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3 식탁에 강림한 공포의 군주
김치란 무엇인가.
한국인의 혼, 그 자체다.
그렇다면 김치볶음밥이란 무엇인가.
자취생에게 있어, 그것은 구원이다.
요리할 시간은 없고, 돈은 더더욱 없는데, 라면은 더이상 먹을 수가 없고, 배달 음식을 시키자니 손발이 덜덜 떨리고 오금이 저릴 때.
한 줄기 광명처럼 자취생의 생존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식사를 보장해주는, 신이 내린 음식.
어디 그뿐인가.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베이컨과 햄, 치즈, 파, 날치알 등을 첨가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훌륭한 요리가 된다.
심지어 라면보다는 복잡하지만, 손과 혀만 제대로 달려있다면 어지간해서는 실패하지 않는 간단한 조리법까지 갖추고 있으니, 신이 대학원생을 가엾게 여겨 만든 음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치이익-
식용유를 붓고, 베이컨과 다진 파를 넣자, 식욕을 자극하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파 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굶주린 위장이 구원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오옷! 수하! 제법 쓸만한 냄새가 나는구나.”
그 간절한 목소리가 닿았는지, 고미의 귀가 쫑긋 서고, 꼬리가 진자운동을 시작했다.
평소라면 여기서 바로 김치를 투하하겠지만, 고미의 입맛을 생각한다면 설탕을 붓는 것이 최적의 판단.
혹시 자취생이 나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있다면, 그리고 김치가 너무 익었다면, 설탕을 넣는 것도 나쁜 선택이 아님을 기억해라.
고춧가루를 적당히 털어 넣고, 다음으로는 날치알.
“으응? 수하, 제법 본격적이구나. 그렇게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것이냐?”
날치알을 본 고미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응.”
“호오······.”
온갖 재료들이 뒤섞여 익어가는 냄새에 고미의 콧구멍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입안에 넣지 않아도 코와 눈으로 음식의 맛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법.
특히 고미의 후각이라면 먹어보기도 전에 실패한 요리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지.
다음으로는 재료들을 한쪽으로 몰아준 뒤 간장을 살짝 부어준다.
볶고 있는 재료에 간장을 들이부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재료를 치우고 간장이 끓게 하는 것이 핵심.
새하얀 쌀밥이 먹기 좋게 익어가는 재료들 위로 쏟아지는 순간,
“음, 수하 씨 요리를 꽤 잘하시네요.”
줄곧 조용히 앉아있던 이강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프라이팬을 들여다본다.
‘이 정도를 요리라고 생각하다니······. 어지간히 직접 만들어 먹는 일이 없나 보네.’
고미에 이어 이강혁까지 군침을 흘리니, 대강 초월자의 빙의체를 쓰러뜨린 값은 하는 김치볶음밥이라 할 수 있겠다. 아니, 과장 조금 보태 인류를 구원한 음식이라고도 할 수 있지.
이제 불을 줄이는 동시에 밥을 잘 모아주고, 계란 물을 부어준다.
마지막으로 치즈를 뿌려준 뒤 뚜껑을 덮자, 치즈가 녹아내리며 고소한 향기가 집안 가득 퍼져나갔다.
“흐으음······. 수하! 굉장하다! 솔직히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이제 보니 너도 아빠 못지않게 훌륭한 요리사였구나!”
치즈가 녹아내린 것을 확인하고 뚜껑을 여는 순간, 먼저 집에 들어와 샤워를 마친 봉식이가 울끈불끈한 근육을 뽐내며 입맛을 다셨다.
“이야, 냄새 죽이네. 빨리 먹자.”
고미에 봉식이까지, 식탐 대장이 둘이나 있다는 걸 간과했군. 좀 더 많이 만들 걸 그랬다.
“잠깐만 기다려.”
나는 잽싸게 김치볶음밥을 그릇에 담아낸 뒤 곧바로 사이드로 곁들일 ‘스팜’을 잘라 프라이팬에 투하했다.
김치볶음밥에는 역시 스팜이지.
