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7 재회
제르보나의 긴 설명이 이어지는 내내 고미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계속해서 디저트를 탐했다.
마치 ‘그건 네 사정이고, 나는 맛있는 게 더 중요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철저한 무반응.
이강혁 때와는 사뭇 다른 그 태도에, 드래곤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강혁 씨 때는 얘기라도 들어줬는데, 이건 뭐······.’
그렇게 한쪽은 말하고, 한쪽은 먹기만 하는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기를 수 분, 마침내 고미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겠다.”
“하문하십시오.”
“저 아이는 무엇이냐?”
고미의 손가락은 골드 드래곤, 알틴을 향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꼬마 용한테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었지.
대체 그 익숙한 기운이 뭐지?
“제 주군의 마력을 이어받은 아이입니다.”
제르보나가 우아하고도 예의 바른 말투로 답했다.
“그자의 이름이 무엇이냐?”
고미의 질문에 제르보나는 생전 처음 듣는 이상한 언어로 답했다.
아마도 드래곤의 언어인 것 같았다.
설마, 고미는 드래곤어(語)도 할 줄 아는 건가?
가끔 영어 단어를 말하는 것도 신기한데,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곰이라니, 굉장하군.
아니지, 날다라미 하고도 말이 통했으니까, 몬스터나 동물들하고는 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건가?
“흐음······.”
하지만 고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녀석이 드래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녀석의 표정은······.
이태원에서 마주친 국적 불명의 외국인이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는 말로 손짓, 발짓을 해가며 무언가를 물어볼 때 사람들이 보이는 표정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무슨 소리세요?’ 혹은 ‘저 외국어 못해요.’를 얼굴로 하면 딱 저 표정이겠군.
“그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드래곤 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았는지, 고미는 그 ‘위대한 존재’를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음, 나랑 지내면서 이상한 쪽으로만 지능이 향상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부디 저희와 힘을 합쳐 황금의 군주를 물리쳐 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제르보나의 입에서 ‘황금의 군주’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봐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황금의 군주’는 ‘악몽의 지배자’와는 달리 나도 이름을 알 정도로 유명한 초월자의 이명이었다.
하지만 황금의 군주는 인간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며, 초월자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직 그의 사도로 선택된 자는 없지만, 후보만 해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쟁쟁한 S급의 마법사들인 데다가, ‘흑암의 왕’이나, ‘백색 화원의 주인’과 계약한 사람들처럼 돌+I 기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말 그대로입니다.”
“아니, 황금의 군주는 인간을 수호하는 쪽이잖아요.”
나의 질문에 제르보나의 한쪽 입꼬리가 뒤틀렸다.
“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후보도 많이 두고 있고, 강력한 권능을 내려주는 데다가 아이템도 가장 많이 주고······.”
“수하님, 죄송하지만, 지금 인간계에 관여하고 있는 초월자 중 진정으로 인간들을 수호하려 하는 초월자는 저희의 주군뿐입니다.”
“그럼 왜······.”
“저마다 목적은 다르지만, 진정으로 인간들의 운명에 관심이 있는 초월자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이곳은 재미있는 실험을 할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유희의 대상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쓸만한 노예의 공급처에 불과할 뿐입니다.”
순간 제르보나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었다. 관심이 없는 것 치고는 인간이 몬스터를 물리치는데 너무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제르보나는 계속해서 제 할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황금의 군주가 인간에게 권능을 내리는 것은, 그저 인간계를 독차지하기 위해 적대자들의 하수인을 쓸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당신 말을 어떻게 믿죠? 그리고 당신도 드래곤인데, 인류의 존망에······.”
“됐다.”
그때, 고미가 손을 들어 나와 제르보나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모든 것은 이 몸이 직접 네 주군이라는 자를 만나 확인하면 그만이다. 네 말이 거짓이라면, 너와 너의 주군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친 고미는 열심히 눈앞에 쌓여있는 작은 디저트 언덕에서 자신의 입맛에 가장 맞는 몇 가지를 골라 들었다.
“안내하거라. 너의 주군이 있는 곳으로.”
초월자를 만나러 가는데 마치 피크닉이라도 가는 듯한 이 태도.
블랙 드래곤을 한방에 기절시키고, 초월자의 빙의체를 직접 손도 대지 않고 쓰러뜨리는 실력을 내 두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다면, 허풍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나 떨고 있니? 이대로 초월자 만나러 가도 되는거야?
마음 같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든지, 목숨을 걸고 함께 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다.
그런 위험한 곳에 고미를 혼자 보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가는 게 정말 도움이 되는 걸까?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닐까?
지금 내 실력으로는 초월자는커녕 드래곤 한 마리도 못 잡는데.
내가 힘이 없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조금 화가 났다.
< 새로운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
그 순간, 시스템 창이 새로운 퀘스트를 보내왔다.
< 고미와 함께 >
- 위대한 곰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함께해준다면, 더욱 용기를 가지고 모든 일에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 달성 조건 >
1. 고미와 함께 미지의 존재를 만날 것.
