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2 히어로는 복면이지
‘자, 잠깐 갑자기 급발진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잽싸게 어깨에 올라탄 고미의 통통한 두 다리를 덥석 붙잡았다.
“고미, 안 돼!”
“하지만 이 몸은 지금 배가 고프다! 저 비실비실한 놈들에게 맡겼다가는 그 김치볶음밥이라는 것을 빨리 먹지 못한단 말이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고미가 육성으로 벌컥 성을 내자,
“확실히 지금 이 상태로는 어렵습니다. 저자들은 빙의체를 상대하는 법을 모르니까요.”
이강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동의를 표했다.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 두 마리에 국내 최고 헌터 두 명을 두고 비실비실이라니······. 그리고 ‘빨리’ 먹지 못 한다는 건, 먹을 수는 있다는 소리잖아.
“저게 대체 뭔데요?”
“초월자의 가짜 빙의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시적으로 사도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지만······. 결국 그 힘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붕괴하고 말죠.”
이강혁이 허리춤에 찬 장검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럼 시간만 끌면······.”
“붕괴하는 데 몇 시간은 걸린다는 것이 문제란 말이다!”
고미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초코바 하나를 꺼내물며 말했다.
“네가 나서지 않고 처리할 방법은 없는 거야?”
나의 질문에 고미는 초코바를 씹어 삼키며 생각에 잠겨있다가 우리 셋을 훑어보았다.
“가능은 하다. 이 몸이 힘을 빌려주면 말이지.”
“할게. 죽는 것도 아니잖아.”
「어째서 벌써!」
이강혁의 그 한마디가, 나의 등을 떠밀었다.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 회귀자조차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매번 고미에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걸림돌로 남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제 막 먹는 것과 자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된 고미에게 하루라도 더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게 해주고 싶었다.
맛있는 디저트를 먹고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오고, 햇볕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다가, 맛있는 저녁과 곧 돌아올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그런 일상을.
‘하지만 지금 나선다면 그런 일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지.’
“좋다. 그럼 이제부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나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고미가 초코바를 한입 더 깨물며 말했다.
눈앞의 괴물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여유로운 그 태도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응.”
“곰 선생님의 명이라면 지옥 불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걱정 마.”
우리 셋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답을 내놓자, 고미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후후, 기분이 좋구나! 이렇게 힘을 모아 악당 퇴치라니!”
함께 놀아줄 친구가 생긴 기분이라도 드는 걸까.
고미는 언제나 혼자였고, 혼자 하는 술래잡기는 재미가 없으니까.
자, 그럼 이제부터 조금 격렬한 술래잡기를 시작해볼까?
일단 얼굴을 가릴 게 좀 있으면 좋겠는데······.
우리 셋이 얼굴 다 드러내고 움직이면 결국 고미 정체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때, 복면의 재료로 쓰기에 딱 좋은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크기도 큼지막하고, 두께도 적당하고, 색상도 시커먼 것이······.
“야, 민봉식. 옷 벗어.”
갑작스러운 요구에 봉식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봤다.
“왜 이래, 미쳤어?”
“야, 우리 셋이 얼굴 다 까고 나가면, 고미를 숨기는 게 의미가 있겠냐?"
“근데 왜 하필 내 옷이야. 이거 나름 아끼는 거라고.”
“난 흰색, 이강혁 씨는 검은색이긴 한데 크기가 작잖아. 너밖에 없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벗어라.”
“아니······.”
“그래 봉식아, 너밖에 없다.”
이강혁까지 나의 편을 들어주자, 결국 봉식이는 과감한 상의 탈의를 선택했다.
“에이씨.”
그리고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상의를 대충 쭉쭉 찢어 임시로 얼굴을 가릴만한 복면을 만들어냈다.
우리 셋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자, 고미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얼굴을 가리니 꼭 스틸 맨 같구나! 아주 마음에 든다!”
안 되지. 스틸 맨은 마지막에 자기 정체를 밝히잖아. 우리는 마지막까지 정체불명의 히어로로 남을 예정이라고.
그렇게 변신(?)을 끝마치자, 봉식이와 나의 가슴에 젤리 원자로가 생겨났다.
