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8 (금)동이의 선물
지금 내 머릿속에는 고미와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이 울먹이며 했던 말이 자동재생되고 있었다.
「흑, 동이 놈 말이 맞았다! 원하는 걸 먼저 들어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 ‘동이’가 사람도 아니고, 몬스터도 아니고, 초월자였다고······?
“고미님!”
“동이이이이!”
쾅!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고미가 동이에게 달려들자, 산처럼 거대한 거구가 뒤로 벌렁 넘어갔다.
쿵······.
텅 빈 우주 공간에 거대한 파문이 일며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묵직한 소리가 퍼져나갔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재회군.
“동이!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신이 난 고미가 금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초월자의 거체 위를 어린아이처럼 뛰어다니며 외쳤다.
‘그런데······. 저 동이라는 분이 진짜 드래곤들의 수장 맞나?’
아무리 봐도 ‘동이’ 같은 구수한 호칭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와 크기.
동이의 몸은 산이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로 거대했으나, 날개는 너무 작아 꼭 거목에 붙은 나뭇잎처럼 보였다.
커다란 몸뚱이에 비해 뒷다리도 앞다리도 너무 짧았고, 한쪽 앞다리는 마른 고목처럼 마르고 흉하게 뒤틀려 있었다.
게다가 몸 곳곳에 황금색 비늘 대신 검버섯이 핀 살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외모만 놓고 보자면, 그냥 정체 모를 괴수 n번 정도지, 드래곤이라고 보기는 조금 어려웠다.
물론, 외모가 중요한 건 아니다.
고미가 좋아하고, 나쁜 사람 아니면 됐지.
다만, 내가 생각한 초월자나 드래곤의 군주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외모라 조금 놀랐을 뿐이다.
“후후후! 동이! 보거라! 이 몸에게도 드디어 가족이 생겼느니라! 이 몸의 수하이자, 가족이자, 제자인! 수하다!”
초월자의 몸 위에서 뛰놀던 고미가 번개처럼 날아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음, 수하인 수하라니, 라임은 좋은데 어감이 좀······.
“드디어 가족을 만나신 것입니까?”
얌전히 드러누워 고미와 놀아주던 동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를 내려다보았다.
동이의 얼굴 반쪽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고, 왼쪽 눈동자는 눈부신 금빛을, 오른쪽 눈동자는 피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꼭 부러졌다가 새로 자라난 것처럼 작은 두 개의 뿔이었다.
‘몸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싸우다 다친 건가······.’
“싸우다 다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태어났을 때부터 이런 흉측한 몰골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지요.”
동이가 웃으며 말했다.
설마,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가?
“이 비루한 몸뚱이에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능력이자, 저주입니다.”
말을 마친 동이의 몸집이 빠르게 줄어들더니, 이내 제르보나와 비슷한 크기로 변했다.
“역시 대화를 나누려면 이 정도 크기가 적당하겠지요. 다른 이를 만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만 결례를 범했습니다.”
배려가 넘치는 분이네.
“아, 안녕하세요. 김수하입니다.”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고미가 쪼르르 달려와 어깨에 올라탔다.
“후후, 동이, 어떠하냐? 비실비실하지만, 마음은 아주 따뜻한 녀석이다!”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고미의 모습에 동이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고미 님의 눈에 비실비실하지 않은 존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긴, 위대한 이 몸이 보기에는 모두 비실비실하지! 그래도 못 본 새에 제법 듬직하게 자랐구나!”
듬직, 듬직이라······.
저 정도 사이즈는 되야 듬직한 거구나.
미안, 난 평생 듬직해지지는 못할 것 같다.
“모두 고미님 덕분이지요.”
“저기 그런데, 고미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나의 질문에 동이는 추억에 잠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시다시피, 제 몸은 날 때부터 이리 추악한 꼴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종족이라고 믿는 동족들에게, 저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였지요.”
말하자면, 태어날 때부터 거부당한 존재라는 얘기인가.
거기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상처가 많으시겠네.
동이는 천천히,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분노도, 억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이미 옛적에 뛰어넘었다는 듯, 한없이 평온한 태도였다.
드래곤 로드에 버금가는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기형의 드래곤.
그는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었고, 덕분에 몇 번이나 동족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했다고 말했다.
“결국 저를 죽이려던 동족 중 몇을 살해하게 되었고, 다른 차원으로 달아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고미님을 만났지요.”
“후후! 이 몸이 동이를 쫓아오던 못된 도마뱀 놈들을 혼내주었지!”
고미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동이도 드래곤 아니야?”
나의 질문에 고미는 눈을 부릅뜨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동이는, 도마뱀이지만 신의를 아는 녀석이었다! 다른 악랄한 도마뱀들과는 다르단 말이다!”
오, 드래곤이라고 다 미워하지는 않는 건가······.
우리 애가 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드는군.
“게다가 생긴 것이 다르다고 친구를 괴롭히다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놈들이 아니냐!”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고미의 솜털이 바늘처럼 곤두섰다.
하긴, 늘 혼자였던 고미에게 친구를 괴롭히는 것보다 나쁜 건 없겠지.
“그렇게 저는 목숨을 건졌고, 한동안 고미님의 곁에 머물렀지요.”
“우웅······. 하지만 왜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냐?”
고미가 서운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의 추격대가 계속 저를 쫓는 것을 알면서도 고미 님의 곁에 머무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말 한마디 정도는 해주고 떠날 수 있지 않았느냐······. 나는 네가 죽은 줄만 알고 있었느니라.”
“때마침 대균열 근처에 몸을 숨길만한 곳으로 가는 게이트가 열려, 인사도 없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동이의 목소리에는 고미를 향한 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사실 너무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가 상당히 돈독하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냥 차원과 종족을 뛰어넘은 우정, 정도로 정리하자.