노릇하게 익은 스팜을 정성스레 그릇에 담아내기 무섭게 전투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오오, 수하!”
역시나 첫 숟갈은 우리의 슈퍼 먼치킨, 고미의 몫이었다.
쭉쭉 늘어나는 치즈의 모습에 고미의 영롱한 두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실로 굉장하구나! 이것이 그 치즈라는 마법의 식재료가 틀림없으렷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감한 한입.
“으, 으음······.”
우리 셋은 약속이나 한 듯 숨을 죽인 채 고미의 시식평(?)을 기다렸다.
“이것은······.”
고미의 꼬리가 작은 원운동을 반복하고, 숟가락을 든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으음······.”
불안하다. 불안해. 어째서 맛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거냐.
긴장과 불안함 속에 다시 이어지는 한입.
그리고 또다시 한입.
‘이상하다, 맛이 없으면 맛이 없다고 말을 할 텐데, 왜 말없이 먹기만 하지?’
그 순간, 머릿속에 불현듯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설마, 일부러?
네 번째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는 고미의 눈동자가 은근슬쩍 좌우로 움직이며 봉식이와 이강혁의 눈치를 살핀다.
어색하게 이어지는 다섯 번째 숟가락질.
그제야 우리는 깨달았다.
틀림없다. 혼자 먹으려는 거야.
“곰 선생님?”
이강혁이 숟가락을 들자, 녀석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고미, 설마 다 같이 싸워놓고 혼자 먹으려는 건 아니지?”
나의 질문에 고미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맞네, 그런 거.
“흐, 흐흠. 그럴 리가 있느냐! 이 몸은 욕심쟁이가 아니다! 너희들도 어서 먹거라!”
고미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봉식이의 과감한 숟가락질이 이어졌고, 이강혁 씨도 평소의 점잖은 모습은 어디 갔나 싶을 정도로 상당히 적극적인 먹방을 펼쳤다.
대충 맛있어하는 건 알겠는데, 시식평이 없으니 뭔가 아쉽다.
“고미, 그래도 시식평은 해줘야지.”
하지만 고미는 바삐 숟가락을 놀리며 나의 요청을 거절했다.
“에잇, 빔도 쏘지 못하는 녀석이! 양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니냐!”
“뭐!?”
“봉식이 덩치를 보거라! 이렇게 큰놈이 끼어있는데, 양이 너무 적지 않느냐!”
결국 세 사람의 기세에 눌린 나는 한술도 뜨지 못하고 다시 가스레인지에 불을 지펴야 했다.
‘아니, 그냥 김치볶음밥에 뭐 이렇게 전투적으로 달려들어 무섭게······.’
그래도 잘 먹으니 기분은 좋네.
나야 뭐 천천히 먹으면 되지.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기 위해 시식평까지 생략하는 고미의 모습에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걸신이 들린 듯 먹어대는 저 모습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대학원생 시절에 죽지 않기 위해 배운 요리가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네 사람은 밥통을 깨끗이 비우고 말았다.
그렇게 격렬한 싸움이 끝난 뒤 폭풍 같은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절로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으······. 먹고 나니 졸리네.”
봉식이가 만족스러운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떼자,
“이 몸도 졸음이 쏟아지는구나.”
고미도 졸린 듯 눈을 부벼댔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참, 수하 씨, 내일은 부모님 가게 위치라도 보러 오시죠.”
어느새 평소처럼 점잖은 모습으로 돌아온 이강혁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과 안도감이 가득했다.
줄곧 그를 불안에 떨게 했던 초월자와의 전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기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겠지.
“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봉식이와 고미는 이강혁이 집을 나서기 무섭게 배를 긁적이며 꿀잠에 빠져들었고,
└ 아빠, 내일은 일 구하러 나가지 마. 아는 분이 일자리 알아봐 주셨으니까, 거기 가 보자. 나랑 애들은 피곤하니까 먼저 잘게.
나도 아버지에게 깨톡 메시지를 남긴 후 잠자리에 들었다.
* * *
눈을 뜨니 집안 가득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가득했다.
