은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나의 대답에 한유진은 더욱 흥분하며 도끼눈을 떴다.
“그 인간이랑 저랑 어떻게 입장이 같아요?”
“아니 뭐, 회귀자라고 다 나쁜 건 아니죠.”
“그렇다, 허수아비는 신의를 아는 녀석이다!”
타이밍 좋게 고미가 끼어들자, 한유진의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으음, 고미님이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사실 수상해 보이는 건 한유진 씨도 마찬가지죠. 처음부터 고미 찾아서 사도 되려고 테이머스 만든 거 아니에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테이머스는 진짜로 힐링을 위해 만든 거라고요! 물론 고미님을 찾겠다는 의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목적은 저의 힐링이라고요!”
가볍게 떠본 말에 한유진은 발끈하며 성을 냈다.
“그렇죠. 이강혁 씨도 좋은 뜻으로 그러는 건데, 옆에서 보면 꿍꿍이가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거죠.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는 사실 본인만 알잖아요.”
“유진, 이건 수하님이 이긴 것 같은데.”
제르보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넌, 내 편 들어줄 생각은 안 하고!”
“누구 편을 들어준다고 나아질 건 없지. 네가 합리적인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논쟁에서 이기고 싶은 것뿐이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 수도 있지만.”
날카로운 일침에 한유진은 입만 비죽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타이밍 왔네.
“그래서, 제가 좋은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한 번 들어보실래요?”
이제 약을 팔……. 아니, 설득을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