< 달성 보상 >
전 스킬 등급 상승 (+1)
이 타이밍에?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황당한 끼어들기.
게다가 보상은 여태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데, 그냥 만나기만 하면 완료라니, 난이도에 비해 달성 조건이 너무 심플하다.
수상한 점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네. 퀘스트는 전부 고미의 성장과 관련된 게 아니었나?’
지금까지 해왔던 퀘스트는, 사실상 ‘애 보기’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퀘스트는, 아무리 봐도 그런 것과는 무관해 보였다.
‘아직도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는 건가?’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세운 가설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설을 수정하든 말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로 시스템이 고미를 편애한다는 사실이었다.
‘같이 가라고 하는 건가?’
이 정도면 ‘가도 좋다’ 수준이 아니라 ‘꼭 가라’에 가깝지.
대체 왜 이렇게 나를 같이 보내려고 하는 걸까?
내가 안 가면, 고미도 가지 않을까 봐?
아니면, 내가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고미, 꼭 가야겠어?”
“그렇다. 그자를 꼭 만나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구나.”
고미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는 순간,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을 느꼈다.
틀림없다. 이건, 고미에게 아주 의미가 있는 만남이다.
그리고 시스템은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다.
“그럼, 같이 가자.”
내 답에 고미는 잠시 말없이 눈을 깜빡이다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보자꾸나.”
고미가 자신을 바라보자, 제르보나가 몸을 일으켜 알틴의 뒷다리를 붙잡았다.
“알틴, 게이트를 열어줘.”
제르보나의 말이 떨어지자, 알틴이 힘차게 날개를 퍼덕이며 자그마한 입을 쩍 벌리고 날카로운 울음을 내뱉었다.
-삐이이이! 삐이! 삐이이!
으음, 상당히 귀여운 방식으로 게이트를 여는군.
알틴의 울음소리는 기이한 파형으로 변했고, 그 파형이 한곳으로 집중되며 텅 빈 허공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꿀 주먹에 취해 잠을 자고 있는 블랙 드래곤을 버려둔 채 그 공간 안으로 발을 들였다.
* * *
“으, 으악!”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금 내 눈앞에는 위도, 아래도, 좌우도 없는, 그저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 덩어리와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이 무한히 펼쳐져 있었다.
텅 빈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감각, 하지만 소리를 지른 것이 민망할 정도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뭐야, 왜 바닥이 없는데 떨어지질 않아.’
고개를 돌려보니 알틴과 제르보나, 한유진이 모두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심지어 고미마저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알틴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알틴 뿐이니까요. 절대로 저희와 멀리 떨어지지 마십시오.”
제르보나가 애써 담담한 척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삐이!
알틴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우리를 한번 돌아보며 싱긋 웃음을 짓고는 자그마한 금색 날개를 열심히 파닥여 앞으로 나아갔다.
[ 고미, 이런 곳, 와본 적 있어? ]
[ 뭐, 초월자의 영역에 오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다만 이런 곳은 위대한 이 몸도 처음이구나. ]
그렇게 꼬마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5분 정도를 걸어갔을 무렵,
“그런데, 정말 신기하네요. 상태창을 조작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한유진이 지루하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없이 텅 빈 우주 공간을 계속해서 걸어가자니, 적잖이 심심한 모양이었다.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환술? 저 용안(龍眼) 스킬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거 안 통하는데.”
“아, 그거, 고미가 만들어 준 가짜 상태창이에요.”
“상태창을 만들 수 있다고요?”
한유진이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되물었다.
“네, 저도 될 거라고 생각은 안 했는데, 되더라고요.”
“후후후, 그것은 환술 따위의 유치한 눈속임이 아니다. 게다가 위대한 이 몸의 권능을 도마뱀의 눈 따위로 꿰뚫어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열심히 초코 머핀을 오물거리던 고미가 한껏 우쭐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먼저 말을 하는 걸 보니, 조금은 기분이 풀린 모양이네.
“정말 신기하네요.”
그렇게 우주로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긴장감 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어느 순간,
[ 응!? ]
돌연 고미가 귀를 쫑긋 세운 채 코를 벌름거리며 쉴 새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 고미? 왜 그래? ]
[ 이, 익숙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
고미의 반응에, 나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초월자를 만나러 온 것이 잘못된 선택이 아님을 확신했다.
지금 고미의 눈빛에는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온 사람들처럼, 그리움과 기대가 가득했으니까.
쿠르릉-
쿠르릉-
대체 누가 고미를 찾는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거대한 산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르보나 씨, 설마 저게 그 당신들의 주군인가요?”
나의 질문에 제르보나는 경외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드래곤이 아닌 것 같은데······.’
“고미님!”
이어서 지축을 뒤흔드는 거대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고, 고미가 통통한 궁둥이를 열심히 흔들며 화살처럼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동이!!!”
고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진한 그리움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