요 며칠 부모님은 계속 일자리를 구하러 다닌다며 아침에 나가 밤늦게 들어왔고, 나와 봉식이, 고미도 저마다 바빴던 탓에 퍽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자리였다.
“아들, 어제 그 얘기는 뭐야?”
아버지가 된장찌개에 밥을 비비며 물었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한동안 어두웠던 얼굴에도 간만에 화색이 돌았다.
“응, 내가 아는 분이 건물을 몇 개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가게 자리가 난다고 하셔서. 장사해 볼 생각 없냐고 하길래.”
“아들이 그런 사람도 알아?”
아버지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아들, 혹시 헌터 뭐 그런 거 아니지?”
어머니가 평소답지 않게 조금 굳은 표정으로 식탁에 앉으며 물었다.
역시, 어머니는 나와 봉식이가 헌터 일을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다.
하긴, 제 자식이 목숨 걸고 돈 번다는데 돈 많이 번다고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겠냐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계획이 있으니, 일단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게 우선이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세수를 마친 고미와 봉식이가 식탁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호오, 아빠는 무엇을 하는 것이냐?”
고미가 된장찌개에 밥을 비비는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아, 이것은 비빈다는 것이다.”
대체 저런 말투는 어디서 보고 배우신 걸까.
“그렇게 먹으면 더욱 맛있는 것이냐?”
“아아, 간단히 비비는 것만으로도 맛이 올라가지, 얼핏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위대한 발견이랄까?”
“아빠, 이상한 말투 쓰지 마.”
“호오, 이것이 비빈다는 것이냐?”
그새 이상한 것을 배운 고미는 아빠의 말투를 어설프게 따라 하며 된장찌개 국물을 밥에 비볐다.
“으음!? 어째서 이런 맛이 나는 것이냐?”
비빔(?)의 마법을 체험한 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자,
“후훗, 놀라운가? 그것이 한식의 위대함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또 이상한 말투로 대꾸를 했다.
“진짜 이 양반이! 아침부터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말고 빨리 밥이나 먹어요!”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어머니의 일침으로 상황 종료.
‘평화롭군. 좋네, 좋아.’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은 가짜 빙의체와의 전투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딱, 뉴스가 나오기 전까지만.
> 어젯밤, 패왕 길드의 건물 아래에서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 전문가에 따르면 이 몬스터는 게이트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거대한 폭풍에서 마력을 공급받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이어서 그림자에 뒤덮인 김춘식과 복면을 쓴 ‘익숙한’ 히어로 셋이 화면 위에 나타났다.
“오, 멋있다. 나도 각성만 했으면 저렇게 멋진 용사가 됐을 텐데 말이야. 역시 남자의 로망은 슈퍼 히어로지.”
나와 봉식이와 고미가 서로 눈치만 살피며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반면 어머니는 말 한마디 없이 유심히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쫄린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담배라도 피우다 걸리면 이런 기분일까.
‘야, 우리 잣나무 씨앗 된 거 같은데? 이제 곧 그게 무럭무럭 자라날 거 같은 분위기야. 아주 잣이 풍년이 되겠어.’
‘아니지, 나쁜 일을 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쫄리냐.’
‘어머니가 이거 알면 우리 집에 가둬두는 거 아니야?’
그렇게 봉식이와 내가 말없이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마침내 우리 집의 진정한 지배자, 초월자를 능가하는 '공포의 군주'가 입을 열었다.
“아들. 저기 웃통 벗고 다니는 사람이 어째 아주 눈에 익다?”
“네? 어머니, 저렇게 무서운 사람도 아세요?”
“그리고 저기 이상한 거 던지는 분은 누구랑 아주 판박이네?”
식탁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고미는 쉴 새 없이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빈 그릇을 숟가락으로 딱딱 긁어대고 있었다.
“우리 고미는 어디 숨어있었니?”
그리고 공포의 군주는, 참으로 영악하게도, 우리 중에 가장 거짓말을 못하는 순수한 영혼을 심문의 대상으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