하지만 조금 서운하게도 내 것보다 봉식이의 젤리 원자로가 훨씬 더 크고 색도 밝았다.
나는 이제 막 축기를 시작했고, 봉식이는 원래 특이체질이니, 받아들일 수 있는 기의 양도 다른 걸까?
그러나 옆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서운함은 사라지고 대신 측은함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곰 선생님, 어째서 저는······.”
봉식이의 곁에는 ‘우리 집에만 산타가 오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은 이강혁이 서 있었다.
“수하 씨는 곰 선생님의 제자라 그렇다 쳐도······.”
슬픔이 가득한 이강혁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강혁 씨,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요.”
“그렇다, 허수아비. 너는 이 몸의 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 대신 네 검을 강화해주마.”
말을 마친 고미의 손에서 희미한 백색 빛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이 몸의 기로 검을 강화하면 얼마 가지 않아 부서지고 말 터이니, 반드시 다섯 초식 안에 승부를 봐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강혁이 잽싸게 고미에게 장검을 건네며 말했다.
우웅-
새하얀 빛이 칼날을 감싸자, 기이한 소리와 함께 검신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충전.”
봉식이의 말에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빠따를 꺼내 적당한 힘으로 녀석의 몸을 두들겨 주었다.
한 놈은 맞아서 충전, 한 놈은 때려서 충전,
과연 죽마고우다운 스킬 구성이군.
바로 그때, 한가지 중대한 문제가 떠올랐다.
한유진 씨가 아침에 내 핵 빠따를 봤다는 사실.
‘하, 첩첩산중이네.’
그러나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는 법이니······.
“이강혁 씨, 부메랑 나 줘요.”
“네?”
지금 이강혁의 등에는 고미가 만들어 준 ‘부메랑’이 걸려 있었다.
아쉬운 대로 저거라도 써야지 어쩌겠나. 어쨌든 고미의 손길이 닿은 물건이니 뭔가 특별한 효과가 있겠지.
이강혁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등에 멘 부메랑을 나에게 넘겼다.
‘대충 집어던지면 뭐라도 되려나.’
곰정사 스킬로 효과를 확인해보고 싶지만, 역시나 등급이 높아 확인이 안 된다.
할 수 없지.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닥치는 대로 해보는 거야.
“준비 끝났어. 시작하자.”
[ 가라! ]
고미의 전음을 신호로 우리 셋은 동시에 앞으로 몸을 날렸다.
[ 수하, 삼룡 어멈에게 하늘로 올라가 폭풍을 날려버리라고 지시해라! ]
[ 알았어! ]
선두에 선 이강혁이 새하얀 검기를 날려 가짜 빙의체의 몸을 갑옷처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안개를 날려버렸다.
[ 봉식이! 가라! ]
그사이 나는 쉴 새 없이 봉식이를 두들기며 녀석의 스킬을 활성화했다.
그러자, 부메랑에 알 수 없는 기운이 깃드는 것이 느껴졌다.
“뒈져라!”
이어서 우렁찬 함성과 함께 푸른 빛이 갑옷처럼 봉식이의 전신을 뒤덮었다.
‘설마 저게 갓-고미님의 웅혼한 기상이 깃든 갑주인가?’
저 물건은 왜 배운 것도 없는데 젤리 원자로를 저렇게 잘 쓰는 거냐.
좀 질투 나네.
쾅!
이내 우렁찬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한유진 씨! 저 폭풍을 맡아줘요!”
머리 위에 떠 있는 폭풍을 가리키며 외치자,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 그보다 당신 누구야?”
한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명할 시간 없어요! 얼른! 날 수 있는 사람 당신밖에 없잖아!”
나의 지시에 그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두 마리의 용과 함께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 이놈들이······!
그림자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부메랑’에서 푸른 불꽃이 일어나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강혁 씨 생각이 진짜로 맞았어?’
이거 날리면 진짜 폭풍이 몰아치는 건가······. 어이가 없군.
- 저, 정화의 기운!? 어떻게 인간 따위가!
몸을 둘러싸고 있던 그림자가 흩어지자, 빙의체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하늘 위에서 몇 덩어리의 시커먼 안개 덩어리가 날아왔다.