하지만 동이의 해명에도 고미는 여전히 서운함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러자, 동이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저의 마력이 담긴 멋진 선물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서, 선물 말이냐? 대웅전보다도 더 굉장한 것이냐?”
선물이라는 말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고미의 귀가 다시 바짝 섰다.
아니, 그보다, 대웅전이 동이가 만들어 준 거였어?
'도움을 줬다'는 대상이 동이였고?
“후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는 동이의 멘트에 괜히 나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웅전보다 굉장한 거라니, 대체 뭘까?’
말을 마친 동이는 어린아이에게 깜짝 선물을 주는 아버지처럼 잠시 뜸을 들였고,
“자, 보십시오!”
텅 빈 허공에 ‘꿀색’ 망토 하나가 솟아났다.
음? 이게 뭐지?
“오오오오! 동이! 과연! 굉장하구나!”
하지만 나와는 달리 고미는 엄청난 보물을 발견한 듯 손뼉을 쳐대며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댔다.
‘그렇게 좋은 물건인가?’
고미 기준에서는 ‘회귀자의 회중시계’조차 ‘제법 귀한 물건’ 수준이다. 그런데 노란 망토 하나에 이렇게 흥분하다니······.
겉보기와는 달리 엄청난 기능이 숨겨져 있는 걸까?
“이 망토는 저의 역작입니다. 마력이 충전되면 대부분의 마법을 완벽히 막아낼 수 있고, 물리적인 공격에 대해서도 드래곤 스케일과 맞먹는 수준의 방어력을 자랑하지요!”
확실히 굉장하긴 한데, 고미에게 저런 게 필요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브레스를 맨몸으로 뚫고, 드래곤 스케일이고 나발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는 핵꿀밤을 꽂아넣는 게 고미니까.
“게다가 수십 미터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까지, 자유자재로 크기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오오! 굉장하구나! 이 물건이 있다면 엄마도, 아빠도, 모두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생각지도 못한 아이템의 용도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처음부터 제 몸이 아니라 가족들을 지킬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좋아했던 거구나.
“고미님께서는 늘 가족과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지요. 해서 언젠가 고미님에게 소중한 분들이 생겼을 때를 대비해 만든 물건입니다.”
동이 역시 그걸 알고 만든 물건이었고.
“자, 그럼 고미 님. 한번 착용해 보시지요. 고미 님이 마력을 충전해두면, 언제, 어느 곳에서든 정해진 사람에게 망토를 보내 보호할 수 있습니다.”
동이가 고목처럼 뒤틀린 손을 가볍게 움직이자, 황금색 망토가 고미를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패션쇼.
“어떠하냐!?”
망토를 두른 고미가 가볍게 몸을 돌리자, 녀석의 키보다 두 배는 컸던 망토가 자동으로 딱 맞게 줄어들었다.
완벽하다. 슈퍼 히어로는 역시 망토지.
“후훗, 이것은 어떠하냐!?”
다음으로 고미는 망토를 보자기처럼 만들어 머리에 뒤집어썼다.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배웠을까.
이후 녀석은 황금색 망토를 이리저리 대보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수하!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위대한 이 몸에게 가장 어울리느냐!?”
고미의 질문에 나는 말없이 황금색 망토를 스카프처럼 녀석의 목에 둘러주었다.
팔에 차면 완장 같아서 조금 그렇고, 망토로 두르면 돌아다니다 어디에 걸리기 쉬우니, 역시 목에다 해주는 게 최고다. 먹다가 흘리면 닦기도 좋고.
이걸로 내 머리에 초코바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일도 조금은 줄어들겠군.
크게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위생상태가 안 좋아 보일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귀엽잖아. 그게 중요한 거지.
그렇게 선물 증정식(?)이 끝나자, 동이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유진, 이제 약속대로 너를 나의 사도로 삼겠다.”
“감사합니다, 심연을 기는 자여.”
자, 잠깐.
심연을 기는 자!?
“도, 동이님이 심연을 기는 자였어요?”
“일단은 그런 이명을 쓰고 있습니다. 실은 고미님이 지어주신 금동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들지만 말입니다.”
심연을 기는 자는 황금의 군주와 더불어 마법사들이 가장 계약하고 싶어하는 초월자였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인간과 접촉조차 하지 않아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신비한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남몰래 초월자와 계약을 하고 있었던 건가······.’
이강혁도 그렇고, 한유진도 그렇고, 고미 앞에서나 호구지, 괜히 4대 길드의 수장 자리를 맡은 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강혁은 회귀자에, 한유진은 사도 후보.
다들 숨겨둔 패 하나씩은 가지고 사는구나.
그렇게 내가 신종 호구의 잔머리에 감탄하고 있을 때, 동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명심하거라. 나의 사도는 곧 고미님의 종복. 나는 아직 인간계로 넘어갈 수 없으니, 네가 대신 고미님을 모시거라. 고미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순간 사도 자격은 물론이고 내가 내린 모든 능력을 박탈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음, 동이도, 한유진도, 고미를 대할 때하고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는구나.
생각해 보니 이강혁도 그렇지.
'나만 고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건가?'
갑자기 내가 이상한 사람 같다. 난 지극히 멀쩡하고, 평범한데.
‘동맹 얘기는 할 필요도 없겠네.’
둘 사이가 이렇게 좋으니 황금의 군주가 고미를 건드리는 순간 동이가 나설 거고, 동이를 건드리는 순간 고미가 날아가서 달달한 꿀주먹을 날려주겠지.
그렇게 혼자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고 있을 때, 돌연 동이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먼 길을 오셨으니, 수하님에게 도움이 될만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고미님의 좋은 가족이 되어 주십시오.”
선물? 저 망토보다 더 굉장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