[ 허수아비! 저 더러운 오물 덩어리가 회복되는 것을 막아라! ]
고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기 무섭게 백색 검기가 십자 모양으로 교차하며 가짜 빙의체를 향해 날아오는 안개를 베어버렸다.
[ 봉식이! 저놈의 갑옷을 모두 벗겨내라! ]
이어서 봉식이가 놈을 향해 달려들어 커다란 두 손을 휘둘러 검은 안개를 떼어냈다.
[ 수하! 빔이다! 빔으로 모두 태워버려라! ]
빔이라고!?
아직 무리인데······.
[ 에잇, 어서 쏘란 말이다! ]
일단 손으로 기를 모으는 것까지는 어떻게 되는데, 발사가 안 된다.
대신 나에게는 신무기가 있지.
가라, 곰표 부메랑!
있는 힘껏 기를 불어넣어 부메랑을 집어 던지자,
쿠르릉-
천둥 같은 효과음과 함께 시퍼런 전광을 머금은 쇳덩이가 빙의체를 강타하며 그림자를 모조리 날려버렸다.
그 순간, 이강혁이 엄청난 속도로 빙의체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손에 들린 장검은 이미 절반 이상이 부서져 있었다.
단 세 번의 공격으로 몇억이 사라지다니······. 보는 내가 다 마음이 아프네.
푹!
그리고는 부러진 장검에서 눈부신 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그대로 그림자의 가슴을 꿰뚫었다.
[ 아앗! 허수아비! 아직 수하가 빔을 쏘지 않았는데······! ]
고미의 원망 섞인 목소리와 함께 전투는 다소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음······. 다음에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꼭 빔을 쏴야겠군.
- 끄, 네, 네놈들, 어떻게 고······.
빙의체가 마지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촥!
이강혁이 장검을 위쪽으로 휘둘러 끝장을 내버렸다.
으아, 이 사람 진짜 무서워. 앞으로도 원조 호구라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속으로만 생각해야지.
갑자기 나타난 셋이 상황을 정리해 버리자, 장내에는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문경준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
“도움을 받았는데 고맙다는 말보다 질문이 먼저인가?”
이강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문경준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 사이, 한유진이 용을 타고 지상을 향해 내려왔다.
“끝났으면 가죠.”
한유진은 둘째치고, 드래곤들은 나를 알아볼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대장.”
나의 한마디에 이강혁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 * *
고미를 데리고 마트로 가는 길, 입에서 자꾸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모든 게 고작 수제 디저트와 김치볶음밥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 내가 나섰으면 더 빨리 끝났을 것을······.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어서 김치볶음밥을 내놓거라. ]
고미는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홀쭉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김치볶음밥을 내놓으라고 보챘다.
초월자의 가짜 빙의체를 물리쳐 준 대가가 김치볶음밥이라니, 가성비는 훌륭하네.
하지만 이 난리를 피워놓고 김치볶음밥이 입에 맞지 않는다면······.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보다 수하 씨, 어떻게 곰 선생님이 만들어 준 신병에 깃든 힘을 사용하실 수 있던 것입니까?”
피곤하지도 않은지, 이강혁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계속해서 부메랑을 휘둘러 보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일단 장이나 보죠, 고미 배고프대요.”
“앗, 죄송합니다.”
이후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강혁과 함께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갔다.
봉식이는 지금 상의를 탈의한 상태니, 그런 남사스런 꼴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지. 공연음란죄라고.
하지만, 막상 집에 들어가니 온몸이 노곤한 것이 도저히 김치볶음밥을 만들 상태가 아니었다.
‘할 수 없네.’
결국 나는 지리산에서 쓰지 않고 남겨두었던 ‘산신령의 알약’ 두 알 중 하나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 산신령의 알약을 복용합니다. >
< 대자연의 힘이 체력과 마력을 회복 시켜 줍니다. >
으, 헌터 상점에 가져다 팔면 돈푼깨나 될 텐데.
이게 대체 얼마짜리 김치볶음밥이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팬에 기름을 두르고, 먼저 대파와 베이컨을 투하했다.
“수하, 틀림없이 굉장한 맛이겠지?”
그리고 나의 뒤에는······.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시어머니 같은 눈빛을 한 고미가 떠 있었다.
‘으아, 제발 맛있어라. 제발.’